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3)

슬러 작성일 05.06.23 08: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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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줄리는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고 미슬라 부인의 뒤를 따랐다. 돔형의 높은 천장에 아치형의 창이 있는 복도는 끝없이 연이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길었다. 이윽고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티크 목재의 문 앞에서 부인이 발을 멈추었을 때, 줄리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기가 당신 방입니다.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고맙습니다.」
「몹시 고단하신 모양이에요. 목욕 준비도 해놓았으니까, 더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잠시 누워서 쉬세요.」
「네, 긴 여행 끝이라서.」
「그럴 테죠. 식사 시간 따윈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기운이 날 때까지 푹 주무세요. 다 자고 나서는 침대 옆에 있는 벨을 눌러 줘요. 바로 식사를 보내 드릴 테니까.」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줄리.」
부인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은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일에 대해서는 웨스로부터 들었어요.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도와드릴께요. 사양 말고 뭐든지 말하세요. 저도 젊었을 때는 간디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싸운다는 그의 생각에 말예요. 테러리스트가 쓰는 방법보다는 간디의 방법이 정치를 바꾸는 데에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그 동란의 시대에서는 간디의 방법이 성공할 수가 없었지만 저는 지금도 그것을 신봉하고 있어요. 밝은 미래를 구축하는 것은 역시 비폭력주의예요.」
「찬성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줄리는 부인의 말에 감동하고 있었다.
「당신 같은 분이 와주셔서 나도 매우 기뻐요.」
부인도 고상하게 대답했다. 방에 혼자 남게 된 줄리는 오늘 아침에 생겼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미슬라 왕자에게 준 나의 첫인상은 결코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오해를 당하기 전에 여기에 온 진짜 이유를 이야기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오늘 아침의 일을 냉정히 생각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왕자의 팔에 안겼을 때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늠름한 팔의 감촉이 너무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피곤해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줄리는 가냘프게 신음소리를 냈다.
이거야 정말 웃기는 일이잖아!
줄리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처음이 중요한 건데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는지 생각할 수록 기가 찼다.
미슬라 왕자를 만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그렇게까지 충고하던 하딩 편집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이 이 모양으로 빗나가 버려 왕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없게 되었다.
줄리는 풀이 죽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기운을 차리기로 마음먹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본다.
그래, 이제 와서 끙끙 앓아도 별 도리가 없는 거야. 욕탕에 들어가 기분전환이라도 해야지...
줄리는 욕실 문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걸어갔다. 침실은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맨발에 닿는 캐시미어 융단의 감촉은 기분이 좋았다. 넓은 방의 벽은 옅은 장미빛 실크로 덮여 있고, 커튼은 좀더 짙은 빛이 도는 장미빛이었다.
활짝 열린 프랑스 식 창 밖으로는 넓은 발코니가 달려 있고, 정원에는 갖가지 꽃이 아름다움을 겨루듯 피어 있다. 발코니의 바로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고, 그 가지가 침실 쪽으로 드리워져 있다.
머리가 돌아도 전혀 이상하다고 할 수 없겠군.
욕실 문을 연 줄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저것 모두가 마치 동화의 세계 같으니까.
단 한 가지 그렇지 않은 것은 왕자의 불쾌하고 냉랭한 태도다. 줄리는 구겨진 드레스를 기세 좋게 벗어던지고 욕조에 들어갔다.
서재에서 추태를 보였을 때는 한시 바삐 이 궁전을 벗어나 호텔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이렇게 조가비 모양의 대리석 욕조에서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뜨거운 물에 느긋하게 잠겨 있자니, 그때 서둘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가 아무리 매스컴 혐오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나는 여기에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취재하기에는 여기가 제일 좋은 곳이니까. 가령, 왕자의 말을 직접 듣지 못한다고 해도 이곳을 찾아오는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과 인터뷰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대신문사라면, 특파원이 일하기 매우 힘든 인도에 지국을 설치하고 있다. 보통 해외의 임기는 3년이지만 인도 지국의 근무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2년이 일반적이다. 그 주된 이유는 인도 정부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얻어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 인도에서 취재활동을 하려면, 설사 개인적인 감정을 도외시한다고 할지라도 몸에 닥치는 여러 가지 제약을 계속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소문 나 있었다.
줄리는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더운 물을 튀기면서 거품이 표면을 미끄러져 가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저 미슬라 왕자의 태도가 어쩌면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한 언행은 그 사람의 독특한 버릇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린아이 때부터 매스컴에 쫓기며 지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설득해 보이겠다.
