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5)

슬러 작성일 05.06.23 08: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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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 호텔은 아름다운 핑크색 돌로 지은 커다란 건물이었다. 고대 인도 제국의 왕이었던 아쇼카 왕의 이름을 딴 이 호텔은 천 개나 되는 객실을 자랑하고 있다. 각국의 대사관이 가깝기 때문에 외교관들이 즐겨 이 호텔을 이용하고 있어서 호텔의 요리와 서비스도 일류고, 여행객이나 비즈니스맨들은 자기 나라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줄리 일행은 보이의 안내를 받아 창가에 자리잡았다. 메뉴를 손에 드는 순간, 줄리는 넓은 다이닝룸 안이 갑자기 떠들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들었을 때, 비즈니스 수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양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을 밀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리스마적 매력을 갖고 있는지 그는 들어오면서 모든 사람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고, 한 순간 레스토랑 안이 잠잠해졌다. 잠시 후 사람들의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으나, 줄리의 호기심은 남자의 근접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에 몹시 자극을 받았다.
급사장이 황급히 달려가서 남자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인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자, 급사장은 미슬라 부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공손히 가리켰다. 남자는 유연한 태도로 곧장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왔다. 줄리는 그가 절반쯤 왔을 때에야 비로소 그 남자가 왕자임을 알아보았다.
「이런, 자이가 아냐?」
미슬라 부인은 큰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대낮의 이런 시간에 우리가 있는 여기까지 찾아왔지? 정말 놀랍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초대라도 했을 텐데.」
「그럼 초대받은 셈치고 여기 앉을까요?」
왕자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줄리와 어머니 사이에 앉았다.
「사실은 조촐한 점심식사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이 모임에 제가 빠진 것은 저 애의 작은 실수가 아니었을까요?」
왕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누이동생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냈다. 줄리가 보기에 그의 말투는 상대를 놀리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 때문인지 누이동생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프리야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지는 듯했으나, 곧 냉담한 무관심을 가장했다. 그녀의 눈은 노여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틀림없이 왕자가 이런 식으로 가족의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좀처럼 없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드는 것을 샀습니까?」
왕자는 줄리에게 물었다. 프리야는 여전히 그가 찾아온 것을 환영하지 않는 듯했으나, 그는 그런 누이동생의 태도에 대해 섭섭해하거나 화를 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젊은 공주는 짜증을 숨기지 못해 곧 울 것만 같았다.
줄리는 자이가 공주의 버릇없는 태도를 나무라지 않는 것이 재미있었다. 누이동생에 대한 그의 애정이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줄리의 생각은 잘못이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은 정말 즐거웠지.」
미슬라 부인이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
「줄리에게 사리를 골라주었거든.」
왕자는 줄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 조금이라도 일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왜냐하면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당신을 새옷으로 갈아입힌 인형으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은 우선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일을 하러 왔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 같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줄리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그의 말투가 워낙 상냥해서, 아까 있었던 일은 잠시 잊기로 하자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줄리도 잠정적인 휴전에는 찬성이었다. 왕자와 정식으로 대결하자면 온 신경을 긴장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한 긴장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견뎌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니, 자이?」
미슬라 부인은 백리향 향기가 풍기는 부채로 아들의 손등을 가볍게 때렸다.
「우리가 골라준 사리를 입은 줄리는 무척 아름다웠지.」
왕자는 또 줄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다시 그의 얼굴을 본 줄리는, 그의 새삼스런 매력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갈색 피부, 우뚝 선 콧날, 귀족적인 용모,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 웃으면 눈이 부실 정도로 흰 이. 지적이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검은 눈동자는 유머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멋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줄리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다. 그녀의 신경은 훌륭한 연주가의 손가락 끝이 닿기를 고대하고 있는 현악기의 줄 같다고나 할까. 왕자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면서, 줄리가 들고 있던 메뉴를 받아들었다.
그의 신사복 소맷자락이 그녀의 드러난 팔을 가볍게 스쳤다. 그 순간, 줄리는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야릇한 기쁨의 전율이 온몸에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에도 일리가 있겠군요. 미스 코넬과 같은 미인을 위해 옷을 고른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겠죠? 저도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줄리, 내가 요리를 골라드릴까요? 아직 요리에 대해서 잘 모를 테니까.」
왕자는 네 사람의 요리를 주문했다.
