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8월 30일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어느덧 약속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더딘 듯 빠르게 흘러간 시간들을 되돌아보자면 나는...... 나를 향해 덤벼드는 온갖 일에 휘둘리며 간신히 가드를 들어 올리는 데에만 급급했던게 아니었을까? 물론 파상공세는 고통스러웠고, 때로는 K.O의 위기도 있었지만, 끝까지 가드를 내리지 않은 덕분에 업무의 링에서 무릎을 꿇는 추태는 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해온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PBRC를 위한 파티준비와, 알샤인에 대한 뒷조사였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아주 멍청했던 것이, 답답이에게 알샤인을 뒷조사하는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일은 아주 손쉽게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발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 도발에 넘어간 대가로, 나는 두 가지 일들이 만들어내는 콤비네이션에 정신도 못 차리고 두들겨 맞기만 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끝내 무릎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거의’해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PBRC가 모이는 장소에 폭약도 설치했고, 기폭장치는 전선만 연결하면 완성이다.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천공해놓은 곳에 알기에바를 전개해 놓았다. 운 없는 몇은 낙사할 수도 있겠지만....... 뭐, 그건 그쪽 사정이니까 내 알바는 아니지. 그저 ‘PBRC와 기사단의 대립’이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반면 알샤인의 뒷조사에 대해서는......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리의 아이들이 모아온 정보에 따르면, 그녀석은 지극히 공무원적인 녀석이었다. 출근시간 따박따박 지키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고, 퇴근시간 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남들과는 차별화된 충성심을 보이고 싶었던 일부 열정적인 꼬맹이들이 밤을 새워 그의 집 앞을 지켰다고 하지만, 알샤인이 밖으로 나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살인사건은 꼬박꼬박 벌어졌고...... 본의가 아니라지만, ‘하샤신’이 공무원의 부재증명을 해준 셈이라니, 세상이 확실히 요지경이긴 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집 세고 답답한 여자는 자신의 직감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녀는 거리의 아이들이 보고해오는 그 시간을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려왔고, 꼬맹이들이 매번 가지고 오는 ‘실망스러운 보고’에 낙담을 했다. 2일차부터는 반쯤 이성을 내려놓았는지, 아이들에게 ‘제대로 본 게 맞아?’라며 다그치기까지 하더군. 그러다가 마침내 5일차인 어제는 자신이 직접 미행을 하겠다며 나서는 통에 나머지 ‘필그림’들이 말리느라 진땀깨나 흘려야만 했다.
구멍 파헤치랴, 답답이 단속하랴 손이 네 개라도 모자랄 시간이었지만 결국 시간은 물먹은 신발을 질질 끌면서나마 움직이긴 했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폭약 설치는 기폭장치만 연결하면 돼.”
“안전망은?”
“그것도 장치해놨다. 기사단과의 접촉은?”
“익명으로 해 놨어라우. 내일 스톤메이슨에서 PBRC의 집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알려놨응께로. 폭발이 터져블믄, 기사단은 바로 PBRC넘덜을 용의자로 지목 하겄제.”
“그려...... 일 허느라 욕 많이 봤네. 내일꺼정 긴장들 놓지 말구 일 끝나믄 하루 날 잡고 푹 쉬어.”
“이번 일은 어쨋건 보안이 최우선이야. 알샤인은 모르게 하고......”
“실례합니다. 깜빡하고 서류가방을 두고 가서요.”
“......?”
언제 나타났는지, 알샤인이 문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오매 깜짝이야. 뭐시여 시방?”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었나 보네요? 뭐가 최우선이라고 하시던거 같던데.”
“.......”
와.....씨...... 진짜 ‘재수 없는 자라는 토끼를 잡아와도 뱃속이 텅 비었다.’라는 문장을 언제 사용하나 했더니, 이럴 때 사용하려고 남겨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상황을 설계하는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어쨌거나 우리는 문 앞에 선 이 남자 앞에서 할 말을 잃었고, 남자는 우리의 침묵에도 자신의 호기심을 한발자국 뒤로 물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뭔데요? 최우선이?”
“.......”
