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4)

슬러 작성일 05.06.23 08: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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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를 끝낸 줄리는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짐꾸러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큰 수트케이스 속에 하얀 끈장식이 달린 네이비블루의 소매없는 원피스가 있었다. 꺼내서 높이 쳐들어 보았다.
이만하면 구겨지지도 않았고 지금이라도 가격표를 붙여 가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어.
줄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해 보이는 그 원피스로 갈아입고, 악센트로 붉고 폭이 넓은 벨트를 맸다. 바깥의 무더위를 생각하면 도저히 스타킹을 신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햇볕에 잘 그을렸기 때문에 맨다리라도 흉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맨발에 드레스와 같은 색조의 굽이 낮은 샌들을 신고 화장대 앞에 서서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았다.
정말 멋져, 줄리!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며, 수첩을 한 손에 들고 방을 나섰다.
미슬라 부인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하녀 스칸다라가 다가왔다.
「마담, 왕자님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달리 약속이 없으시면 곧 사무실로 와주시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하죠.」
줄리는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일의 초장에는 왕자 이외의 사람과 상대하고 싶었다. 과연 매스컴 혐오자인 미슬라 왕자와 인터뷰가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러시다면, 사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줄리가 정교하게 만든 놋쇠 문고리를 쥐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무거운 떡갈나무 문짝을 끌어당기자, 널찍한 방이 눈 앞에 펼쳐졌다. 벽의 전체 면이 커다란 아치형의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그 너머 정원에는 장미가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천장의 중앙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호화스런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고, 떡갈나무 대들보와 창틀에는 조각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을 다해 새겼을 법한 무늬가 있었다. 쪽매붙임으로 만든 마루 바닥에는 침실과 마찬가지로 수직 융단이 깔려 있고, 거무스름한 적갈색 바탕에 선명한 터키블루와 진한 보라색이 강렬한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이 호화스런 방은 왕자가 사무를 보는 방이었다. 커다란 판넬에는 지도와 빌딩의 설계도가 몇 장씩 붙어 있었고, 옆의 비서실에서는 바쁘게 움직이는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들려왔으며 텔렉스 소리도 쉴새없이 들렸다.
왕자는 방의 한가운데에 있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줄리가 들어온 것을 알고는 서류에서 눈을 뗐다.
「그럼 여기까지만 하지, 해리.」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서는 일어나서 방에서 나갔다.
「앉으시오, 미스 코넬.」
왕자는 앞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줄리는 자신에게 쏠리고 있는 강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 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우선, 당신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저는 뉴욕의 신문사, 의 특파원입니다. 해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심층취재해서 보도하는 것이 저의 임무예요. 특히 국경을 초월해서 동시에 일어나는 국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목적이란 게 뭐요?」
왕자는 즉각 되물었으나 내용에 흥미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줄리는 그의 비판적인 눈을 의식해서인지 몸이 굳어 있었다.
이 사람은 이전에 저널리스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상류계급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언제나 매스컴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매스컴 혐오자가 된 것일까?
「테러리즘에 대한 취재입니다.」
줄리는 짧게 대답하고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눈이 날카로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테러리즘의 취재라... 그러나 어떻게 그들의 동향을 파악했소? 그들은 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할 텐데.」
「우리 신문사에는 스트링어(비상근 통신원)가 있어요.」
줄리는 왕자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하여 마음이 놓였다.
「스트링어는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우리 신문사의 일을 돕고 있는 거지요. 그 곳에서 사건이 생기면 그들이 즉각 신문사로 알려 오는데, 그것을 기사화할 것인지 아닌지 그 판단은 신문사에서 결정합니다. 스트링어로서 오랫동안 신문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왕자는 그 다음 말을 재촉했다.