줄리는 자신이 되살아났다.
그 정도로 사업을 성공시킨 사람이라면, 국제 테러리스트 집단의 테러 행위를 하나하나 조사해 왔고, 비밀의 행동강령을 파악해낸 나의 노력을 틀림없이 평가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피가 통하는 인간이라면, 그러한 잔혹한 살인행위가 폭로되고 그들이 체포되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환영해 줄 것이다.
나른하면서도 썩 좋은 기분이어서 줄리는 수트케이스를 열어 네글리제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젖은 몸을 커다란 목욕 타월로 닦고 나서 그대로 침대로 갔다.
휘장이 둘린 침대는 호화스러운 침실 장식 중에서도 특별히 화사했다. 하얀 시트의 산뜻하고 차가운 감촉이 줄리의 따뜻한 피부를 자극했고, 그녀는 손가락 끝에서 발끝까지 힘껏 몸을 폈다. 빳빳하게 풀먹인 시트가 맨몸의 민감한 가슴을 스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줄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베개를 고쳐 놓고 가만히 머리를 얹었다. 드리워진 커튼 저쪽에서는 아직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었으나 줄리는 곧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긴 여행과 12시간의 시차가 그녀로부터 잠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빼앗는 모양이다. 아무튼 고향인 뉴욕은 지금 한밤중일 테니까.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푹 잤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조금 열린 문틈으로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귀여운 여자아이가 부끄러운 듯이 이쪽을 보고 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담. 저는 스칸다라라고 합니다.」
어린 하녀는 수줍어하며 말했다. 몸집이 작은 갈색 머리 소녀는 남부지방 출신인 듯 동양적이고 얌전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하녀는 욕조의 마개를 뽑고 나서 방을 나갔다. 줄리는 문이 닫히자 곧 침대에서 내려와 세수를 했다.
그리고 나서 수트케이스를 열어 낙낙한 선드레스를 꺼냈다. 몇 겹으로 된 흰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수트케이스를 닫으려고 했을 때, 꾸깃꾸깃 구겨진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집어들어 구김살을 펴고 나서 침대 위에 펼쳤다.
제1면 맨 위에는 굵은 고딕체로 라고 인쇄되어 있고, 그 밑에 좀 작은 활자로 회사의 방침이 씌어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뉴스를 전해 주는 클리어...
3주일 전의 날짜였다. 톱뉴스를 게재하는 오른쪽 상단에는 커다란 석조건물의 잔해를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남은 벽은 좌우가 파괴되어, 주위에는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폐허에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제복 경관이 몇 명 보인다. 사진의 안쪽에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시체들이 천으로 덮인 채 줄지어 있었는데 그 아래 실려 있는 서명기사는 줄리가 쓴 글이었다.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던 줄리의 뇌리에 현장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장소는 로마, 건물은 철도 역. 하루 중 제일 혼잡한 시간을 노리고 폭탄을 던진 것이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공포에 질려 목이 바싹 말랐었다.
이 사진의 배후에 있는 진실에, 언제까지 가슴이 아파야 하는 것일까? 테러리스트의 지도자가 체포될 때까지? 영원히 그런 날은 오지 않는 것일까? 이탈리아의 한 호텔 방에서 뉴욕의 오피스와 통화할 때 잡음 때문에 소리소리 지르던 일을 줄리는 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극좌 과격파는 오늘 로마의 철도역에 4발의 폭탄을 투척하여 시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폭발은 하루중 가장 통행객이 많은 러시아워를 노려 감행되었고, 적어도 75명의 사망자와 111명의 중경상자를 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과격한 극좌 그룹인 은 이 범행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자신이 쓴 기사가 신문의 일면을 장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지만 줄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한 찰나에 생명을 잃은 사망자의 모습이 되살아나서 줄리를 괴롭힌다. 그녀는 다시 신문을 흘끔 보았다.
3주일 전 로마에서 이렇게 잔혹한 짓을 저지른 무리들이 지금 인도에 와 있는 것일까? 국제 테러리스트 그룹은 이러한 대성공을 거둔 그룹을 세계 곳곳에 보낸다고 한다.