우리는 서로를 끔뻑끔뻑 바라보았지만 딱히 이렇다할 해답은 보이지 않았고, 알샤인도 슬슬 짜증과 오기가 났는지 문앞에 기대서서 우리를 채근해댔다. 악순환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럴 때 누군가가 나서서 기가막힌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나는 아마 삼민상단에 있는 나의 지분중 절반이라도 뚝 떼......
“해......피 벌쓰......데이 투......유.”
“?!?”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이성적인 사고를 완전히 두개골 밖으로 날려버렸는지 리겔은 머뭇거리며 되도 않은 애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그건 정말 아닌 거 같다. 아니 아무 말이나 들이대면 그게 들어 맞냐고..... 세상이 무슨 1000피스짜리 퍼즐도 아니......
“.......응? 어떻게 알았어요? 전혀 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
와...... 끝까지 생각을 이어갔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그나저나...... 이게 먹힌다고? 말이 되나? 어쨌거나 거짓말 같이 리겔의 촉이 들어맞았고, 알샤인은 뜻밖의 서프라이즈에 적잖이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나는 눈치껏 박수를 치며 리겔에게 장단을 맞춰주었고, 주설은 남은 한쪽 손으로 배를 두드리며 보조를 맞춰나갔다.
“사랑하는 알샤인의...... 생일 축하 합니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8월 30일
생각해보면 정신없는 한주였어요. 아니,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라스알게티에 돌아온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정신줄 잡고 산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특히 이번 주는 로키군들의 일처리를 지켜보는 한편으로 알샤인씨에 대한 감시를 하느라 눈이고 귀고 뜨고 기울일 새 없이 바쁘게 지냈던 것 같아요....... 아이러니 하게도 로키군의 도움이 컸어요. 그의 근무시간에는 어차피 우리를 호위하는 마당이니 그를 감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가 퇴근한 뒤잖아요? 그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던 시간의 간극을 메워준 게 바로 로키군이었어요.
거리의 아이들은 그가 말 한 대로 일처리에 정말 열심을 다했습니다. 얼마 전에 듣기로는 알샤인씨의 집 앞에서 밤새 뻗치고 앉아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니까요. 하지만 아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샤인씨가 ‘가면살인마’라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아...... 이걸 어쩐다?”
초콜릿을 받으면서 미안해하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노라니 가슴이 답답해져왔습니다. 아무리 왕도라고 한들, 밤사이의 거리가 안전하겠어요? 가면살인마가 워낙 흥행몰이 아닌 흥행몰이를 하다 보니 다른 범죄들이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 도시에는 알게 모르게 범죄가 많은 도시입니다. 관련통계가 나온 뒤로, 라스알게티는 범죄율 1위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모범적인 범죄도시인걸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뻗치기를 한다는건 보통 용기를 가지지 않고선 힘든 노릇입니다.
직접 나서보려고도 하긴 했었어요.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로키군을 위시한 나머지 ‘필그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걱정하던 바로 그 이유를 들면서 말이에요. 로키군네는 그래도 어찌어찌 자신의 일들을 완성시켜 나가는데, 제 쪽은 손에 잡힌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점이 저를 정말 초조하게 만들었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예 뭐 그냥...... 에? 여기는 무슨 일로?”
“퇴근시간이라 이젠 집 가야죠.”
벤치에 앉아서 손톱을 물어뜯는데 알샤인씨가 옆에 서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어요. 어라? 이게 왠 기회죠? 그에게 어떻게든 접근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습니다. 심장이 쫄깃쫄깃해졌지만, 극한의 자제력을 발휘해,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옆 자리를 내주었어요.
“경호하느라 고생이 많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저희 업계에서는 꿀이에요. 사람들도 친절하고, PBRC도 생각보다 잠잠하고.”
“그럼 일은 언제까지......”
“글세요, 상부에서 판단하지 않을까요?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아마 다다음주쯤엔 경호조치를 해제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다음주라......”
‘그렇다면 다다음주에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경호를 하고 있겠네요.’라는 말을 삼키고 저는 빙긋 웃어보였습니다. 저도 참 많이 뻔뻔스러워진 것 같아요.
