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아차 싶어서 우리는 파전을 먹다 말고 후다닥 내달렸다. 파전집 주인장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리의 등에 대고 ‘나중에 계산 하러 와!’라고 소리치며 배웅해주었다.
“씨발! 씨발! 씨발!”
리겔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먼저 선두로 치고 나섰다. 그의 터질 듯한 등을 보면서,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하기사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도 않았을 터다. 우리는 운터브룩으로 달렸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역한 탄 냄새가 우리의 비강으로 밀려들어왔다.
“으아아아아!”
“얼른 이쪽으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운터브룩의 쓰레기 산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불지옥처럼 불타고 있었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붉은 화마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온 산은 열기로 잔뜩 들떠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빈대 집은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다가 엎어지고 나자빠져버렸다. 사람들은 물 바가지를 들고 진동한동 내달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턱없이 산만했고, 불길은 사람들의 발버둥을 비웃듯이 더 많은 집들을 집어삼켰다.
“아......안 돼!”
답답이는 가늘게 탄식하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리겔은 무릎을 잡고 헉헉거렸다. 나는...... 나 자신을 잃고 믿기지 않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든 붉은빛 도는 살코기를 쏙 빼가버린 것처럼 내 머릿속은 진공상태였다.
“정신들 채려!”
판의 안대를 제일 먼저 집어던져 버린 건 주설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일갈하며 정신을 차릴 것을 촉구했다. 그녀의 추상같은 호령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 잠깐이지만 자신의 행동을 그만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믄 고대로 다 타죽어! 얼렁 줄서서 양동이부터 날러!”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띠를 만들게 하였다. 긴 인간의 띠는 인근의 미테러 울프 스트림까지 이어졌다. 그곳의 하천에서 후미가 양동이에 물을 퍼오면, 그것이 인간 사슬을 타고 화마까지 전달되도록 한 것이었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자기 자리를 찾았고, 양동이는 빠르게 미들 울프의 하천으로 옮겨졌다.
“질 먼저 입구부텀 꺼야 써! 그쪽으로 물을 퍼 날러!”
그녀의 호통에 사람들은 서투르게나마 호흡을 맞춰 물 양동이를 퍼 나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리겔이 선두에 섰다. 우리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양동이의 물을 입구의 불구덩이에 뿌려댔다. 처음으로 날아온 조직적인 공격에 화마는 거칠게 저항했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조금씩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인자 여그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확대하는 거여, 간격을 얼렁 넓혀!”
그녀의 지시에 사람들은 홀린 듯 진형을 부채꼴로 바꿨다. 빡빡하던 대형이 조금 헐거워졌지만, 그만큼 진화의 폭이 넓어졌다. 나와 리겔을 비롯한 운터브룩의 장정들이 화마에 맞서 싸워나갔다. 입구를 베이스캠프로 시작한 우리의 진화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갔다.
“선두는 인자 다음 주자랑 교대허구, 다음 주자가 선두로 가야뎌!”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를 지배했던 공포와 혼란은, 그녀의 카리스마있는 지시에 시나브로 희미해져 갔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어요. 사람들의 조직적인 연대와, 지휘를 맡은 주설씨의 넓은 시야는 화마에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해 나갔고, 어느덧 화마와의 싸움은...... 밀리던 싸움에서 버티는 싸움으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주자 교대혀!”
그녀의 지시에 선두에서 불을 끄던 이들이 후발 주자와 교대를 하러 오고, 우리는 후발주자에게 물 양동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아마 한 번 더 선두를 교대하게 된다면, 제가 선두에 서게 될 것 같아요.
찰랑거리는 물 양동이를 받아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작업이 반복되다보니, 어께며 목이며 어느 곳 하나 얼얼하지 않은 데가 없었고, 손바닥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저는 어금니를 꽉 깨물어 가며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재앙 앞에서 제가 해야 할 건,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그것 말곤 달리 없었거든요.
“허억! 허억! 허억!”
잘난 듯이 이야기 하긴 했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결국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 이윽고 양동이를 들어올릴 힘도 남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안돼요. 지금도 저 불은 쓰레기 산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일어서야.......
“어! 이봐 괜찮아?! 그만 쉬라고. 여긴 우리가 나설테니까.”
