Channel 1. 로키
‘그들’의 일원으로서 살아오면서, 업무상의 여러 이유로 부외자들과 접촉을 하다보면, 그들로부터 ‘그들’에 대한 여러 가지 선입견과 직면해야 할 때가 있어왔다. ‘피에 굶주린 살인광’이라는 대표적인 선입관은 차치해 두고, 그 외에 잡다하게 내 귀를 어지럽힌 질문들을 꼽아보자면 ‘하샤신들은 어디서 물건을 들여와?’가 될 것이다.
뭐...... 그들의 질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 좋은 날붙이들을 일회용으로 써버리곤 하니, 어디에서 그 많은 것들을 척척 들여 오냐는 거겠지. 하지만 ‘히트맨’으로 활동해온 나로서는 그들에게 썩 만족스러워 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물건을 들이는건 ‘휠맨’들의 몫이니까. ‘히트맨’들은 그저 주는 무기 받아서 써버리면 그만이거든.
그래도 찰리와 이것저것 합을 맞췄던 이유로, 어께너머로 휠맨들이 무기들을 들여오는 루트를 지켜본 바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공식적인 시장이 아니라, 암시장에서 들여오는데, 그 장소가......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로 생생했거든. ‘여기서 이런걸 들여온다고?’라고 했을 정도니까. 등잔밑이 어둡다고, 암시장은 이븐 타운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서던 마켓’의 으슥한 골목길에 둥지를 틀고 있다.
“뭘 찾으쇼?”
“니트로 앰플...... 세 개?”
“세 개나? 왕궁이라도 날려버리려고?”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안 그래도 요즘 니트로 물량이 부족한 판이야. 단속도 엄청 심해졌고.”
“무슨 이유라도 있나?”
“거 참 이 양반 뉴스도 안보고 사나...... 거 얼마 전에 하샤신 그 미친놈들이 판오디콘을 털어버린 거 몰라서 그래? 그것 때문에 공무원 새끼들이 니트로 유통한 놈들 찾느라고 여기를 아주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아아......”
“그 일로 재고고 기술자고 죄다 잠수타버리는 통에 요즘은 니트로가 부르는 게 값이야.”
딜러는 우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태도는 마음에 들진 않았을지언정,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니트로로 벼락을 잔뜩 맞은 상황에서 니트로를 찾는 사람이 곱게 보이겠는가? 인간 피뢰침 정도로 보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하지만 그 인간 피뢰침을 존경해 마지않는 고객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는 딜러의 눈앞에서 50파운드 지폐 다발을 흔들어보였다.
“부르는 게 값일 때, 그 이상을 지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거지?”
“돈다발 눈앞에서 흔든다고 없는 물건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운이 정말로 좋은건 인정할 수 밖에 없겠는걸? 마침 기가멕힌 신작이 하나 나왔는데 한번 살펴보실라우?”
“신작?”
“사실 요즘 같은 기술 발전의 시대에 촌스럽게 니트로 같은 구시대의 유물을 찾는건 시대에 뒤떨어졌지. 이건 마이티라는 물건인데, 얘가 이름 그대로 아주 기가 막혀. 흔들어도, 두들겨도, 심지어 불에 태워도 안 터진다니까?”
“내가 사용하려는 목적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데.”
“에이, 그러면 내가 제안을 하겠어? 거기에 기폭장치만 장착하면 니트로 따위는 귀여운 꼬맹이로 보일걸?”
언제 가지고 왔는지, 딜러는 우리 눈앞에서 물건을 가지고 와서 흔들어보였다. 그 동작이 사뭇 과장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이 것을 너희에게 어떻게든 팔아치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역시...... 돈 만 한 미끼가 없지.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Channel 2. 아이리스
알샤인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지만...... 사실 그의 가방에서 ‘가면’이 나온 것은 이상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넘기려 했지만...... 생선가시 같은 생각 하나가 목젖에 박힌 것처럼 자꾸 걸리는 거에요. 증거품을 저렇게 개인가방에 쑤셔 넣고 다녀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 말이죠.
아 물론 그의 성정을 지적하는 건 아니에요. 알샤인 그는......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성실한걸요. 화장실을 가는 것 같은 개인적인 용무조차도 일일이 보고하면서 움직이고, 경호 임무 중에 돌발 상황 (술에 취한 사람의 폭행사건 같은)이 발생해도, 자신의 임무, 그러니까....... 우리 ‘필그림’들의 신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손가락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동료 기사를 불러서 처리할 정도니까요.
역설적이게도 제 의문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매뉴얼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 같은...... 그 누구보다도 공무원적인 이 남자가 왜 그런 기본적인 수칙을 어기고 있냐는 거에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지요.