“다다음주면 이별인거에요? 주설씨한테는 말 했고요?”
“아뇨 아직...... 다음 주에나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아,,,,,, 그래도 미리 말을 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도 미리 대비를 하고 그럴텐데.”
“대비라고 할 게 있나요. 상황도 많이 호전되었는걸요.”
저는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이야기의 꼭지를 잡기 위해 무던히 손을 휘저었지만...... 이 남자는 도통 여지를 줄 생각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정말 선 하나는 확실히 긋는거 보니, 천상 공무원이 맞는 모양이에요. 그렇게 그와의 대화가 잡아 뜯겨지기 직전에....... 이번에는 그가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더군요.
“그나저나 이번에 경호를 하면서 많은걸 느꼈어요.”
“느껴요? 뭐를 느끼셨으려나?”
“저는 그동안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불쌍하다.’라는 감정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더 잘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알샤인씨가 말을 더 이어가려다가 문득 말을 멈추었습니다. 대관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하고 저는 그를 자세히 지켜보았어요.
“주설씨는 다르더라구요. 매사에 당당하고, 활달하고...... 그분을 경호하면서 이따금씩 그녀가 몸이 불편하다는걸 깜빡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화들짝 놀라곤 했습니다.”
“하긴...... 단언컨대 보통 위인은 아니죠.”
“맞아요. 장애를 딛고 일어난 사례야 케케묵은 먼지 뒤집어 쓴 위인전에서 몇 토막을 보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제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극복하는걸 넘어서, 아예 그걸 내색조차 안하니까, 아 그런데 아이리스씨는 주설씨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죠?”
“뭐......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한 몇 달 됐죠?”
“아 그래요? 사실 본인에겐 직접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뭔데요?”
“팔은 대관절 무슨 일로 그렇게 된 거에요? 선천적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가끔 왼 팔로 잡으려다가 헛손질 하고는 쓴 웃음 짓는 걸 몇 번 봤거든요.”
“아...... 사고였어요. 지독한.”
“응? 사고요?”
“네. 라스알하게에서 난리가 난 건 아시죠? 거기에 휘말렸다가 네이팜에......”
“허어...... 네이팜이라니. 지독한 놈들.”
제 말에 알샤인씨는 탄식을 뱉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건 순전이 제 생각에 불과하고, 사실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알샤인씨가 스스로 입을 열어 한 화제의 대부분이...... 주설씨에 대한 거 맞죠? 흐음...... 남의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썩 ‘도덕적’인 일은 아니긴 하지만...... 이것도 나름......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아 맞다. 저 깜빡하고 Cloud에 물건 놓고 왔는데. 같이 가실래요?”
Channel 1. 로키
대충 얼버무리려던게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은 격이 되면서, 일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주설과 리겔은 알샤인에게 생일 축하겸 저녁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알샤인은 고마워 하는 한편으론 한사코 거절을 하려고 들었지만...... 그들의 강한 의지를 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기에 답답이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의 팔을 잡아끌면서 합류하는 바람에 사실상 확인 사살을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자 잔덜 채우시고 날이 날이니 맨큼, 내일은 없다 하구 질펀허게 퍼묵어 보는거여. 다덜 알겄는가?”
잔을 채우는 리겔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나 보였....... 아니지, 클라허 타히의 파티 때만큼이나 신나보였다. 그때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큰 범주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녀석의 손에 들린 맥주병에서 거품을 문 노란색 액체가 기분 좋은 톡 쏘는 소리를 내며 잔속으로 흘러들어갔고, 투명한 유리잔은 노란 액체를 온몸으로 품었다.
“잔덜 다 채웠음, 건배사 한번 혀야제? 첫잔잉께로 주인공이 한번 포문 열어보씨요.”
“에..... 저요?”
“잉! 오늘 생일 맞은 사람이 자네 말고 또 있당가?”
알샤인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나를 포함한 네 명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줄 생각은 1도 없었다. 이런게 또...... 이런 자리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주설과 아이리스는 키득거리며 알샤인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 역시...... ‘흥미롭다.’라고 형용할 수 있는 표정을 지어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크흠...... 흠...... 일단 부족한 저를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 정말로 감사드.......”