맛있는 파스마타 라이스를 비롯해서 투르 다르, 그것은 으깬 콩을 주로 해서 만든 것으로 채식주의자인 인도 사람들의 주된 영양 공급원인 쌀이 들어 있다. 그리고 신선하고 차게 한 오이로 만든 라이타, 얇게 썬 오이를 향신료를 친 요구르트에 담근 샐러드다.
마침내 웨이터가 크고 둥근 스테인레스 쟁반을 들고 왔다.
라이스, 다르, 라이타, 완두콩과 치즈를 섞은 마탈 파니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푸리가 놓여 있다.
왕자는 줄리의 가느다란 손을 가볍게 잡았다.
「줄리, 인도 요리를 맛있게 먹는 법을 가르쳐 드리죠. 입에 쇠붙이를 대지 않고 먹는 데 익숙해지면, 포크 따위를 사용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 될 거요.」
왕자는 튀긴 푸리를 쪼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탈 파니르 속에 담갔다. 그는 마탈 파니르가 뚝뚝 떨어지는 빵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줄리도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색한 손놀림으로 푸리를 콩과 치즈가 섞인 걸쭉한 국물에 찍었다. 줄리의 작은 손은 그의 커다란 손에 감싸여, 그의 손의 감촉을 강렬하게 느꼈다. 한 손으로 푸리를 쥐는 것은 꽤나 어려웠다. 그리고 그의 손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 점점 더 어색해졌다.
「이것은 당신의 노동에 대한 보수지.」
왕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푸리를 줄리의 입으로 가지고 갔다. 두 사람은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서로 마주보았다. 검은 눈이 웃고 있었다.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야. 손이 닿기만 해도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왕자는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 줄리의 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줄리는 마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신경인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는 그녀의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속에 떠오르는 정열의 불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부인과 프리야도 웃고 있었다.
「오빠, 줄리 혼자서 먹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어요?」
누이동생이 놀리듯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적어도 줄리의 손가락이 엉망이 되지는 않았구나.」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줄리, 요리에 직접 손을 대고 먹는 곳도 있어요. 남쪽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심해진다더군요.」
「왕자님의 조상은 계속 북인도에서만 사셨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은 그래요.」
왕자가 대답했다.
「우리 조상은 아리아인이죠. 아리아인은 피부가 흰 민족이고, 기원전 1500년경에 중앙 아시아에서 인도로 침입해 온 모양이오. 그리고 그때까지 인도에 정착해 살고 있던 피부가 검은 드라비다족을 남쪽으로 쫓아 버렸소. 그렇게 해서 아리아인이 귀족이 되고 이 땅의 영주가 된 셈이오.」
「3000년이나 지난 옛날 이야기라 그런지 믿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아리아인은 신참자라고 할 수 있죠.」
왕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모헨조다로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네, 들은 적은 있어요. 무척 진보된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얘기를...」
「그래요. 그들의 문명이 인더스 강 유역에서 번영한 것은 기원전 2500년경이라고 해요. 위치는 현재의 파키스탄 근처요. 당시의 도시 생활은 지금의 인도 국민이 누리고 있는 정도로 고도의 것이었소.」
「오랜 옛날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니,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미국은 겨우 200주년을 기념했을 뿐인데요.」
「하지만 인도가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오. 몇 천 년이나 되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오. 그 동안에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있었소. 지금까지 많은 종족이 침입해 왔으니까. 그리스, 스키타이,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진 나라들이 이곳을 지배하려고 싸웠어요. 그래서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의 세력 관계는 끊임없이 변해왔소. 물론 훌륭한 통치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했지만, 대부분의 통치자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국민에게 강요했지. 마침내 동인도 회사가 인도를 지배했지만, 그 부패의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영국 의회가 뒤를 이어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를 통치하게 됐소. 그러다가 마침내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소. 독립한 지 40년도 안된 지금, 인도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소. 파키스탄이라는 하잘 것 없는 울타리를 쓰러뜨리고 인도로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소련에게 있어서는 무척 솔깃한 생각일 테니까. 세계 인구의 14퍼센트를 차지하는 인도인들을 단번에 공산주의자로 만들 수 있거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줄리가 물었다.