「봄베이에 우리 스트링어가 있습니다. 신문은 인도 주재 특파원을 두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경비가 엄청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도의 뉴스는 통신사와 스트링어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봄베이에 있는 스트링어가 테러리스트에 관한 정보를 보내주었다는 얘기요?」
「말씀대로예요. 국제적 규모의 테러리스트 지도자 회의가 가까운 시일 안에 북인도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아마 뉴델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스트링어는 지난 몇 년 동안 특종 뉴스를 보내온 베테랑입니다. 아마도 확실한 뉴스소스를 화보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우린 그 사람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보내온 정보를 살펴보면 다른 스트링어보다는 훨씬 정확했으니까요. 다만 이번 정보는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의 정보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게다가 이것은 매우 복잡하게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편집장은 본사의 사람을 현지에 보내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 판단은 옳은 것 같군.」
왕자는 변함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줄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서서히 이야기에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당신이 맡게 됐소?」
「지난 몇 개월 동안, 제가 계속 테러리스트 문제를 혼자서 취재해 왔기 때문이죠.」
줄리는 가슴을 폈다.
「어떤 사건이 있었소?」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최근에 테러사건이 있었고, 바로 3주 전에는 로마에서 있었어요.」
왕자는 눈을 감았다.
「아, 그거로군. 철도역이 폭파된...」
「그렇습니다.」
줄리는 그때의 일을 생각했다.
중상자의 고통스런 표정과 신음소리, 목숨을 잃은 이름도 없는 사람들의 소리없는 절규...
줄리는 눈을 꼭 감았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겠는데?」
왕자의 목소리에는 쌀쌀함이 사라지고, 이제는 오히려 호의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글쎄요, 유쾌하지 않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요. 지옥의 수라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엄청난 일이었어요.」
줄리는 눈을 크게 떴다.
왕자는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줄리는 장미꽃밭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그의 커다란 등을 보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사람이, 지금은 동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보통 방법으로는 안되겠지만 그를 취재하러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어...
줄리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퍼졌다.
왕자가 갑자기 돌아서며 말했다.
「뭐 시원한 거라도 마시겠소? 아이스티라든가... 레모네이드. 그래, 이렇게 더운 날에는 레모네이드가 좋을 거요.」
「고맙습니다.」
줄리는 어제 서재에서 생겼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힘센 팔뚝, 넓은 가슴, 짙은 사향 냄새... 그때와 똑같은 감촉이 온몸에 되살아났다. 왕자도 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리 와요 여기서 얘기를 계속합시다.」
줄리는 찬 레모네이드 글라스를 들고,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이곳의 장미는 정말 대단해요. 장미에 이렇게까지 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은 지금 처음 알았어요.」
왕자는 자랑스럽게 주위를 둘러본다.
「여긴 태양 빛이 가득한 곳이고, 장미는 태양을 매우 좋아하니까.」
「과연 그렇군요!」
숲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더위 때문에 풍경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잔디밭은 싱싱하고 시원해 보였다.
줄리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글라스를 놓았다.
「왕자님께서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갖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테러리스트의 행동도 그 방면을 통해서 알게 되나요?」
「당신은 이번 취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거요?」
왕자는 줄리의 질문을 무시했다. 줄리는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저널리스트에게 위험은 늘 따르는 법이죠. 요즘 같은 세상에, 해외 취재에 있어서 위험이 따르지 않는 일이란 없는 것 아니겠어요? 매일 신문에 나는 보통 기사조차도 정보가 일반시민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협박은 물론 실제로 폭력에 호소하는 조직도 있는 걸요.」
「물론 그렇소. 그러나 테러리스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르는 일 아니겠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매스컴은 그들 행동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주는 열쇠를 쥐고 있지요. 미국 정부에도 취재하러 갔었지만, 테러리스트의 최종목적은 매스컴에서 크게 취급되는 것이라고 테러 대책 전문가들이 말하기도 했어요. 그 목적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인물이 표적이 되는 것이죠...」
줄리는 금빛 만년필을 꽉 쥐고 있는 것을 깨닫고, 손에 힘을 빼고 나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테러리스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스미스어를 이용한다고 해서, 어슬렁어슬렁 그들 속으로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소, 미스 코넬.」
「저는 그들이 해온 일을 오래 보아왔습니다.」
줄리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프로의 자존심을 짓밟힌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어요.」
왕자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높은 미슬라 왕자는 똑같이 긍지 높은 인간을 좋아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머니의 손님이고, 이 궁전에 있는 동안에는 당신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소.」
이러한 의견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어째서 남자들은 스릴 있는 경험이 자기들에게만 허용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줄리는 야무지게 말했다.