“오매 술 미지근혀지겄네, 뭔 사설이 그리 길어브요?”
리겔의 짓궂은 말에 나머지 필그림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샤인은 얼굴이 새빨개져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잔을 높이 들었다.
“우리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위하여!”
다섯 개의 잔이 맞부딪치면서 서로 품고 있던 액체들을 교환했고, 우리는 그것들을 숨도 쉬지 않고 쭉 들이켰다. 8월의 후텁지근한 공기와 대척점을 이루는 시원한 액체가 우리의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크...... 목구멍이 쨍쨍해졌다.
“아따 우리 주사님 건배사 한 번 기가 맥히게...... 그지 깽깽이 같구먼. 이쯤서 나가 한 번 나서봐야 쓰겄네.”
리겔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잔을 채워 넣었다. 녀석이 왜 저러는 것일까? 일단 알샤인을 속여 넘겼다는 안도감일까? 아니면, 안도감을 넘어서, 아예 없던 일로 확정지어야 한다는 조급증일까? 아니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제 3의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무슨 이유이건 간에, 녀석의 명랑함에는 가면같은 이질감의 잔향이 짙게 배어있었다.
“다덜 진달래로 운 한번 띄워 줘보씨요. 나가 멋들어지게 해불랑게.”
“진달래?”
“잉. 진달래여. 기왕이믄 찐달래라고 허믄 더 좋고.”
“찐!”
“찐허고.”
“달!”
“달달한.”
“래!”
“내일을 위하여!”
“위하여!”
다소 성급하고 과장된 감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녀석의 건배사는 그의 호언장담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괜찮았고, 우리는 기분 좋게 잔을 맞부딪쳤다.
Channel 2. 아이리스
아까의 흥겨운 분위기는 손등위의 아세톤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는 ‘긴장감’이 대신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리겔은 결심한 듯, 고개를 쳐들고
“간......다아아!”
자신의 머리를 테이블에 쾅 하고 내리치자마자, 맥주잔 위에 아슬아슬하게 열을 지어 서 있던 보드카 잔들이 맥주잔 속으로 퐁당퐁당 다이빙 했습니다. 정말...... ‘또라이 짓거리 하는 방법을 연구라도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야!!!”
제 생각과는 별개로, 나머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잔을 집어 들었어요. 그들은 잔을 들어 건배를 하면서, 리겔의 ‘잘 노는’모습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요. 그래요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그는 정말로 ‘놀 줄 아는’ 사람임이 분명해요.
술 하면 저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왜 저는 잔을 들지 않느냐고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로키군이 한사코 말리는 통에, 저는 아쉽게도 따로 마련된 맥주잔을 그것도 딱 한 잔만 홀짝홀짝 마셔야 하는 형편이었거든요. 아 진짜......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왜 그렇게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돼요. 언제부터 그랬다고 엄마 행세를 하는지 원......
“성님 머리는 괜잔소?”
“아따 나가 동상덜 헌티 걱정이나 받아야 할 군번인줄 아냐? 요것이 다 기술적으로 박는거라 소리만 왈광뎅광하지 암스렁또 안혀!”
“왐마 성님 기세가 허버 대단시럽소잉!”
술이 들어가니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죠? 알샤인씨는 어느덧 자신의 고향말을 해가면서 리겔의 기상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아까만 하더라도 주설씨에 대해 말을 늘어놓던 그 수줍은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프로하기온 넘덜 둘이 모이믄 시장바닥 된다드만 틀린말이 아닌개벼.”
이 와중에 주설씨도 제법 취했는지, 서글서글하던 평소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쨍쨍하니 시크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주억거렸습니다. 저런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저만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녀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아따 주사장 찬바람이 춥다 허것소? 사람이 왜 이렇게 쨍쨍허요?”
“내비 둬...... 날도 더븐디 냉 족발이나 해묵게.”