「침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당신네들보다 훨씬 절실하게 느끼고 있소. 이 나라는 수세기 동안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아 왔지. 이번에도 또 그런 일이 생길지는 당신이 쫓고 있는 테러리스트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소. 그들이 나라를 흔드는 데 성공하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터를 잃고 정부는 기능을 잃게 되어 국가의 지도자는 탄압정책을 쓰게 되지. 죄없는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괴로워하게 되는 거요. 테러리스트의 최종 목적은 인도 국내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한 것처럼 침공에 착수하는 일이오. 사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적어도 열 나라 이상을 침공하거나 다른 나라를 흡수했소. 말하자면 그들의 정책은 일종의 침략 정책이오.」
「줄리! 오라버니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게 하면 안돼요!」
프리야가 뾰로통해지며 말한다.
「모처럼 점심식사 모임을 망치게 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프리야, 자이에게 우리가 재미있어할 이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야. 너도 아버님과 같은 외교관과 결혼하게 되면, 이런 이야길 몇 시간 동안 계속 들어야 할걸. 네 약혼자인 프라카슈도 언젠가는 틀림없이 정부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젠 이런 이야기를 듣는 일을 배워둬야 해. 그럼 자이, 이야기를 계속해 보렴.」
「이젠 그만 하겠어요, 어머님.」
왕자는 큰소리로 웃었다.」
「모두가 하품을 억지로 참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줄리는 프리야나 미슬라 부인과는 달리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테러리스트에 관한 기사를 정확한 관점에서 쓰자면, 인도의 역사나 정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줄리는 왕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왕자가 현재의 인도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단순히 돈 많은 플레이보이 정도라면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인도의 정세를 파악할 필요는 없겠지.
조국의 장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는 왕자의 모습은 비장했다. 줄리는 그처럼 이지적이고 판단력이 날카로운 그에게 도취되어, 야성적인 육체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약혼자 이야기를 꺼내자, 공주의 얼굴은 금세 뾰루퉁 해졌다.
줄리는 복잡한 남의 집안 일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려고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미슬라 가문은 대대로 나라를 다스려 왔나요? 계속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왕자는 싱긋 웃었다. 프리야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일그러진 것을 본 그는 화제를 바꾸려는 줄리의 생각에 찬성인 모양이다.
「우리 조상들은 융통성이 있었소.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1947년에 인도가 새로운 공화국으로 성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소. 우리 조상은 상당히 권위 있는 힌두교도였지만, 여러 세기에 걸친 다양한 종교에 유연한 태도를 취해 왔소. 그래서 오랫동안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자기들의 지지자를 잘 양성하고,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기 때문에 침입해오는 다른 나라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거요. 그리고 왕은 정복한 나라에서 아내를 맞아 민족간의 이질감을 없앴지. 그래서 우리 증조부께서는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했소.」
그 왕이 당신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 영국 여성의 인생은 비참한 것이었겠죠?
줄리는 자신의 조상을 생각하면서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 왕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실제로 우리는 영국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냈소. 대영제국의 자비로운 보호(?)를 받아들인 왕에게 자기의 토지와 백성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죠. 대영제국으로서는 왕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신들의 힘으로 쉽게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쉽게 조종되지만은 않았어요. 일반적으로 말해서 왕국 내의 사람들은 영국령 인도에 비해 서양 문명의 영향을 덜 받았던 것 같소. 인도가 대영제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왕조 지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죠. 결국 인도는 하나로 뭉쳐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소. 우리 아버님께서도 그랬지만, 각 왕국의 왕들은 인도의 미래는 군주제에 있지 않고 민주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죠. 그래서 새로운 국가는 대대로 존속해온 왕국의 지배자들로부터 영토를 사들여 나라를 만들었어요. 우리 아버님께서는 가족과 함께 뉴델리의 궁전으로 옮겼고, 새 정부의 외교관이 됐던 거요.」
「당신은 그런 변화를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줄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거의 찬란한 역사를 생각한다면 애석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진 않소. 나는 진보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오. 어떤 경우라도 진보를 애석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그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고 줄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웃을 때는 언제나 입의 한쪽 끝을 약간 치켜올린다.
