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6)

슬러 작성일 05.06.23 08: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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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느 서랍을 열어 봐도 나이트드레스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하녀는 그것을 어디다 치웠을까? 하지만 오늘밤은 따뜻하니까 입지 않아도 괜찮겠지.
줄리는 나이트드레스를 입는 것을 단념하고, 불을 끈 다음 무거운 커튼을 열었다. 별이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숲의 저쪽이 어렴풋이 밝았다.
줄리는 손으로 더듬어 침대로 갔다. 그리고는 좋은 향기가 감도는 베개를 베자, 곧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잤을까. 줄리가 눈을 떴을 때, 침실은 아직 캄캄했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달빛으로 융단이 어렴풋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줄리는 양팔을 자신의 벌거숭이 몸에 감고, 아름다운 밤의 한때를 맘껏 즐겼다. 비로소 인도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어쩐지 새로 태어난 듯한 묘한 기분에 흥분하고 있었다.
뉴욕은 아직도 오후일까? 언제쯤이나 돼야 시차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때 줄리는 방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움직이지 마.」
남자가 명령하듯 말했다.」
줄리는 너무나 놀라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두려움이 전신을 사로잡았고 줄리는 베개를 안고 몸을 웅크렸다. 가슴이 무거운 얼음 덩어리처럼 느껴지면서, 그 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소리내지 마.」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줄리에게 경고하듯 명령한다. 줄리는 다시 숨을 죽였으나 이번에는 안도감과 함께 노여움이 치밀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죠?」
줄리는 놀랐던 자신에게까지 화가 났다.
「조용히 하라니까.」
단호한 목소리 속에는 다소 재미있어하는 기미마저 느껴졌다.
「무슨 일로 제 침실에 들어오셨어요?」
줄리는 목소리의 주인 모습을 찾으려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빨리 나가주세요!」
어둠에 싸여 있던 검은 그림자가 거실과 침실을 갈라놓은 벽에서 떨어졌다. 줄리는 다시 한번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왕자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틀림없이 그가 침실 문을 여는 바람에 잠에서 깼을 것이다.
「혹시...」
줄리는 굳게 다문 입을 열려고 했다.
「쉿!」
왕자는 미끄러지듯 움직였으나, 침대 쪽으로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짐작컨데 달빛을 피해 창문 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무전기였다. 침실에 있는 가구의 그늘에 숨어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밤의 정글에서 사냥감에 접근하는 호랑이와 같았다. 오늘밤의 그런 그는 위협을 느끼게 했고 호기심을 일게 했다.
줄리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었다는 것도 완전히 잊고, 호기심의 노예가 되어 그를 지켜보았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세요?」
줄리는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왕자는 줄리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무전기를 입 쪽으로 가지고 가, 그것을 향해 힌두어로 속삭였다. 지시를 내리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줄리는 무엇인가 몸에 걸칠 만한 것을 주위에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입을 만한 것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녀는 침대의 시트를 끌어당겨 얼른 몸에 감았다.
「그런 짓을 하면 안돼.」
어둠 속에서 왕자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흰 것을 걸치면 밖에서 잘 보이잖아!」
그는 창가에 서 있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아 들릴 듯 말듯 했다.」 「
하지만.」
줄리는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입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걸요!」
「그야 당신 맘대로 해도 좋지만, 시트는 그대로 둬.」
「하지만 무슨 일인지 저도 보고 싶어요!」
줄리도 왕자처럼 속삭이듯 말했다.」
「그것도 당신 맘대로 해.」
줄리는 캄캄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방안으로 비쳐드는 달빛에 의존하면 방안의 광경을 알 수 있다. 줄리는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 푹신푹신한 융단에 깊이 빠졌다. 창가에 있는 왕자의 모습에 눈의 초점을 맞추었으나, 그가 이 쪽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줄리는 이런 점을 이용하여 넓은 방을 가로질러 그가 서 있는 위치와는 반대쪽의 창을 향해 걸어갔다.