“안 돼......요...... 저는 신경.....쓰......지 말고..... 전..... 제가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저를 도우려 드는 사람들의 손을 허위허위 뿌리쳐보았지만, 그 행동으로 몸을 지탱하던 나머지 팔 힘마저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혀버렸습니다. 몸이..... 무거워요. 분명 전 돌바닥 위에 서 있었는데. 그 돌바닥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하하, 이러다가 정말 가라앉는 게 아닌가 싶어요. 으으...... 지독하게 저는 무능한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이겨내기는커녕 그대로 가라앉아서 썩을 날만 기다리는 게 제게 어울리는 결말인 걸까요? 이대로 가라앉기는 싫어요..... 누군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싶은데.....
“그럼 내가 도울게,”
“어.....?”
익숙한 목소리가 땅 속으로 속절없이 가라앉으려 드는 제 몸을 일으켜 세우곤, 입과 코에 무언가를 씌웠어요. 차가운 바람이 쉭하고 제 코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저는......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토.....라?”
“오랜만이야 언니?”
귀신이라도 만난 기분이었어요. 지독한 열기로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제 머리 거죽만큼은 빈데미아트릭스에 가져다 둔 것처럼 서늘했습니다. 그녀의 예쁜 얼굴을 보노라니,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울고 웃던, 그리고...... 그녀와 지독하게 얼굴을 붉혀야 했던 마지막 순간까지 말이죠.
아주 멍청한 처사였습니다. 운터브룩이 ‘하샤신’들의 소굴임을 알면서도 이곳에 태연이 발을 들였다니......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저와 로키군의 목을 가지고 볼링을 치는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어......그...... 그래. 오랜만이네.”
“일단.”
그녀는 제게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긴 불 끄고 하자구.”
Channel 1. 로키
모두가 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진화에 매달린 끝에 간신히 큰 불길을 잡았다. 이제 남은 건 뭐...... 장작 수준의 잉걸불 정도? 그나마 체력이 남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절뚝이며 남은 불씨를 밟아 으스러뜨릴 동안, 그럴 체력도 없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돌아갔다. 살비듬처럼 산에 다닥다닥하게 가옥이 달라붙은 궁색한 마을이었지만, 그나마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니 어디 부터가 집이었고, 어디까지가 나무였는지 구별도 안 가게 홀라당 다 타버렸다. 을씨년스러운 건듯바람이 날린 잿가루 들이 우리 머리위로 부스스 쏟아져 내렸다.
“지옥이 따로 없...... 어? 찾았다!”
“뭐슬?”
“이거......”
나는 주설에게 타다 남은 ‘The Claudia’의 현판을 꺼내보였다. 길쭉한 현판은 일부 불에 그을려 있긴 했지만, 화재가 산을 집어삼키는 규모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멀쩡한 편이다. 이래서 세콰이어 나무로 만들자고 했던 걸까? 주설의 선택이 의도치 않은 선견지명이 된 셈이었다.
“......”
그녀는 내게서 받은 현판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어께가 가늘게 들썩거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리겔을 불러 그녀를 챙기도록 했다. 이 순간만큼은 리겔도 웃음기 쫙 빼고 주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설은 리겔의 어께에 머리를 기대다가...... 녀석의 팔뚝에 머리를 파묻곤 울음을 터뜨렸다.
“여!”
주설이 감정을 추스른 뒤, 현판을 챙겨 일어나려는 차에 누군가가 알은 체를 했다. 설마 싶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
“오랜만이야?”
토라였다. 그녀도 화재 진압에 참여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있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이며, 검댕을 뒤집어쓴 입성이며......아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녀를 아는 어느 누구도 그 형상이 토라였다고 짐작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어색한 만남이었지만, 무시할 능력도, 그리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반갑게 맞이하기엔 영 어색한 얼굴을 만났군 그래.”
“어색하긴 무슨! 평생을 동고동락한 동료를 만났는데 반응이 왜 이래?”
“......”
그녀는 넉살좋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나름 각오를 하고 잡았건만, 그녀의 손에는 싱거울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했더니...... 술집은커녕 술병 하나도 남은게 없을 것 같네.”
“......”
“뭘 그렇게 시무룩해 하냐? 하긴 뭐..... 우리가 헤어질 때 얼굴을 좀 붉혔어야 말이지.”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사실 오빠네 반응이 궁금하던 차였거든. 덕분에 우울할 때 마다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억 하나 남기게 됐어. 아이리스 언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나를 알아봤을 때 그 얼굴은 정말.....”
이야기를 더 했다간, 그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 판인지라, 나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행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도 순순히 화제전환에 따라와 주었다.