「결국 우리 조상들은 될 수 있는 한 전통에 충실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온 셈이죠. 벌써 식사가 끝나셨나요, 어머님?」
「그래, 자이. 네가 와줘서 정말 기쁘구나.」
「지금부터의 스케줄은 어떻게 되죠?」
왕자는 그렇게 묻고, 황후의 대답에 깊은 흥미를 나타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우선 숄 공장을 견학한 다음, 정원사와 연못에 대해 상의하려고 한다.」
왕자는 아이스크림을 들면서 어떻게든 누이동생을 대화에 끼여들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프리야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불쾌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이, 로비에 있는 책방을 둘러보지 않겠니?」
일행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라마야나의 이 나왔는데, 그 책에 대한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그리고 줄리도 네 얘기를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줄리는 왕자가 의자를 뒤로 당겨 주어 일어났는데 바로 뒤에 그가 서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우연을 가장하고 그의 몸에 접촉해 보고 싶었다.
세상에! 이처럼 내 자제력을 마비시켜 버리는 사람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한단 말인가. 일을 할 땐 감정을 마음속에 깊이 가둬 버리고 뚜껑을 덮어 두어야해.
줄리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나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기자니까 정보제공자와 개인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어 기사를 쓰는 데 있어 객관성을 잃으면 안된다. 물론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겠지만.
왕자에게 팔을 잡혀 다이닝룸을 나갈 때, 줄리는 전신에 잔물결처럼 퍼지는 충동을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책방에 들어가자, 왕자와 미슬라 부인은 인도 대서사시의 최신 번역판의 칭찬할 만한 점을 힌두어로 말했다.
줄리는 프리야와 함께 옆에 있는 잡지 등을 훑어보았다.
「줄리, 할리우드에 가본 적이 있어요?」
프리야는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표지로 나와 있는 영화 잡지를 손에 들고 물었다.
「네,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산 적이 있어요.」
「어머, 그래요? 그럼 영화에 출연한 일도 있나요?」
줄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뇨. 하지만 제 약혼자는 많은 영화에 출연했죠. 그 사람은 스턴트맨이었거든요. 특별한 훈련을 쌓아, 스타들에게는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장면에 대신 출연하는 거죠.」
줄리는 왕자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느꼈다.
「약혼자라구요? 줄리, 당신 약혼했어요?」
프리야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럼 왜 결혼하지 않았죠?」
「네, 저...」
줄리는 말이 막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왕자가 두 사람 앞으로 왔다.
「프리야,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실례야.」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누이동생을 나무랐다.
「어머님은 책을 사고 계시니까,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괜찮아요, 프리야.」
줄리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써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결혼하기 전에.」
「미안해요, 줄리.」
프리야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아픈 곳을 건드렸군요.」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줄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생긋 웃어 보였다.
「게다가 꽤 오래 된 일인 걸요. 자신에게 그렇게 타이르면서 슬픔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죠.」
줄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무심코 눈을 들었을 때, 줄리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왕자를 발견했다. 그의 눈속에서는 알 수 없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책방을 나와 줄리는 숄 공장을 방문하러 가는 미슬라 부인과 프리야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호텔의 로비로 돌아왔다. 왕자는 사업상의 약속이 있다면서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줄리는 서비스카운터에 가서 , , 의 영문판을 샀다. 그리고 다시 책방으로 가서 인도의 잡지 몇 권과 지의 해외판을 샀다.
텔레타이프 소리에 끌려, 가게가 줄지어 있는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동안, 보내오는 뉴스가 속속 기록되고 있었다. 아쇼카 호텔이 숙박객을 위해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였다.
줄리는 기록이 프린트되어 나오는 광경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곧 로비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 조금 전에 산 잡지와 신문을 훑어보았다.
주요 목적은 두 가지였다. 우선, 현재의 인도 사회와 정치의 대세를 아는 일, 그렇게 하면 무엇이 보도 가치가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방지의 사회면이나 칼럼, 경제면, 그리고 정치가의 연설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뉘앙스와 단서를 찾는 일이었다.
줄리는 한 시간 반쯤 그렇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과 잡지를 한데 모아 가까이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호텔의 프런트에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에 찾아갈 심산이었다.
오늘은 미국 대사관엔 가지 않기로 했다. 캐나다나 스위스와 같은 작은 나라의 대사관은 불시에 찾아가도 특별히 시간을 내주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많다.