「저는 자신의 일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게다가 이번 취재에서는 남에게 폐를 끼칠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기껏해야 시원찮은 조사밖에 못할 테니까요.」
「당신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오.」
왕자는 냉랭하게 되받아 말했다.
「그런 무리들이 희생자를 한 사람으로만 국한할 것 같소? 어머니 혹은 누이동생과 쇼핑하러 나갔다가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되겠소? 그들은 그런 기회를 노리지 않소?」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줄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자의 머리는 날카로운 데가 있어... 그는 어느 만큼 앞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일까?
말문이 막혀 버린 줄리는 문득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욕당한 것 같아서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공항이나 서재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솟아올랐던 감정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확 달아오르던 그 기분. 그것은 머릿속에서 냉정하게 생각한 그와의 사이에 쌓아올리고 싶었던 직업적인 관계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어...
「얘기가 조금 지나치게 비약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줄리는 그의 눈길을 피해, 수천 송이의 장미꽃이 어울려 피어 있는 정원을 보았다. 「첫째, 아직은 겨우 테러리스트의 집회가 이 근처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줄리는 말을 끊고 돌아섰다.
「왕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말씀하신 대로 테러리스트들은 제가 인도에 입국한 것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기들의 행동을 휘저어 놓을 저널리스트를 감시하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그러나 그들에게 보복당할 만큼 접근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편집장과 의논해서 공식적으로는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 인도의 정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접근하는 방법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각국 대사관에 찾아가거나 하는 일 말이에요. 지금까지는 커다란 위험은 없는 셈이지요. 다만, 가족 여러분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왕자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호텔로 옮기겠어요.」
엄격했던 왕자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당신이 여기에 있든 없든,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변함이 없소, 줄리. 그 점을 잘 기억해 두시오.」
줄리는 그가 성이 아닌 이름으로 상냥하게 자신을 부른 것에 놀라 왕자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의 기분은 극히 짧은 순간에 극단적으로 바뀌는군.
줄리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하딩 편집장은 왕자는 용기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지만, 테러리스트에게 맞서려는 용기를 평가해 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왕자 자신에게 맞서고 있는 용기를 평가해 주고 있는지 줄리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지금은 그것에 끝까지 매달려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가족들께서 실제로 위험한 일을 당하신 적이 있었나요, 왕자님?」
「나를 자이라고 부르시오.」
왕자는 씽긋 웃었다. 왕자라는 지위 때문에 위엄 있고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치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은근한 미소였다.
「그렇소.」
그는 잠시 뒤에 대답했다.
「테러리스트에게는 우리 가족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지. 생각해 보시오. 우선 나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소. 그런데 낡은 것을 배제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혁명가의 사상이고 보면 왕자라는 칭호가 지금은 명목뿐이고 내가 통치할 나라가 없다고 해도 나는 그들의 좋은 표적이 될 수 있지. 나같은 인간을 이 세상에서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사상을 온 세계에 침투시키는 일이 되는 거요. 또한 내게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있소. 지금 나는 그 힘을 날로 확대되어 가는 소련의 지배력에 대한 저항을 위해 쓰고 있소. 인도 국정에 대한 타국의 개입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싶은 거요. 현재,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하고 있는 인도는 가까운 장래에 자립할 수가 있을 것이오. 천연자원은 풍부하고 인구도 많소. 선조들의 지혜도 있고 하니, 그것을 잘 활용만 한다면 세계의 평화에 문화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공헌할 수가 있을 거요. 소련이나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 의존하기보다는 두 거대한 힘의 균형을 유지해 나가면서 전세계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소.」
줄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 감동하고 있었다. 비꼬인 사람 같고, 매사를 삐딱하게 보는 듯한 그의 머릿속에 낙관주의, 아니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이 들어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게다가 좌익들이 나를 노리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소.」
왕자는 다시 이야기를 해나갔다.