왕자가 그랬듯이 사냥감을 노리는 호랑이처럼 신중하게 발을 내디뎠다. 벌거숭이로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동안, 이국의 밤의 신선한 공기와 달빛, 그리고 스릴이 섞인 야릇한 감흥을 느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어도 정확하게 볼 수 있소.」
갑자기 왕자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줄리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한쪽 발을 든 채 방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몰래 도망치려던 토끼가 갑자기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받은 꼴이었다. 줄리는 당황한 나머지 높은 창문에 걸려 있는 긴 커튼 뒤로 숨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 이런 때 저렇게 냉정한 목소리로 남을 조롱할 수 있다니. 게다가 이런 어둠 속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도대체 저 사람의 눈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줄리는 작은 목소리로 악담을 했다. 왕자의 깊고 굵직한 목소리가 웃고 있었다. 줄리는 무거운 실크 커튼으로 유연한 몸을 감싸고 귀를 막았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커튼 사이로 바깥을 엿보았다.
처음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 달빛을 받고 있는 광경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우산처럼 생긴 나무 그늘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줄리는 필사적으로 응시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일까요?」
줄리는 방안의 반대쪽에 숭어 있는 남자에게 속삭였다.
「저 나무 밑에...」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그의 몸에서는 강렬한 생명력 같은 것이 발산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줄리의 몸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그는 사냥감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는 사냥꾼이었다.
내 심장은 이처럼 뛰고 있는데, 그는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그는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침착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저 나무 밑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줄리는 자신이 목격한 것의 정체를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다. 다시 그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한 줄기의 빛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일까?
줄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을 때, 갑자기 눈앞에서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쇠붙이였다.
「라이플이에요! 라이플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줄리는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좀더 잘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숙여! 놈들한테 발견돼!」
왕자의 날카로운 경고는 너무 늦었다. 총의 조준이 이미 줄리에게 맞추어진 것이다. 아찔해진 줄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넓은 잔디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달빛에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궁전을 에워싸고 있는 꽤 떨어진 담을 향해 기를 쓰고 달린다.
침입자는 총을 쏘아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놀라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니까. 왕자는 무전기에 대고 빠른 말로 명령했다. 그러자 침입자를 쫓는 발소리가 조용한 밤 공기를 가르고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들렸다.
그러나 주위는 곧 조용해졌다. 꽃이 만발한 수목들에서 풍겨 오는 짙은 향기가 침실 안에서 긴장하고 있는 두 사람의 코를 자극한다. 왕자가 무전기에 입을 대고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줄리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의자의 등받이에 실크 바스로브가 얌전하게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녀가 침대를 정돈하러 왔다가 바스로브를 여기에 놓은 모양이었다.
줄리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고, 은실로 용을 수놓은 엷은 청록색의 아름다운 바스로브를 걸쳤다. 옷을 걸치고 나서 왕자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할 때, 마침 그는 대화가 끝난 듯했다.
「미안합니다...」
줄리는 말을 더듬으며 사과했다.
「그들이 도망친 것은 저 때문이었나 봐요.」
왕자는 말없이 냉담하게 줄리를 응시하고 있다가 마침내 등을 휙 돌렸다.
「사과 드리고 있잖아요!」
줄리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한 발짝 앞으로 더 내디디며 손을 내밀었다. 그대로 나가려던 왕자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본다.
「나는 모르겠소.」
「무엇을 말인가요? 제 탓이에요. 당신은 그들을 잡으려고 하셨죠? 제 모습이 그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요.」
「어차피 그들은 잡히게 마련이야.」
왕자는 자신있게 말했다.
「지금쯤 잡혔는지도 모르지. 경비는 펀잡 사람이 맡고 있으니까.」
줄리는 곧 왕자가 한 말의 뜻을 깨달았다. 인도 북서부 펀잡 주 출신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힘이 세어, 예로부터 우수한 전사로 유명했다.
「침입자의 정체를 알고 계시나요?」
줄리가 물었다.
「알고 있다면 어떻다는 거지?」
왕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사소한 일을 중대한 사건처럼 다루지 말아줬으면 좋겠소. 신문기자란 필요 이상으로 상상력이 풍부해서 탈이거든. 어째서 있는 그대로를 전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소.」
「당신이야말로 이야기를 비약시키고 계시다고 생각되는데요.」
줄리는 반박했다.