저는 ‘The Cloud’의 주주로서 이런 그의 행동이 내포한 의미가 궁금했고, 실제로 그 의문을 제기할 자격이 있어요. 하지만...... 왠지 모를 께름칙함이, 그 의문을 음파의 파형으로 만들어 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이곳엔 저와 이 남자 단 둘뿐인걸요. 께름칙한 기분은 잠시 묻어두고, 그저 그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서글픈 사실이죠.
“다녀왔...... 으응?”
“옴마? 여그는...... 웬 일이여?”
보따리를 한 가득 바리바리 매고 온 두 남자는 저와 알샤인씨의 투 샷을 믿기지 않는 듯 한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들의 계획에 따른다면 알샤인씨는 여기에 절대로 있어선 안됐거든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스톤메이슨을 지형정찰 하고, 작전을 실행할 때 필요한 물품들을 바리바리 싸온다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가 이곳에 없을거라고 생각을 했으니...... 바리바리 물건을 싸온 그들로선 당황할 수 밖에요.
“다녀오셨습니까? 근데 저건......”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역시나 알샤인씨는 그들 둘이 바리바리 싸들고 온 보따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이상하게 둘러대다간, 알샤인씨가 더욱 호기심을 느끼고 보따리를 풀어헤칠지도 모르는 일이겠어요. 그렇다면 저로선......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도 있는 셈인걸요.
“저게......그..... 뭐냐면 말이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주설씨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결국 미팅시간 맞추느라 생리대도 못 차고 갔다구요.”
햇볕을 바라보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재채기마냥 제 입에서는 제 의사와 상관없는 말이 마구 튀어나왔습니다. 그 말에 로키군과 리겔은 셔틀콕을 휘두르듯이 곧바로 반응을 보였어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었죠. 그들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은 했다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알샤인씨에게 추악한 진실을 고발할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던 것 같아요. 어쨌거나, 서투른 연극이었어도 관객은 바보라고,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알샤인씨를 속여 넘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 제가 실례를 저지를 뻔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일단 줘 봐요. 방에다가 쟁여놓게.”
“어. 어 그래. 부탁한다.”
“다음부터는 빨리 가지고 와요. 주설씨가 얼마나 고역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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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여그는 우덜이 보고 있을라니, 주사장헌티로 핑 가씨요.”
“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샤인이 문을 나서자마자 우리들은 크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리겔은 진정으로 고맙다는 얼굴로 답답이를 바라봤지만, 답답이는 ‘됐어 뭘.’이라는 말로 일축해버렸다. 아무리 급한 김이라고 했지만, 그녀로서는 자신의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신념과는 별개로, 도움은 받은 것은 사실이니 맨입으로나마 감사의 표시 정도는 해야겠지.
“고맙다. 덕분에 잘 넘길 수 있었어.”
“어...... 음.....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뭔 소리냐? 뭔 일이 있었냐?”
“말하자면 복잡하긴 한데......”
답답이는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손톱을 한참동안 물어뜯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은 길었고, 다소 두서없기는 했으나, 대강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샤인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봐요. 아무리 수사관이라도 용의자가 남겨둔 증거품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다니는 게 말이 되요?”
“음..... 수비대허구 친하게 지내서 좋을 거 없다는 주의라 잘은 몰겄다마는...... 상식적으론 안 되겄제?”
“그래, 막말로 저 가면에 자기 지문이라도 묻기라도 하는 날엔, 그 자신도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다고. 그걸 감수하고 그걸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겠지. 알리바이가 있거나, 자기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어느 것도 아니면”
답답이는 생각하기도 싫은 것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다는 것에 진저리를 쳤다.
“그 물건의...... 주인이거나.”
“쪼깐 오바가 심헌디?”
나름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꺼냈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나와 리겔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답답이는 답답함에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건 나나 리겔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증거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일 지도 모르는데,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나의 문제제기에 답답이는 ‘모든 걸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면서요.’라며 내가 무사안일하게 일을 받아들인다고 비난했다.
“만약에 그가 정말 가면살인마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그럼 반대로 묻자고. 그 사람이 정말 가면살인자라면, 너는 어떻게 할 참인데?”
나름 허를 찌른다고 찔렀지만, 답답이는 교묘하게 파놓은 내 함정 따위는 밟아 날려버리면 된다는 듯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신고해야죠!”