「당신에게 숨길 필요는 없겠지... 정계에 좌익 세력이 신장하지 못하도록 활동하는 사람이 바로 나기 때문이오. 인도에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길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는데,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후원하는 것은 소련이란 말이오. 국제적 테러리스트의 뒤를 밀어 주고 있는 것도 소련이고. 그 다음에는 사업상의 문제가 있소.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인도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기업가요. 그들은 내 회사를 파멸시켜 놓으면 자본주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전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으면 나라 자체도 큰 손실을 입고 흔들리게 되는데, 일자리가 없어지고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어진다면 인간은 누구에게든 도움을 구하게 되는 법이오. 상대가 설사 혁명가일지라도.」
줄리는 바로 곁에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남자가 있음을 의식해서인지 몸이 굳어 있었으나, 그런 기색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불쑥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과 테러리스트의 관계는...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는 당신에게 무엇이 되는 거죠?」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적이오.」
줄리는 섬찟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격렬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이 사람을 적으로 돌리다가는 큰일이 나겠다고 줄리는 직감했다.
이 사람이라면 인정사정없이 적을 해치울 테니까.
왕자는 줄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묻는다.
「내 얘기는 어느 정도까지 활자화되는 거요?」
「글쎄요. 제가 보도하는 것은 테러 행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기사가 되겠죠. 그리고 당신이 주시는 정보가 테러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때를 봐서 쓸 수 있을 테구요.」
「프로라면 당연한 일이지.」
왕자는 어느 쪽이든 자신은 상관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테러리스트의 움직임을 매스컴에 알리는 일로 해서 당신의 입장이 나빠진다면 이야기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이오. 처음부터 그럴 셈이었소.」
왕자의 얼굴은 다시 가까이하기 어려운 가면을 덮어썼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철문이 소리를 내며 내려졌다.
그는 내가 자기 어머니의 손님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뿐, 취재에 기꺼이 도우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
인터뷰는 끝났다. 줄리는 조용히 일어섰다.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며 프리야가 들어왔다. 그녀는 왕자의 모습을 보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 안녕.」
왕자가 먼저 인사를 했다.
「공주님께서는 무슨 용무이신가?」
왕자는 나이가 훨씬 아래인 누이동생이 귀여운지 애정이 담긴 농담을 던졌다. 공주는 기대를 가지고 오빠를 올려다보았으나 곧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고 눈길을 돌렸다. 오빠의 질문은 무시한 채 천천히 줄리 쪽으로 갔다.
「어머니와 사리를 사러 갈 텐데 함께 안 가실래요? 아까 보셨던 비단벌레색 실크를 샀던 가게에 안내해 드릴께요. 괜찮으시다면 아쇼카 호텔에서 점심을 먹도록 해요.」
「어머, 멋있어요. 고맙습니다. 프리야 공주님.」
줄리는 기쁘게 대답했다. 기분전환도 될 것이고, 도시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것도 취재에 도움이 되겠지...
「기꺼이 함께 따라가겠어요.」
「어머니는 에 계세요. 일이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와주시겠어요?」
프리야는 오빠 쪽을 흘끔 쳐다보면서 덧붙여 말했다.