이 팀이 다음 목표를 아시아로 삼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요즈음 새로운 음모를 계획하고 있음도 틀림없다. 그런 음모를 근본적으로 저지할 수는 없을까? 철저하게 수사하여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해내고, 그들로부터 모든 비밀을 자백받을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할 일은 아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면적이고 행정적인 정보망보다는 앞일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정확한, 그리고 열심히 연구하는 저널리스트 쪽이, 파괴 분자들의 이론을 효과적으로 논파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는 혼자 싱긋 웃었다. 무엇 때문에 저널리스트는 자신들이 일반 대중의 파수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몰라...
줄리도 때로는 일에 너무 깊이 빠져든다고 동료들에게 놀림과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중동에서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프렛 글레인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 줄리? 사건의 관계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애정을 품거나 증오를 가지면 좋은 기사를 쓸 수가 없어. 나를 보라구. 난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죄다 이 눈으로 보고 왔어. 그러나 난 일일이 그것에 감동하거나 나 자신이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아. 당신이 이해하기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러나 줄리는 자기 인생을 일과 사생활, 그렇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일은 이미 그녀의 인생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에디가 죽고 나서는...
줄리는 갑자기 답답한 기분이 들어 프랑스 식 창 앞에 난 발코니로 나갔다. 서늘한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헐렁한 선드레스 자락을 다리에 휘감았다. 큰 나무 그늘에 가려 있는 탓인지 발코니의 대리석은 싸늘했다.
줄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깨끗이 깎인 잔디가 촘촘히 짜여진 융단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고 정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 뒤쪽으로 멀리 무엇인가가 빤짝 빛났다. 문기둥 위의 호랑이였다. 내 생활의 사적인 부분은 정말로 에디가 죽었을 때 끝나 버리고 만 것일까?
줄리는 발코니 쪽으로 뻗어 있는 큰 나뭇가지에서 흰 꽃을 하나 땄다.
에디는 나를 사랑해 주었고, 나에게는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일 일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내가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어머니는 줄리가 12살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게다가 줄리는 아버지를 모른다. 광산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다음 해, 일년 내내 눈이 사라지지 않는 알래스카의 황야에 소형 비행기와 함께 추락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철이 들고 나서 최초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가 색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며 탄식하고 슬퍼하던 모습이었다. 줄리는 이미 어려서부터 죽음이 가져오는 고독과 비탄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여동생 애그니스 이모가 줄리를 맡아 길렀다. 애그니스는 고아가 된 조카를 기르는 데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녀는 결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조심스럽고 현실적인 여성이었으며, 억지로 조카의 마음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애그니스에게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에게도 자기의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는 고통 이외의 기억이 없는 십대 시절을 될 수 있으면 웃어넘기려고 애써 왔다. 이모로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타인이 굴러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모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줄리에게만 차갑게 대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태도를 취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줄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졌다는 감상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이모의 차가운 태도는 자기가 거절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일념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따라서 줄리는 선생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의 우수한 성적이었으므로, 그것을 기회로 줄리는 이모댁을 나올 수 있었다. 기숙사 생활은 규칙 투성이였고, 방도 좁아 답답했지만 거기에는 자기 자신이 주인인 성이 있었다. 아예 전혀 모르는 타인들 속에 끼는 것이 친척 속에 있는 것보다 한결 소외감이 덜했다.
그러던 줄리가 에디 브라이스와 만난 것은 콜로라도 주립대학을 졸업하기 반년을 남겨 둔 때였다. 그는 영화 로케이션 때문에 대학에 와 있었다. 캠퍼스 근처에서 자동차 추적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떼를 지어 촬영 현장으로 구경을 나갔는데 줄리는 대학신문의 기자로서 스턴트맨인 에디와 인터뷰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사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그때부터 새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동안 그는 줄리의 아버지이기도 했고, 오빠이기도 했으며, 애인이었고, 어느 때는 어머니이기조차 했던 것이다.
어려서 양친을 잃은 마음의 빈 공간을 그는 기꺼이 메워 주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자동차 사고로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마치 그녀의 인생은 피비린내 나는 심홍색 실로 엮은 태피스트리 같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마음의 공동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는 사이 줄리는 두번 다시는 상처 입기가 두려워 자신의 마음을 단단한 조가비처럼 닫아 버린 것이다. 에디가 죽은 뒤로부터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녀는 캘리포니아를 떠날 결심을 했다.
마침 뉴욕의 신문사에 취직이 결정되자 침식을 잊고 일에 매달렸다. 모든 에너지를 저널리즘에 바쳤던 것이다. 사실 마음을 쏟을 곳은 일밖에 없었으니까. 줄리는 손에 든 꽃냄새를 맡으면서 편집장이 하던 말을 되새겼다.