그 말에, 리겔은 물론이고, 나까지도 웃음이 컥 하고 터져 나왔다. 이거...... ‘비정한 마음’이 단단히 고장 난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것이 중화하는데 애를 먹을 정도로 녀석의 말이 웃겼던가. 이 얼마나 지독한 블랙코미디란 말인가? 신분을 숨긴 지명수배자가 수비대에 당당히 들어가 누군가를 고발하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아 진짜, 그렇게 비웃지만 말고, 나 좀 도와줘요. 그리고 약속도 했잖아요. 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로요.”
“그건 네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에 한정된......”
“그것도 그 일환이에요. 로키군 당신이 얼마나 일을......”
답답이는 나름 그럴듯한 단어조합을 지어내느라 한참을 끙끙거리다...... 마침내
“성실하게 하는지...... 알고 싶다구요.”
“......성실?”
단어의 티끌을 모아, 조금 더 큰 티끌을 만들어내 보였다.
답답이는 내 반문에 자신의 허접한 논리에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리겔은 그 모습을 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꺽꺽 소리로 치환하면서 어떻게든 집어 삼키려 애를 써댔다. 하아..... 총체적인 난국이 바로 이런 거겠지? 그래도 녀석이 이렇게 자신의 논리를 비틀어가면서까지 역설을 해대는데...... 그래 까짓거 눈 한 번 감아주지 뭐. 이번 일을 통해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녀석 특유의 ‘대책 없는 낙관론’이 한계에 봉착한다면 아마...... 녀석도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게 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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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정말 다른 말은 몰라도 그 말만은 하면 안됐었어요. 세상에 성실하게 일하는 게 궁금하니까 알샤인씨를 감시해 달라니, 이건 진짜 어느 나라에서도, 아니 나라라는 공간이라는 범주에, 시간이라는 변수를 하나 더 집어넣어도, 전무후무한 뻘 소리였을 거에요. 로키군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게 대관절 어느 나라 개소리지?’라는 투로 바라보았고, 리겔은..... 아 진짜 이게 제일 짜증나는 부분인데요. 무릎을 연신 두드리며 꺽꺽대더라니까요. 그 모습이 정말로 꼴 보기 싫었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소리를 낳은 제 입, 제 혓바닥이 제일 큰 죄를 지은걸요.
간만에 찾아낸 대 발견이, 한낱 잘못된 단어의 조합 덕분에 그대로 사장될 위기였습니다.
“그래 뭐 한번 알아나 보지 뭐.”
“진짜요?”
“그럼. 리스크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는 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보단 훨씬 나으니까.”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천하의 머저리 같은 말을 내뱉은 순간,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미래상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은 이 두 남자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거였어요. 로키군과 리겔은 성격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 형식은 확연이 차이가 날 지언정, 저를 비웃는 데에는 거시적인 합의를 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로키군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뜻 동의를 해주었지요. 이거 참...... 감회가 새롭네요. 든든하게 나서주는 그의 모습을 보자면, 그 동안 그와 빚었던 갈등이, 그리고 그로인한 앙금들이 씻겨내려가는 것 같......
“겸사겸사 나의 성실함도 어필하기도 하고 말이야.”
“.......”
......아 진짜 짜증나네.
“야 리겔, 나는 답답이랑 나갔다가 올 테니까. 그동안 조립 잘 하고 있어라. 알았지?”
“잉 알겄네잉.”
“아 근데 혹시 과자같은거 하나 있냐?”
“쩌그 테이블에 있는거 같던디 하나 챙겨가라.”
로키군은 테이블에 있던 과자 바구니에서 초콜릿을 한 주먹 가득 꺼내고선 저와 함께 숙소 밖으로 나섰습니다. 장소는 뭐...... 주설씨가 갔을 운터브룩이겠죠 뭘. 그러고 보니, 이곳도 거진 7개월 만에 와보는 것 같습니다. 이 도시에 돌아오고 나서도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 가면서 운터브룩에 다시 발걸음 하는 것을 피해왔었는데...... 결국은 다시 이곳에 발을 디디게 될 줄이야...... 그것도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불안한건 사실입니다. 이곳을 떠날 때, 곱게 떠난 건...... 아니잖아요? 저희 둘은 이곳에서 거하게 사고를 쳤고,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 이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거라, 왜 이런 일을 벌여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로키군에게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를 듣고 나서는 ‘그들’의 음험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제 앞에 있을 여러 가지 미래 중에서, 제일 피해야만 할 것을 그들은 웃는 낯으로 가리고 있었던 거 에요.
가급적이면 다시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고, 그들 역시 우리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한편으로 역설적으로 오히려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장소로 가는 건 매우 꺼림칙한 일임은 분명하나...... 한 가지 사실이 저와 로키군을 그곳으로 발걸음하게 만들어주었어요. 그건 ‘하샤신들의 아버지’가 한 약속이었습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만큼은 ‘그들’쪽에서 먼저 우리를 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중앙 집권적인 ‘하샤신’들의 권력 특성상, 우리가 운터브룩을 들쑤시고 다녀도 ‘그들’쪽에서는 우리를 먼저 건드릴 수는 없을 거에요.