「저도 곧 준비를 하겠어요. 세 사람이 다 준비가 되는대로 나가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어요.」
젊은 공주는 오빠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방을 나갔다. 줄리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얼굴에는 노여움이나 초조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동생이 나간 문을 응시했다. 줄리는 그 자리의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왕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동정해 주지 않아도 돼요. 시집갈 나이의 계집아이에게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난 전혀 마음쓰지 않소.」
「어머, 너무 냉정하시군요!」
줄리는 그의 냉담한 말투에 화가 나서 말했다. 왕자는 줄리의 허점을 찌르듯 잽싸게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의 늠름한 몸에서 사향 냄새가 풍겼다. 그의 손톱이 깊이 팔에 파고들었다. 줄리는 달아나려고 세게 팔을 뺐으나 그의 손은 더욱 그녀의 가는 팔을 죌 뿐이었다. 사실 팔의 아픔보다는 격심한 충동이 몸속을 소용돌이처럼 휘달려가는 것이 더 괴로웠다. 줄리는 그의 존재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시오.」
거칠지 않은 담담한 말투였으나 눈에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남에게 간섭받는 것이 제일 싫소. 당신은 이곳에 온 지 겨우 이틀밖에 안됐으니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소.」
「그렇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줄리는 감정이 나서 말했다. 왕자는 뜻밖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검은 눈은 그녀의 파란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줄리는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신비스런 녹색 불꽃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팔을 놓았다.
「당신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싶어졌소.」
줄리는 한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무례한 남자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는 침묵으로 맞서는 것이 제일이다.
얼마를 걸어가니 이 나타났다. 이름 그대로 금색과 누런 색만으로 장식된 방이다. 색깔의 단조로움은 색깔의 톤이나 천의 짜임새의 변화로써 보완되어 있다. 옅은 색 실크 천으로 덮은 황색 소파에는 짙은 금색 벨벳으로 만든 쿠션이 몇 개 놓여 있고, 마루에는 아이보리 빛 융단이 깔려 있다. 커튼은 핑크와 황색이다. 대리석 테이블 위의 큰 꽃병에는 노란 장미가 꽂혀 있고, 방의 한 귀퉁이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미슬라 부인은 창가의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는데 줄리가 들어가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맞았다.
「안녕, 잘 주무셨어요?」
「네, 편히 쉬었습니다.」
줄리는 부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식사를 일부러 방에까지 갖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서 식사하기가 쓸쓸할 거라고 프리야 공주께서 말동무가 돼주셨어요. 정말 예쁜 아가씨예요.」
부인은 기쁜 듯이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지요. 프리야라는 것은 이 나라 말로 아름답다. 귀엽다는 뜻이니까요. 그 애는 이름처럼 잘 자라 주었지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렸으니 아름답게 자란 거겠죠. 인도에서는 소리를 중히 여겨요. 최고의 성직자 브라만이 언제나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것도 그 때문이랍니다. 평화로운 소리가 울려퍼질 때, 사람의 마음이 끌리지요.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경우에도 말이에요.」
「경전은 어떤 언어로 쓰여 있나요?」
줄리는 미슬라 부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음악을 들려주면 식물이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과학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소리가 인간의 심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러시아워의 소음이나 높고 시끄러운 경적음 따위는 어김없이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하니까.
「경전은 베다라고 부른답니다.」
부인이 대답했다.
「베다란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산스크리트 말이지요. 줄리, 당신은 인도 문화에 흥미를 갖고 계신가요?」
「그럼요. 알고 싶은 게 많아요. 여기에 오기 전에 책은 많이 읽었지만, 우리 문화와는 사뭇 달라서 잘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직접 접촉해 보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과는 상당히 많이 다를 테죠.」
부인은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요, 우리 문화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써만 이해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이슬람교도 그렇지만 힌두교는 기념물이나 사원을 함부로 만들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침은 일상 생활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에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베다를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가르침이 아버지로부터 자식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거예요.」
「부인께서는 잘 이해하시나 봅니다.」
줄리는 감탄하고 있었다.
「제가요? 아니에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인도에서는 어린아이들도 베다의 내용을 알아요. 학교에서, 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연극으로 공연하기도 해요. 그렇게 해서 남성은 베다를 외고 부를 수 있도록 익혀 가는 거예요.」
「여성은 다른가요?」
「그래요. 그것은 남성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에요.」
부인이 대답했다.
「여성의 역할은 가족의 다르마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르마란 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족이 규범을 벗어나지 않도록 마음 쓰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지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우선, 일생을 통해 청렴결백해야 합니다.」
부인은 친절히 대답했다.