나름 친근하게 대한 것 같은데 되돌아온 것은 워낙 찬바람이 쌩쌩 부는 말인지라, 알샤인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워서 저를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은 낄낄거리며 웃어버렸답니다. 아아...... 이 여자의 매력의 끝은 대체 어디란 말입니까. 이젠 사뭇 두렵기까지 한 것 같아요.
“근디말여.”
“네?”
“아이리스 니는 뭐가 그리 급허다구 자꾸 자작을 하는거여?”
“네.......네? 제가요? 난 자작 안했는데?”
“자작을 안혔다구? 아 그려......? 나가 헷갈렸나보네.”
“헷갈려요? 뭐를......?”
“아니, 우덜 잔은 계속 비는디, 아이리스 니 잔은 당최 주는 꼴을 못봐서 몰래 자작이라도 허는줄 알았지. 만혀.”
세상에...... 이젠 블랙유머까지. 저는 이때다 싶어 로키군을 한번 슬쩍 봤다가, 얼른 잔을 비우고 주설씨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습니다. 로키군은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한번 찌푸렸다가...... 뭐라 말은 못하고 그저 자기 잔만 꾸역꾸역 비워내더라구요. 하긴 뭐, 저도 로키군의 자식이 아니기도 하고, 다 큰 어른인데 뭐가 거리낄게 있겠어요?
“오늘 요것만 묵고 끝낼건 아니지?”
“어휴, 그럼요. 사람 섭섭하게 왜그래요?”
“그럼 오늘 이거 묵고 스타트 끊는거여. 알겄지?”
“네!”
Channel 1. 로키
술은 계속해서 돌아갔고, 술이 술을 먹고, 그 술이 사람의 정신을 잡아먹는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공고해져갔다. 알샤인과 리겔은 돼지처럼 꽥꽥거리며 프로하기온의 주제가인 ‘남행열차’를 불러제꼈고, 주설은 그 옆에서 주억거리며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췄다. 답답이는......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번만큼은 얌전히 곯아떨어졌다. 짐짓 아닌척 하고 제 3자같이 말하긴 했지만 실상은...... 나 역시도 골속이 눅눅해질 정도로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눈물은 흐르꼬오오...... 내 눈물도 흐르고오오......”
얼씨구? 리겔놈은 알샤인이 마치 스탠딩 마이크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꽥꽥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름 운치를 맞춘다고 맞췄지만 허 참...... 늘어진 오르골같이 꼴사나울 뿐이었다.
“이뤄버린 첫사랑도...... 흐르네이이.......”
주설마저 젓가락을 마이크 삼아 바이브레이션을 넣고 있었다. 골속을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취기 속에서 별안간 ‘부끄러움’이라는 암초가 훅 하고 튀어나왔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고, 주인장의 손을 잡으며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친구들이 아닌데......’라고 사과하는 말을 하려했다....... 만, 어디까지나
“죄숑합뉘....... 우욱!”
시도에 불과했다는 걸 미리 말해두는 바이다. 주인장의 손에 진득하니 밴 기름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뭐라고 이 기분을 묘사해야 할까......? 그래, 신입 시절, 선배들이 기를 죽인답시고 나와 펜릴을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양 팔을 둘이서 붙잡고, 한명이 우리 둘의 배를 사정없이 후드러 팼었는데, 나고 펜릴이고 맷집 하나는 남부럽지 않은 터라 잘 버티고 있었거든. 그 모습에 약이 잔뜩 올랐던 선배가 내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리쳤단 말이야? 그때 나는 탄산수를 급하게 열어젖히는 것만큼이나 걷잡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꼈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으아아! 괜찮으니까 얼른 화장실 좀 가!”
지금처럼 엄청난 양의 토사물을 생산해냈단 말이지...... 그때도 지금처럼 그저 어안이 벙벙했었다. 지금처럼...... 말이지. 매우 부끄러워야 할 상황이지만, ‘부끄러움’이라는 암초는 나를 들이박았다는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취기’의 적란운 속으로 다시 한 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나는 주인장의 손을 한참동안이나 흔든 뒤에 마침내 자리를 떴다.