줄리가 미슬라 저택의 정문을 통과한 것은 지평선에 푸른빛이 도는 잿빛의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경비병에게 이미 명령을 해두었는지 줄리는 곧 통과되었다. 택시에서 내려 현관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돌계단 앞에 서자, 갑자기 기분이 들뜨는 듯 했다.
뉴스를 쫓는다는 지루한 작업 뒤에, 이처럼 불이 환히 켜진 아치형의 창문을 올려다보니 마치 자신이 따뜻한 환영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줄리는 미슬라 부인이나 왕녀를 만난다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보다도 왕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자신을 깨닫고 놀랐다. 줄리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그날 밤 저녁식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부인은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을 열심히 이야기했고, 프리야는 또 쇼핑을 하러 가자고 말했으나, 줄리는 억지 웃음을 띄우면서 말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그녀는 정보가 극단적으로 통제되어 있는 인도에서, 어떻게 하면 믿을 만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지 그 문제를 두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인도 국내의 상류 계급에 아는 사람도 없고, 믿을 만한 정부의 뉴스소스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늘 만난 대사관의 관리는 매우 우호적으로 협력해 주었지만, 테러리스트에 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도에 테러 조직 따위는 없다고 자신있게 단언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부질없는 걱정을 하느냐면서.
비밀리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은 큰 뉴스 거리가 된다. 그러나 지금 줄리가 인도에서 하고 있는 취재는 정확하게 말해서 직감에 바탕을 둔 것에 불과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웨스 하딩의 직감에 불과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조짐을 보일 때는 그것이 어디서 일어날는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한 숨은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는 것이 줄리의 일인 것이다.
국제적 테러 조직의 지도자 회의는 분명히 중요한 뉴스다. 그 회의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 행위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게 되면 민주주의를 테러의 위협에서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줄리는 이런 일과 관련해 오늘밤 왕자를 만나고 싶었다. 비록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이런 문제에 관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적어도 그는 전체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흥미도 갖고 있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뒤얽히고 있는 정보를 판단력이 날카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정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왕자님은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일이 별로 없으신가 보죠?」
줄리는 이야기가 잠시 끊긴 틈을 타서 물었다.
「가끔 함께 하지만.」
부인이 대답했다.
「오늘은 일하는 방에서 식사를 날라다 하고 있는가 봐요. 식사시간에도 일을 하는 때가 많거든요.」
「전 모르겠어요.」
프리야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뾰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너는 점심식사를 할 때 자이와 말을 하지 않았지?」
어머니가 달래듯 말했다.
「도대체 너는 무엇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구나.」
결국 왕자는 저녁식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줄리는 에 있는 소파에 앉아 석간을 읽으면서, 홀에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긴장하면서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것은 왕자의 발소리가 아니라 하인의 발소리였다.
하는 수 없이 줄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는데 마음은 울적하고 마치 배반당한 것 같은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침실의 문턱을 들어선 순간, 줄리는 아늑하면서도 호화로운 방의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네이비블루의 원피스를 벗고 옷걸이에 걸려고 넌 탈의실로 갔을 때, 하인이 짐을 풀어놓았는지 양복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원피스를 옷장 안에 치우고 곧 욕실로 갔다.
대리석으로 된 욕탕 안에 몸을 담그고 감촉이 좋은 향기 그윽한 바스오일의 거품을 희롱했다. 뜨거운 물 속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난 줄리는 선반에서 두터운 타월을 꺼내 몸을 닦았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이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일에 관한 것이 아닌가.
줄리는 그렇게 생각해 보았지만 그의 야성적이고 유연한 몸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매력을 생각하면, 그러잖아도 뜨거운 물 속에서 달아오른 몸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녀는 조가비 모양으로 생긴 욕조 반대쪽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빨려 들어갔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매우 유혹적이다. 풍만한 가슴, 길고 탄력 있는 다리,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은 자이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중해처럼 짙푸른 눈은 밝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이는 이런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아름답다고 칭찬해 줄까?
줄리는 목욕 수건을 접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거울을 향해 얼굴을 찌푸려 보았다.
안돼, 줄리. 일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해. 저녁식사 자리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남자가 기꺼이 상대해 줄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어.
줄리는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는 점심때 다소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아쇼카 호텔을 나간 후에는 한 번도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그의 그런 친절쯤은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습관적인 행동에 불과할지도 몰라... 나는 줄곧 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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