어쨌거나, 그 덕분에 우리는 ‘쓰레기 산’을 올라야만 했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이 고바위 길, 그리고 이끼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옥들...... 군데군데 그을린 흔적과, 무너진 채 다시 지어지지 못한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7개월의 시간은 그날 화마의 흔적들을 조금씩, 조금씩 덮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설은 아마 마을 회관에 있지 싶다.”
“그래요? 그건 어디에 있어요?”
“저쪽이다.”
로키군이 가리킨 곳은, ‘쓰레기 산’의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가옥이었어요. 저는 가옥의 위치를 보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운터브룩의 구조상, 마을회관을 지어야 한다면...... 저곳 이상 가는 입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왜 그런고 하면...... 운터브룩을 흔히 ‘쓰레기 산’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산은 ‘산’하나만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랑과 서랑이라는 두 개의 가파른 절벽이 마주보고 있거든요. 멀리서 보면...... 귀가 쫑긋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 산’이라는 멸칭이 자리잡기 전에는 이곳의 거주민들에게서는 ‘말귀 뫼’라고 불렸다고 해요.
“저기라면 가기는 편하겠는데요? 당장 주설씨를 만나서......”
“아니지.”
로키군은 기세 좋게 계곡을 올라가려는 제 뒷덜미를 잡아 세웠습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스텝이 꼬여 적잖이 굴욕을 당해야만 했지요. 아이고..... 하필 소매가 목울대를 때리다니, 운이 없어도 이간저간 없는게 아닙니다.
“아 왜요!”
“기다려 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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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고, 목 뒷덜미는 붉게 상기되어있었으며, 코에서 나오는 김은 평소의 것 보다 훨씬 뜨거웠다. 이 모든 신체적 지표들을 미루어 볼 때, 답답이는 내 행동의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에요?”
거봐, 내 말이 맞지? 어쨌거나 녀석이 내게 공을 던졌으니, 이젠 내가 그녀를 설득해야 할 차례다.
“무작정 쳐들어가는 게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네 말에는 반신반의 하고 있거든. 관계자 한 사람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는 마당에, 최종결정권자를 설득시킬 수 있겠냐?”
“그건...... 그럴 거면 여기까진 왜 온 거에요?”
“설득할 재료를 구하러.”
“.......?”
이번에 한 번 더 맞춰볼까? 지금 녀석은 아마...... 이게 무슨
“이게 무슨 개소리에요?”
역시...... 이번에도......
지금 상황에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지금 이 사건이 나의 새로운 평생직장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알게티 역 앞에서 돗자리 깔고 앉아있으면 아마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겠는 걸? 아니지 아니지,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폭주해서 날뛰기 전에 그 입을 다물리고 답답이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은 길고, 그대로 이어가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요약을 해서 말을 하자면, 설득의 재료란 ‘알샤인의 수상한 행적’이고, 그러한 것을 수합해서 답답이의 가설 ‘알샤인의 정체는 가면 살인마다.’을 검증하자는 거다. 주설을 찾아가는 건 그 이후에 해도 충분하다.
내 말은 그럴 듯 했고, 아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답답이는 내 의견을 수용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했고, 이를 수용했다면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답답이의 생각도 그러했다.
“그럼 정보 수집을 어떻게 할 참이에요?”
“물론 내가 직접 발로 뛰어야겠지만, 내 몸뚱이는 하나밖에 없으니......”
“정보원을 구한다?”
“그렇지.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문제요?”
“응. 나는 더 이상 ‘그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정식으로 ‘휠맨’을 활용할 수는 없거든.”
“그럼..... 아 그래요. 계속 이야기 해봐요.”
답답이는 내 말에 바로 테클을 걸려다가...... 멈칫하고 한 박자를 쉬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인간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반복이다.’라더니, 그녀는 자신의 본성이라는 도전과제를 인내를 가지고 멋들어지게 응전한 셈이지 않은가. 이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알다시피 이 취락의 주요 수입원은 ‘그들’이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여러 재화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용역을 제공하기도 해. ‘그들’이 반드시 해야 하거나, ‘그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에 조그마한 회색지대가 있거든. 거기에 해당되는 일에는 이곳의 주민들이 나서는 거지. 그리고 그 것에 대한 소정의 보상을 받는 거고.”
“회색지대......”
“거기엔 ‘미행’도 포함되어있어. 어떤 면에선 ‘휠맨’들 보다 일처리가 더 능숙하지.”