“브웨에에에에에......큽! 프하아아아.......브웩.....웩......브에에에에......”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것을...... 나는 변기에 무릎을 기댄채, 그동안 뱃속에 우겨넣었던 음식물들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요?”
“그래라는 거짓말은 못하겠......브흡!”
“그래 그럴 수 있어......그럴 수 있어.”
언제 왔는지, 알샤인이 내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토사물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녀석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이나 됐다고, 얼마 보지도 않은 사람의 등을 토닥여주는 그의 다정함이며, 그리고 그런 이 남자를 의심하는 답답이의 말에 넘어가서 그를 감시했던 내 자신이며....... 생각해보면 정말 못할 짓을 했다는 사실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미명의 그늘 속에 숨어서 말이지. 나는 그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기 위해 토사물을 닦아낸 손을 그의 어께에 걸치며 그에게 격려의 말 한마디를 하려고 했다.
“워 워. 그만해요. 나 그러면 화낼거야.”
“그동안 미안했다. ‘우리’가 공연히 멀쩡한 사람을 의심하려고 했......”
“뭘 의심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걸 고백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그냥......”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
내 손은 그의 어께에 다정하게 포개지고, 나는 ‘미소’라고 명명될 만한 얼굴 표정을 그에게 지어보였다. 술김이니까..... 이정도는 용서 받을 수 있겠지? 간만에 펜릴 만큼이나 든든하게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 같아 정말로 반가웠다.
“하...... 정말 세상 말세네. 아무리 시민의 지팡이라고 경멸받는다지만, 하샤신이 라스알게티의 경시청 요원에게 손도 다 섞으려 들어?”
“.........?”
Channel 2. 아이리스
제 목을 타고 흘러들어간 쓰디 쓴 발효액은 제 위장을 가득 채웠고, 그것들은 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졌던 처음의 순간이 지나가고, 저는 어느새인지 모르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의식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빛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고, 심지어 코가 막혔는지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물론 소리또한 들리는 바가 없었지요.
거대한 흑의 장막 속에서 저는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저는 무의 경계선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아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있지 뭐.’라고 생각하며 대책없이 태평하게 퍼질러져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죠....... 이젠 슬슬 지겨워지더라구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고개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코를 킁킁거려도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어요. 뭐라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손을 이리저리 휘저어보는데, 응? 뭔가가 잡혔습니다. 음..... 이 촉감은...... 천같은데요? 이걸 잡아당기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요?
미지의 천을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어둠이 자취를 감추고 그것이 가리고 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푸른 신록, 따사로운 햇살, 기분 좋은 풀 내음이 한꺼번에 제 앞으로 훅하고 끼쳐왔습니다.
“으윽!”
탄광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구조된 인부들이 그러했듯이, 저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고개를 푹 숙여 제게 끼쳐온 그 자극들을 온몸으로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그렇게 고대하고 그리워했던 것들이 막상 다가오자마자 온몸으로 거부를 하는 이 꼴이 말입니다.
제 자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며 저는 이 자극에 익숙해질 때 까지 그대로 엎어져 있었어요. 아까 무의 경계선에서 부유하고 다닐 때 보다 체감 상으로 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 질 수 있었습니다.
“으...... 여긴......”
“어?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습니다. 작고 가녀린 체구에 하염없이 울고있던 그녀....... 말을 걸자마자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는 둥, ‘더러운 유기물’이 어쩌고 하는 낯뜨거운 소리를 하던 그녀가, 눈이 똥그래져 저를 이상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어......어?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라고? 너는 아직...... 나를 못 봤을 텐데?”
“아직 나를 못 봤다고요?”
또다시 시작된 그녀와의 선문답에 머리털을 뽑히기 전에, 저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지금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때와 비교해서 제일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은 풍경이었어요.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때는, 붉은 하늘 아래,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었지만...... 지금은 붉은 하늘도 보이지 않고, 벌판대신에 울창한 삼림의 한가운데에 있는걸요. 그때 온 누리에는 저와 그녀 단 둘 뿐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주위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어요.
시간에 대해 운운하기를 즐겨하던 그녀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저는 지금...... ‘과거’의 그녀를 만나고 있는 건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