「그래서 언제나 무엇에 정신을 자극받고 있어야 합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면 자기 혼자의 몸이 아니라, 가족 전원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프리야의 말에 의하면 스위스의 학교시절 친구 중에는 인도 여성을 2류의 시민이라고 하는 애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진실로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겠어요? 참, 프리야와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어요?」
줄리는 프리야가 눈물을 글썽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한순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줄리는 미슬라 부인과 프리야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너무 나서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런데 마침 부인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프리야가 곧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하던가요?」
부인은 기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모두 자이가 주선했지요. 상대는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인도에서 으뜸가는 가문의 도련님이죠. 어디를 봐도 흠잡을 데 없는 혼담이에요.」
「프리야 공주는 왕자님이 골라주신 상대에 대해서 만족하고 계시나요?」
줄리는 질문해 놓고 후회했다.
내겐 저널리스트의 근성이 배어 있는 모양이다. 이런 때조차도 무엇인가를 캐내려 들다니.
미슬라 부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딸애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거예요. 프라카슈 다스와 결혼한다는 것은 아주 영어로 뭐라든가요? 그래, 럭키한 거죠. 높은 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니까요.」
「프리야 공주는 그 분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하지만 그건 별난 일도 아닌 걸요. 그 사람 집이 뉴델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혼담을 성사시킨 것은 자이니까요.」
「그렇지만 프리야는 왜 토라졌지요?」
「자이 말에 의하면, 프리야는 좀 서양물이 든 것 같대요. 모든 게 잘 됐는데 말이에요. 지금이니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만.」
부인은 말하기 거북한 듯이 억지 웃음을 지었다.
「웨스의 전보를 받은 후 오시는 분이 여성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좀 걱정했어요. 프리야가 또... 아시겠죠, 무슨 말인지?」
「제 영향을 받고, 남녀동등권 같은 것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셨군요?」
처음 만났을 때 미슬라 부인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뭐 그런 이야기죠. 그러나 자이는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아요. 그것이 저의 걱정거리입니다만.」
부인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물론 당신을 만나고 나서는 당신이 좋은 분이고, 프리야와 친구 하기에 꼭 맞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줄리, 당신은 매우 친절하친 분이라 당신을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하게 되어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줄리에게는 부인의 말이 단순한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왕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 귀찮고 성가신 신문기자인데다가 누이동생을 세뇌시키는 케리어 우먼, 그는 나를 그렇게 치부해 버린 것이 틀림없어...
「아무리 자이라고 해도 프리야가 저런다고 당신을 책망할 수는 없을 거예요. 프리야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당신이 오시기 전이었으니까요.」
부인은 테이블 위의 은으로 된 초인종을 울렸다. 그러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하녀가 나타났다. 줄리가 어제 만났던 소녀였다.
「아이스티를 가져오너라, 라무.」
「프리야 공주의 태도가 변했다고 하셨는데.」
줄리의 머릿속에선 공주의 어두운 얼굴이 좀체 사라지질 않았다.
「혹시 결혼이 싫다고 하시는 건 아닌가요 ?」
「아니에요. 결혼문제가 결정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에요.」
부인이 대답했다.
「본래 프리야는 결혼하는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꿈꾸어 왔어요. 더구나 최근에는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하곤 했답니다. 자이에게 재촉을 했더니 너무 이르다면서 귀도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3일 전에 자이가 그 애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프리야가 매우 기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애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결혼같은 건 안하겠다는 거예요. 그뿐이 아니었어요. 울며불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주 미친 사람 같았어요. 전혀 그 애답지 않게 말이에요. 남매끼리는 사이가 좋아서, 프리야는 자이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애랍니다. 그래도 프리야의 이상한 태도는 그때뿐이겠거니 했었지요. 곧 끝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신경이 날카롭게 ...」
「공주는 오빠가 정해주신 분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까요?」
줄리는 프리야의 일이 걱정되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이 줄리의 생각이었다.