“됐고, 지금은 피차 마음 편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정 안부가 궁금하다면, 나중에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
“그래 좋아. 조만간 찾아갈게.”
Channel 2. 아이리스
“아따 저 쌔끈인 뭐시다냐?”
리겔은 멀어지는 토라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하다가, 주설씨에게 호되게 옆구리를 얻어맞고는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평소 같으면 재채기 하듯이 그의 불량스런 언행에 대한 지적을 한 보따리 넘게 쏟아낼 저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우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옛 동료.”
“옛 동료? 그럼 쟈도...... 거시기냐?”
“그렇지.”
“워매...... 잘못 껄덕 거렸음 고대로 시상 하직할 뻔했소잉.”
뜻밖의 정보를 들은 리겔은 진저리 치며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습니다. 하긴 그럴 법 해요. ‘하샤신’의 악명은 대륙 어디를 막론하고 퍼질 대로 퍼져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봉께, 쪼깐 궁금한 것이 있어야?”
“뭐?”
“여그에 니 옛날 동료가 있는거 뻔이 알 것인디, 으째서 한 번을 안 오고 그렸냐?”
“사정이 복잡해. 그닥 명예롭다 할 수 없는 명예퇴직을 했거든.”
“관둠서 얼굴 붉혔다 하믄 되제는...... 뭣헌다고 복잡시럽게 혀쌌냐. 주사장, 다 들었소?”
“.......잉.”
주설씨는 현판을 꼭 안고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녀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부어있었지요.
“거 듣자허니...... 식사 한담서유? 그김에 우덜 좀 소개 해 줄 수 있남유?”
“하샤신을......? 그렇게 친해져서 좋을 건 없을텐데요?”
“괜자나유...... 거 혹시 알어유? 벨 생각 없이 친해졌는디 난중에 쓸모가 있을란지?”
“‘그들’과 친해지려면 우선 너 역시도 쓸모가 있어야 할 거다. ‘그들’은 실용주의자들이니까.”
로키군은 끙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어요. 관절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어 본 뒤에,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잿더미를 툭툭 차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쓸모라...... 있는건 꿈과 야망 뿐인디?”
“그리고 물건이 있잖아. 돈 될 만한.”
“그거야 그럴것이지마는...... 재물은 그짝이 더 많지 않어?”
“좀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정말 녀석들이 네 꿈과 야망을 보고 우리에게 접근하려고 드는 걸지도 모르겠군.”
“뭔 소리여?”
주설씨는 ‘Cloudia'의 간판을 쓰레기 더미로 휙 하고 던져버리곤 로키군에게 바싹 다가갔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지만...... 너무 빠른 태세전환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리겔은 그래도 자신이 힘들여 주운 물건이 저리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것이 씁쓸했는지, 주설씨가 던져놓은 현판을 집어들고 그 것에 잔뜩 낀 그을음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더군요.
“뭐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려운 추측의 영역이지만......”
“엉 그려도 말 혀.”
“그냥 작은 단서만 놓고 본다면, 나와 답..... 아이리스가 이 도시에 발을 들였다는 걸, 그쪽에선 모를 리가 없거든. 게다가 아무리 중앙에서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사고사’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 나와 아이리스에 대한 녀석들의 원한은 제법 크단 말이야. 그리고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있고.”
“근디 뭐?”
“그런 놈들이 우리를 석 달 가까이 가만히 두고 있었다는 건......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랬다기 보단,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거고, 굳이 말하자면....... 나와 아이리스를 지켜봤다기 보단 널 지켜봐왔단 거겠지. 주판알을 굴려가면서 말이야.”
“....... 그 결과가 지금 밥 한 끼 묵자 이건가?”
“작은 단서로 만든 한 편의 소설이야.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사실이지.”
“그려두...... 흥미로운 건 사실이여. 참말이믄......”
Channel 1. 로키
토라가 말했던 ‘조만간’과, 우리가 말했던 ‘조만간’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던 모양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The Cloud'에 도착했더니, 토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늦었네?”
“누가 보면 니가 여기 주인인 줄 알겠네. 어떻게 들어왔어?”
“그거야 뭐......”
토라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쭉 펴낸 클립을 보여주었다.
“기본 소양 아니겠어?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토라라고 합니다. 로키오빠의 직장 동료였어요.”
그녀는 특유의 사교적인 목소리와 태도로 주설과 리겔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객이 바뀐 것이 분명했지만, 그 둘은 얼떨떨해져 악수를 나눌 뿐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특히, 리겔의 경우에는 얻어맞은 강도로 보았을 때, 옆구리의 욱씬거림이 채 가시지 않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토라에게 완전히 얼빠져있었다.