「당신은 자신의 눈으로 제대로 뉴스를 찾아내서 자신의 머리로 기사를 쓰고 있어. 균형 잡힌 매우 훌륭한 기자야.」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웨스 하딩의 최고의 찬사였다.
길 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리자 붉은 차체가 나무 숲 저쪽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미슬라 왕자의 스포츠카가 궁전의 정면 현관에 멈추더니 운전석의 문이 기세 좋게 열렸다. 차에서 나온 왕자는 넓은 대리석 계단에 발을 걸치다가 줄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돌아본다.
그러나 발코니에 서 있는 줄리를 보고도 그는 손을 들거나 흔들지 않았다. 서재에서 그가 했던 신랄한 말을 줄리는 잊을 수가 없다. 왕자는 그대로 등을 돌렸고, 그의 모습은 궁전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줄리는 고개를 숙이고 손안에서 구겨진 꽃잎을 쳐다보았다.
정말 얄미운 사람이야! 난 당신이 뿌리고 다니는 염문 따위나 쓰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구요. 취재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일부러 실신했다고? 아무리 당신이 핸섬하다고 해도 난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는 그런 여자는 아니라구요.
그런 생각을 하는 마음 한 구석에 공항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 넓은 가슴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던 기분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줄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웃으면서 구겨진 흰 꽃잎을 정원으로 뿌렸다. 줄리가 방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침실의 문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났다. 줄리가 대답을 하자 검은 머리를 한 호리호리한 여성이 들어왔다.
몸 움직임 하나하나가 대단히 우아하고 고상했다. 그녀는 침대가 놓인 방과 거실의 중간에 멈추더니 부끄러운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처음 뵙겠어요, 미스 코넬, 저는... 이 집 딸인 프리야예요. 혼자서 드시는 식사가 쓸쓸하실까봐 왔어요.」
「어머, 친절도 하셔라! 앉으세요.」
공주는 줄리를 향해서 앉았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는 지성과 동정심이 깃들어 있었다. 깨끗한 느낌을 주는 피부, 귀족적인 용모를 가진 이 고전적인 미녀는 인도 아리안 인의 후손이라고 줄리는 생각했다.
「훌륭한 사리(인도에서 주로 힌두교도의 여성이 입는 의복)로군요.」
줄리는 눈을 빤짝였다.
공주가 몸에 걸친 사리는 핑크 빛과 금빛이 미묘하게 얽혀 있고, 광택 나는 실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마음에 드세요?」
프리야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는 미슬라 부인의 목소리와 너무나 흡사했다.
「비단벌레빛 실크라고 해요. 두 가지 색깔의 실로 짜놓은 거지만 광선의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빛깔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답니다.」
프리야는 몇 개의 반짝이는 팔찌를 낀 손으로 사리의 주름을 매만졌다.
「마음에 드신다면 한 벌 드릴께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어떻게 입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걸요.」
줄리는 당황해하면서 사양했다.
「그런 거라면 가르쳐 드릴께요.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 거라고 하던데... 함께 쇼핑하러 가요. 제가 예쁜 걸 골라 선사할 테니까요.」
그녀는 공들여 땋은 무겁게 보이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제치고는 우아하게 의자에 기댄 채, 줄리를 환영하는 계획을 기쁜 듯이 들려주었다. 줄리에게는 눈앞에 있는 미녀가 왕자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두 사람 다 빼어난 용모와 자태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온순하고 점잖은 데에 비하면 왕자는 몹시 폭군적인 데가 있다.
아마도 미슬라 부인은 꽤 나이가 들고나서 프리야를 낳은 모양인지 오누이의 나이 터울이 상당히 벌어져 있다. 그런 줄리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는지 프리야가 물었다.
「오빠는 만나보셨나요?」
「네.」
줄리는 감정을 나타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대답했다.
프리야의 말투로 보아 오빠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프리야가 격정에 휩쓸린 듯 외쳤다.
「전, 절대로 오빠를 용서할 수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
「왜 그러시죠?」
줄리는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에 놀랐다.
그리고 프리야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결혼 얘기예요.」
프리야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의 결혼 말인가요?」
「아니... 저의...」
「어머, 그러세요?」
줄리는 내심 안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왕자가 결혼하든 안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그 사람 정도라면 아내를 12명을 데리고 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라구.