도대체 왕자는 여자의 기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나 했을까? 독단적이고, 냉담하고, 자기 중심적인 얄미운 사람!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미슬라 부인은 완곡히 부정했다.
「줄리, 아까도 말했지만 이것은 더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좋은 혼담이에요.」
줄리는 점점 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큰맘먹고 물었다.
「저... 공주에게 달리 좋아하는 분이라도 계시는지...」
부인은 속으로 놀란 모양이었다. 미국인 줄리는 에티켓 위반이라도 했나 하고 걱정했지만 부인은 기분이 상한 것 같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프리야는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했어요. 그런 눈치도 전혀 없고요. 스위스의 학교만 해도 남녀공학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부인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도 언젠가는 자연히 해결될 테죠. 젊은 사람이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변덕스러우니까요. 특히 여잔 더 그렇죠. 틀림없이 갑자기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되자 좀 불안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는 자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 때가 올 거예요. 상대 남자에게 만족을 느낄 테니까.」
그때, 화제의 주인공이 에 나타났다. 만면에 웃음을 띤 공주는 결혼문제 따위는 깨끗이 잊은 것 같이 보였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드려서.」
아름다운 공주가 말했다.
「어머니, 줄리는 제 사리가 아주 마음에 든대요. 그러니까 우선 사리 파라다이스에 가도록 해요. 거긴 비단벌레색의 실크가 많으니까요.」
프리야는 줄리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사리 파라다이스는 뉴델리의 번화가를 둘러싼 듯 나 있는 넓은 거리에 면해 있었다. 구나 신이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차가 가게 앞에 멈추자 집주인이 직접 나와 맞는다. 가게는 커다란 장방형인데, 천장까지 닿은 선반에는 온갖 빛깔의 사리가 반듯이 개켜져 쌓여 있었다.
시퐁, 비단벌레색 실크, 실크 새틴, 저카드(두꺼운 바탕에 무늬가 있는 천) 명주 등 천 의 종류도 갖가지였다. 손으로 염색한 것, 손으로 수를 놓은 것도 있었다.
두 인도 여성의 주문에 맞추어, 몇 명의 점원이 계속 사리를 들고 왔다. 같은 소재와 색체를 사용한다고 해도, 서양 옷에서는 이러한 맛은 낼 수 없을 것이다. 빛의 가감으로 색깔의 조화가 미묘하게 변화했다. 모두가 너무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가게에 있는 모든 사리를 사들이고 싶었으나, 줄리는 최종적으로 셋을 골랐다. 금색 선이 들어 있는 오렌지 색 시퐁, 가장자리 장식을 두른 날개깃같이 선명한 푸른 시퐁, 그리고 엷은 황색의 캐시미어직 실크.
그리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초록색과 연한 핑크 색이 반짝이는 사리를 프리야가 선물해 주었다. 부인도 한 벌 선물해 주었는데 그것은 은실로 정교하게 수를 놓은 스카이블루 색의 실크였다. 주인이 신호를 보내자 재단사가 다가와서 줄리의 치수를 쟀다.
사리를 입을 때는 초리라고 부르는 몸에 꼭 끼는 짧은 브라우스와 복사뼈까지 오는 슬립을 입도록 되어 있다. 사리의 포장이 끝 날 때까지 세 사람은 잡담을 즐겼다.
「줄리, 초리와 슬립은 내일 구나 신이 찾아오도록 할께요.」
미슬라 부인이 말했다.
「그렇게 빨리 되나요?」
「물론입니다. 마담. 문제없습니다.」
가게 주인은 사투리가 심 한 영어로 대답했다. 밖으로 나오자 태양이 눈부셨다.
언제쯤이나 돼야 이 찌는 듯한 더위에 익숙해질까...
줄리는 손으로 눈 위를 가렸다. 바람은 마치 아궁이의 불 속에서 불어오는 듯했고 줄리는 뛰다시피해서 냉방된 메르세데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메르세데스가 커브를 돌 때, 검은 차 한 대가 일행의 뒤를 미행하듯 출발한 것을 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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