“지는 그..... 리겔이라 허요. 아까츰에 뵌 거 같았는디 이렇게 또 만나게 됬소잉.”
“아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토라는 다시 한 번 사교성을 발휘해 리겔의 손을 맞잡았고, 그것이 그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그는 ‘인자 이 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씻어야겠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주설의 눈총에 그 덩치가 잔뜩 수그러들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을 만나야겠단 생각에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래요.”
“아녀유. 실력 좋다는 거 알았음 됐쥬. 근디 저희가 손님 맞을 채비를 하나두 못해서 그런디 쪼깐 씻어두 되겄어유?”
“아 예, 일 보세요. 저야 뭐 기다리는 건 프로급이거든요.”
주설은 나와 답답이에게 씻을 동안 손님을 접대해줄 것을 부탁하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리겔은 한참동안 그녀 곁에서 서성거리다가, 나와 답답이의 시선을 받고는 미적미적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우리랑 식사를 하겠다는 건 아닐테고...... 용건이 뭐야?”
“.......”
“일단 우리 목을 따러 왔을 리는 없겠지.....? 그것도 혼자서.”
“아닐 거라고 확신하는 건 무리 아닐까?”
토라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너머의 맞은편 건물의 옥상에 그림자 두 개가 어른거렸다.
“오빠랑 얼굴을 붉히게 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나 혼자 왔겠어?”
“이거 고기라도 썰려다가 미간에 바람구멍이 날지도 모르겠구먼.”
“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크로스’까지 했던 사람을 무방비로 만나느니. 화약가루 뒤집어쓰고 담배를 태우는 게 더 안전할 테니까.”
토라는 우리를 보며 싱긋 웃고는 ‘The Cloud’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진열대에 있는 도자기를 보고는 감탄을 했고, 벽에 걸려있는 비단 발을 보고는 경탄을 했다. ‘이런 귀한 걸 발로 쓴다니 직접 확인해보니 정말 거물이잖아?’라는 말을 덧붙여가면서 말이다.
“어.....음.....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들 잘 지내지?”
답답이의 질문에, 이곳저곳을 누비던 그녀의 시선이 딱 멈췄다. 질문 하나에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급변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티나지 않게 조심해가며 알기에바를 발동해두었다. 토라의 얼굴은 분위기만큼이나 어두워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잘 지내지. 일단 내가 이 지부의 장이 되었으니까. 스벤도 곧 있으면 ‘크로스’ 승단 심사를 볼 예정이고, 붙잡혔던 동료들도 잘 구해냈어. 그리고...... 그 녀석도 그럭저럭 잘 지내.”
그 말에 답답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가...... 한숨을 쉬곤 ‘다행이다.’라며 짐짓 밝은 티를 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의 대화는 주설씨와 리겔이 들어오면서 매듭을 짓지 못한 노끈처럼 이리저리 흩날린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만 한 화제도 아닌걸요. 주설씨는 ‘오랫만에 회포좀 풀었어?’라고 묻고는 얼른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젠 저와 로키군의 차례겠지요.
그녀가 우리 없는 사이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그들의 대화에 합류했습니다. 다행인지, 아니면 제가 눈치 없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토라가 주설씨 듣기 거북한 이야긴 한 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주설씨와 리겔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제게 대해주었거든요. 하긴...... 제가 아는 토라는 그럴 위인은 아니까요.
식사동안에는 정말 다양한 대화가 오고갔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화제는 주설씨의 사업 ‘The Cloud'이었습니다. 토라는 그녀가 취급하는 상품에 대해서 물었고, 주설씨는 토라의 질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판오디콘은 어떻게 공략한건가?”
로키군의 질문에 토라는 살짝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가...... 이내 표정을 고쳐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대답을 해주었어요.
“따지고 보면, 그쪽 도움이 컸어. PBRC와, 이에 반기를 드는 ‘The Cloud'의 대결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거기에 쏠려있었거든. 기사단들도 잔뜩 긴장을 하며 그쪽을 주시하느라 판오디콘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더라구. 뭐 그덕분에 판오디콘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지. 그래도 나름 조용하게 작업을 한 거야. 괜히 이슈가 이쪽으로 쏠려버리면 곤란해지니까.”
“그런거 치곤 기사단 쪽에선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던데? 왕도가 발칵 뒤집어 지고도 남을 이슈인데.”