「어머니 말씀으로는 공주님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그래요. 그러나 약혼자는 있어요.」
「그렇다면 무슨 일인데요, 프리야 공주님. 저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공주가 어리고, 터놓고 속마음을 밝힐 상대가 없는 것같이 보여 그런지 줄리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줄리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의 힘이 돼주고 싶었다. 공주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궁전이라는 온실에서 자란 탓일 것이다.
그녀의 번민하는 말소리에 줄리는 마음이 흔들렸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를, 줄리는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다.
「결혼하고 싶지 않은가요?」
「아뇨. 결혼은 금방이라도 하고 싶지만.」
프리야의 두 볼이 홍조를 띤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이 아니겠어요? 특히 인도의 여성들은. 스위스의 학교에 있을 때 보니 그쪽 친구들 중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인도 여성의 행복은 결혼이라고 모두 생각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공주님은 결혼을 바라시고, 약혼자도 계신데...」
줄리는 입을 다물었다. 왜 프리야가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혼자가 훌륭한 분이란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공주는 힘주어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오빠가 제게는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했어요.」
「정략결혼인가요?」
「그래요! 오빠는 모든 걸 혼자 결정해 놓고, 제게 얘기한 것은 불과 3일 전이었어요.」
「아직 그런 관습이 남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줄리는 중얼거렸다. 독신 남녀가 자유롭게 데이트 상대를 찾으러 싱글 바에 가는 뉴욕의 줄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 테지요.」
프리야가 말했다.
「그렇지만 인도에서는 아직도 결혼은 부모의 결정에 따르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유서 깊은 집안에서는 양쪽 부모끼리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죠. 적령기의 남녀가 어느 집안에 있는지 잘 알아뒀다가, 이 사람과 이 사람, 저 사람과 저 사람, 이런 식으로 맞추어 나가는 거죠. 게다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태어나자마자 약혼하는 경우까지도 있다구요.」
「한 쌍이 될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어떻게 알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결혼이란 개인과 개인이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이 결합하는 거랍니다.」
프리야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여자는 남편의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해요. 그러니까 양쪽 집안의 가문이나 형편이 비슷하고, 어른들끼리 마음이 맞아야 돼요. 신부와 신랑이 결혼식장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일쯤은 흔히 있는 일이죠.」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는 전혀 선택권이란 없는 건가요?」
「그래서 제가 화내고 있는 거예요. 신랑에게는 그런 권리가 있어요. 가문이 좋거나 부유한 경우에는 특히 그렇죠. 그런데 여성 쪽에서는 전혀 선택의 권리가 없어요. 신부는 남편의 집으로 보내는 선물에 불과해요. 평생 풍요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줄 만한 집에 대한 선물 말이에요.」
공주의 커다란 눈에 분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제 경우에는 보시다시피 지참금은 많아요. 지참금 제도는 지금은 법률로 금하고 있지만 관습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모두 지금도 지참금을 가져간답니다. 제가 지참금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은 오빠도 알고 계시니까, 부유한 사람과 결혼할 필요는 없는 거죠. 이런 경우에는 저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보통인데...」
프리야는 오빠의 처사에 화를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주님, 어머니하고 의논하시지 않으세요? 어머니도 같은 여성이니까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요? 결혼에 대해서는 오빠보다 어머니께 더 영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프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은스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줄리는 불현듯 그녀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미모, 지성, 부를 겸비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결혼을 할 수 없다니...
잠시 후 프리야는 입을 열었다.
「인도에선 그 집안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남성이 모든 결정권을 갖는답니다. 아버지가 돌아하신 뒤, 자이 오빠가 가장이 되었죠. 저를 제대로 시집 보내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오빠는 생각하고 있어요. 인도에서는 여성은 첫째로 아버지에게, 그리고 다음은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의지하고 따르도록 가르침을 받죠. 그러니까 제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어머니는 오빠에게 거역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어머니와는 달라요. 저는 그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선택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 싫어요! 자기 마음대로 하다니! 저도 미슬라의 피를 이어받고 있어요! ... 미안해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프리야는 흥분한 채 방을 뛰쳐나갔다.
그녀를 혼자 있게 놔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줄리는 뒤쫓아가지 않고 식사를 끝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리야가 집안끼리의 결혼이라는 제도는 솔직히 받아들이면서도, 다만 자신의 경우에는 싫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달리 좋아하는 남성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럴 리는 없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란 그녀에게 그런 상대가 생길 기회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선 왕자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지 않을까? 그렇지만 왕자가 결코 허락하지 않는 상대라면... 아, 가엾은 프리야!
줄리는 왕자의 노여움보다 무서운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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