“고용은 어떻게 하는데요?”
“그건...... 생각보다 간단해.”
나는 헛기침을 한 뒤에, ‘운터브룩에 오신걸 환영합니다.’라는 명패에 기대서 초콜릿을 꺼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이고 맛나다.”
“뭐...... 하는거에요?”
“기다려봐.”
달디 단 당분 덩어리를 먹고 있다 보니, 넝마조각을 걸친 꼬마아이들 몇몇이 나와 입맛을 다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역시 미끼를 바로 물어드는구먼.
“왜 꼬맹이들?”
“아저씨...... 쪼꼬렛 하나만 주면 안 돼유?”
“이걸? 내가? 왜?”
“그제부터 콩 찌깨미 빼곤 암것두 못 묵어서......”
“아이고 저런. 안됐네. 좋은날 있겠지. 밝은 너의 미래를 응원하마.”
나는 꼬마들이 보란 듯이 초콜릿을 털어먹었고, 포장지를 슬쩍 땅바닥에 버렸다. 거리의 아이들은 은박지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포장지를 햝아먹어댔다.
“거 참 아주 난리가 났구먼. 야야 옷 더러워진다. 그만!”
“......쪼꼬렛......”
“그래, 알았다. 아주 피골이 상접했구먼 그래. 마침 초콜렛이 하나 더 있네. 먹고 싶은 사람?”
꼬맹이들은 마치 훈련받는 개들처럼 손을 번쩍 들었고, 나는 그중에서 덩치가 있는 녀석 하나와, 제일 조그만한 아이 하나를 골랐다. 나는 그들에게 초콜렛 봉지를 흔들어보였다.
“여기 니들이 원하는 초콜렛이야.”
“고마워유. 이 은혜는 참말루다가.......”
“대신.”
나는 초콜렛을 반을 뚝 잘라서 반만 녀석들의 손에 쥐어주고, 나머지는 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녀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머지 절반도 주마.”
“뭔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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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군은 능숙한 솜씨로 아이들을 꾀어냈고, 순진함과 허기를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아이들은 그가 네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넙죽 받아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보이지 않는 손톱이 제 가슴팍을 가늘게 저미는 것 같은 통증이 들었어요.
“알겠지?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니까 한 번 더 확인해보자고. 언제부터 해야 한다고 했지?”
“해 떨어지고 나서유.”
“오케이 잘 기억하고 있군. 거기 아까 대답한 친구.”
“예?”
“이거 받으라고.”
로키군은 소년을 향해 초콜릿을 던져주었습니다. 엉겁결에 보물을 받아든 소년의 얼굴은 얼떨떨함에서 성취감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부러움과 질시 그리고.....
“어디에서......”
“저유! 저!”
“어..... 그래, 저기 오른쪽 친구?”
“구역 나눠서 살펴보기로 혔슈.”
“오케이 좋아.”
몇 차례 문답이 오고간 뒤에, 아이들의 입은 초콜릿색으로 시나브로 물들어갔고, 로키군의 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져갔습니다. 마지막 초콜릿이 그의 손을 떠난 것을 확인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있었습니다.
“오늘 장사는 여기서 끝!”
“이잉?”
“오늘 먹을 것 다 먹었다고 아쉬워 할 거 없어. 오늘만 날인건 아니잖아? 대신에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와야 초콜릿을 줄거야. 알겠어?”
“잉 알겄어유.”
아이들은 삼삼오오 동무들끼리 흩어졌고, 공터에는 저와 로키군만 남았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남은 초콜릿을 꺼내 제게 건넸습니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이곳을 나서기엔 혀 안쪽이 너무 깔깔해서 별 수 없이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깔끔하지?”
“이렇게 하는게 맞나 싶네요.”
“내가 예상한 거랑 조금 질문의 결이 다른데? 나는 ‘정말 효과가 있어요?’라고 물을 줄 알았거든.”
“......”
“초콜릿으로 때우는 거니, 가성비 하나는 확실하지. 뭐..... 재수 없게 실패하더라도 그냥 그날 치 초콜릿 하나 못먹는거 뿐이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로키군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그냥 부랑아 하나가 죽은 거 뿐인데 아무도 관심 안 가질 거고.”
“부랑아 하나요?”
제 질문에도 로키군은 다른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여전히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요. 그의 의도적인 무시에 스멀스멀 화가 나려고 했습니다.
“그래 부랑아 하나. 어차피 콩찌깨미 주워 먹으며 천천히 죽어가는 마당인데, 기왕이면 약간의 리스크 각오하고 맛있는 거 먹고 싶어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