“에이 아니지. 안 그래도 PBRC 때문에 욕을 몇 바가지로 뒤집어쓰고 있는데? 일단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 시키고 은밀하게 우리 뒤를 캐려고 할걸? 하지만 우리가 거북이도 아니고, 갑옷 칭칭 두른 그 느림보들에게 잡힐 리가 없지. 모르긴 몰라도 언론사로 보도통제 지침 보내고 난리도 아니었을 거야.”
토라의 말을 듣노라니, 로키군과 리겔이 암시장을 다녀오고 나서 전했던 그 충격적인 소식이, 왜 신문의 구석에도 보이지 않는가 했던 의문에 충분히 대답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대단한 포부에요. 처음엔 백화점을 지으려고 했다는 거죠?”
“뭐...... 포부는 대단허다 혀도...... 결과는 영 황이었는디유 뭘.”
“그래도 대단한거죠. 스테반 로스차일드의 명함도 받았다면서요.”
“에 뭐 그거야.......”
주설씨는 계면쩍은 듯 웃었지만, 토라는 그 이야기를 그만 둘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쯤되니 저도 그녀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어요. 토라는 ‘The Cloud’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거였어요. 생각해보니 의문이 들긴 합니다. 사업가라지만 이곳에 발을 디딘지 얼마 안 되는 뜨내기에게 손을 내미는 걸까요? 이곳엔 그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업을 굴리는 사업가들이 수두룩뻑쩍한데 말이에요. 신선함과 패기에 끌렸다고 하기엔, 그들은 ‘실용주의자’들입니다.
라스알게티 지부의 새로운 지도자는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걸까요?
“솔직히 테마파크를 짓는다고 했을 때, 무릎을 쳤어요.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는 명분과, 거기에서 돈을 벌어들인다는 실리까지 죄다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뭐...... 지금은 잿더미가 됐쥬.......그려두 좋은 날은 있지 않겄어유?.”
“시련 속에 있지만 절망하지 아니하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한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비록 음지에 몸을 담고 있지만, 실은 시선을 항샹 양지에 두고 살아오고 있었어요. 하지만 양지를 지켜 볼 때면...... 음지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곤 했어요. 강자가 약자를 먹이로 삼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고, 노력은 출신 앞에 가로막히는 것을 보면서...... ‘저곳에 과연 희망은 있을까?’라고 동정해온 게 사실이에요.”
“그러긴 허네유. 아무래도 한 발짝 떨어진디서 봐 왔을 테니......”
“그런데 주설씨의 행보를 지켜보고, 이렇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다 보니, ‘그래도 조금은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이구, 어질어질 허네유. 지가 뭐라고 너무 띄워 주시는거 아녀유?”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봐 왔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전 주설씨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바꿀 의지와 그걸 실현시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서 능력 부분은....... 약간 부족한 감이 있긴 하지만.”
“......칭찬허는 거 맞쥬?”
“그럼요. 그리고 전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기왕이면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꿔 나가기를 응원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세상이 워낙 녹록치 않으니......”
토라는 두 손에 깍지를 낀 채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습니다. 그 바람에 주설씨의 얼굴과 토라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어요.
“우리가 ‘The Cloud’에 힘이 되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요?”
Channel 1. 로키
토라의 제안에 나 뿐만 아니라, 답답이까지 펄쩍 뛰었다. 대충 그녀가 주설에게 접근하려는 의도는 진작에 간파했지만, 지금 그 말은 ‘The Cloud'와 ’하샤신‘이 손을 잡자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그런 명분이 뭐......?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꿔나가자고? 아니 지금 여기 경력자가 떡 버티고 앉아있는데 그런 헛소리를 한다고?
“물론 그냥 일방적으로 돕겠다는 건 아니에요.”
토라는 우리를 흘끗 본 뒤에 다시 시선을 주설에게로 돌렸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런 순수한 선의가 타인들의 신뢰를 얻기에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악행들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까요.”
“믿음을 주기 위해 뭔가를 얻어 가겄다...... 이건가유?”
“그렇죠. 주요한 목적은 전자에 있지만요.”
주설은 머리가 아파왔는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업이 좌초될 위기 순간에 찾아온 뜻밖의 제안이 그녀로 하여금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누가 봐도 독이 잔뜩 들어간 성배같이 보이는 판에, 허겁지겁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정을 쉽게 하려면 정보를 제공해야겠죠? 오늘은 정보만 제공해 드릴테니, 제가 가고 난 뒤에 찬찬이 생각해 보시길 바래요.”
“좋아유. 들어 봅시다.”
토라는 주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조직의 존속을 위해 왕도를 비롯한 각 도시의 지배계층과 가져온 유착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던진 말들을 조합해보면, ‘그들’의 메인 파트너는 ‘로스차일드’였다. 물론 거기까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그 말을 듣는 내내 안절부절 못했는데, 혹시나 그녀의 입에서 ‘얼마 전에 죽은 이스트민스터 수녀원의 원장수녀 있죠? 그것도 로스차일드와 우리 작품이에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물론 토라도 답답이와 원장수녀의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그러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있었으나...... 사람일은 또 모르니까.
주설은 물론이고 리겔과 답답이도 그녀의 말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대부분의 정보가 나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대충 흘려들었지만, 토라는 내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는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이젠 자체적인 무력을 마련하려고 하더군요.”
“자체적인......무력? 대륙엔 기사단이 있잖아유? 갸덜이 그런 자기들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인디......”
“그들이 가지려고 하는 무력은 기사단을 겨냥한게 아니에요. 기사단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무력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즐겨 사용한 음지의 수단이었죠.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스차일드는 요즘 들어 ‘우리’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듯 해요. 그렇게 해서 뭘 얻으려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불편한 이슈인건 확실하죠.”
“잠재적인 적이 될 수도 있다......”
“한편이라면 최고의 파트너도, 척을 지면 최악의 상대가 될지니...... 큰일 나기 전에 자구책을 마련해야겠죠?”
“좋아유...... 뭐 대충 사정은 알아 묵겄어유. 일이 잘 돼서 우덜과 파트너십을 맺었다고 쳐보자구유. 그렇게 허면, 댁덜은 우덜에게 뭘 해 줄 수 있는거에유?”
“유통망......”
“잉?”
“그리고 신변의 안전이죠.”
Channel 2. 아이리스
토라씨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몇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첫째로는 ‘하샤신’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권력과의 유착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는 그들만의 리그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이 ‘The Cloud’를 생각보다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권력의 유착은 뭐 어제 오늘 일은 아니라고들 하지만...... 솔직히 충격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설쳐대고도 여지껏 존속할 수 있는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운동장이 이만저만 기운게 아니잖아요. 토라는 양지를 바라보면서 ‘저들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말하지만, 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몰래 웃음을 지은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런 부조리함이 그들을 존속시켜온 핵심 원동력이었던 거잖아요. ‘우리 의도대로 서로 미워하고 짓밟는 구나 멍청한 우민들’이라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하지만 악법도 법이라고, 그러한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시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해 오고 있었어요. 그 악법에 의해 운동장이 잔뜩 기울어졌지만, 잡초는 뿌리만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기울어졌다는 건 그닥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금이 간다는 것은...... 이젠 그 운동장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질서가 깨어진다면...... 아마 엄청난 혼란이 시민들의 삶의 기반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겠죠.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이 부조리한 도시에서 발 디디고 살고 있다는 것 밖에 없을진대, 피해를 감내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기반마저도 산산이 부서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될까요? 그리고 그 희생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걸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라는 우리가 이곳에 온 뒤로 행적을 지켜봐왔다고 말했다지만......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The Cloud’를 지켜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토라는 주설씨가 사업을 하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그녀의 사상을 철저하게 간파하고 있었거든요. 그건 하루 이틀 지켜봐선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름 오랫동안 그녀를 봐왔다고 자부하는 저 조차도 그녀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제가 만약 그녀의 생각을 이해했더라면, 그녀가 ‘The Cloudia’를 지어보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놀라지 않았을 거에요. ‘서생의 눈으로 세상의 문제를 짚어내고, 상인의 눈으로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그것의 일환이 바로 'The Cloudia'이었을 거에요. 그걸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한 저에 비한다면, 토라는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생각을 술술 읽어냈어요.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파트너를 물색해왔을 것이고......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꽉 막힌데는 없는 그녀는 최고의 파트너라고 결정내렸겠죠.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뜨내기까지 찬찬이 지켜보는 그들의 정보력은 생각하면 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어요. 하긴...... 그러니까, 제게 토라가 술주정을 부리면서 저에 대한 정보를 줄줄 읊어내릴 수 있었던 거겠죠.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대륙의 중심’을 자처하는 우리 라스알게티인들이 사실은...... ‘하샤신’들에게 사육당하는 새장 속의 새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