「조금 전에 왔던 사람들이 이곳에 침입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누가 알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침입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 그런 사실을 쓸 생각도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인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오늘 먹을 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사람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남을 해칠 생각을 갖고 있다고는 할 수 없죠.」
「라이플을 갖고 있어도?」
왕자는 빈정대듯 말했다.
「하긴 어느 쪽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저는 테러리스트에 관한 기사를 쓰러 인도에 왔으니까요.」
「어리석은 소리하지 마시오! 저 살인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지? 단순한 침입자나 강도라면 라이플로 무장했을 것 같소?」
왕자의 심기는 점점 더 나빠졌다.
「우리 가족의 누군가를... 유괴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해. 아니면 내 사무실에 침입해서 중요한 정보를 훔쳐 가려고 했던 거요.」
「그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말씀인가요?」
줄리는 어둠 속에서 왕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정말 어쩌다가 그들에게 내 모습이 발견되었을까!」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군. 어째서 발견되었지?」
그의 말투 속에서 무엇인가 무서운 것을 느낀 줄리는 목덜미에 싸늘한 것이 와 닿는 느낌이었다. 이때 무전기에서 찍찍 소리가 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긴장된 분위기를 깼다. 왕자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뭐라고 대답하고 나서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그는 줄리를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줄리는 대담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죠?」
「놓쳐 버렸소.」
「저런!」
「수제 폭탄과 라이플이 숲속에 버려져 있었던 모양이오. 물론...」
왕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놈들을 잡았더라면 놈들이 어떤 놈이고, 무엇을 노렸으며, 또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겠지. 혹시 누군가로부터 물러가라는 경고를 받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경고를 했다구요?」
줄리는 숨을 죽였다.
「정신이 좀 이상해지신 것 아니에요?」
「그럼 말해 봐. 놈들은 왜 당신의 방에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는지.」
「하지만 여기는 객실이에요. 그렇잖아요?」
줄리는 곧 반격을 가했다.
「그 사람들이 이 궁전의 내부를 잘 안다면, 이 방이 빈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아냐, 줄리.」
왕자는 벽에 기댄 채 검은 눈동자로 빤히 줄리를 쳐다본다.
「적의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아름다운 여성을 보내는 것은 무척 고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해외 특파원이에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줄리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스파이 취급을 받는 것은 사양하겠어요! 그리고 저를 보통 여자라고 생각하지도 말아 주세요. 저는 어엿한 저널리스트니까요!」
「당신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소. 당신이 이 순간 무사하게 이곳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여자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이 궁전에서 쫓겨났을 거요.」
줄리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바스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왕자의 목소리는 점점 쉬어 갔다. 그리고 그에게 끌리는 마음도 더해 갔다. 줄리는 갑자기 자기가 왕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홀한 달빛,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남성, 그리고 바스로브 속에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그 는 의식의 안쪽에서 유혹되기를 바라는 자신을 깨달았다. 줄리는 지금 생명력이 넘치는 남자 앞에서 흥분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시죠.」
줄리는 어지러운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말을 꺼냈다.
「저는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왔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오늘밤 그 일을 방해했소.」
왕자는 신랄하게 쏘아붙인다.」
「그것은 저의 실수였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아까 사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모든 사람을 의심스런 눈으로 보시죠?」
「인도에선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의심스런 눈으로 보면 볼수록 오래 살 수 있거든.」
왕자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미국이 아냐, 줄리. 인도야.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 두라구.」
「이곳의 방식이 저는 싫어요!」
「지저분한 일을 시키기 위해 당신을 이곳에 보낸 것은 아무래도 당신 상사의 실수인 것 같군.」
왕자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바엔 당신이 일하는 것이나 구경하기로 하지.」
그는 줄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오해예요. 저는 테러리스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빨리 나가 주세요.」
줄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봐요, 자이. 저는 일을 하러 인도에 온 거예요. 다른 속셈은 없어요.」
「이곳이 보다 로맨틱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오?」
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줄리에게 다가왔다. 줄리는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사실 이처럼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았을 때, 줄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손을 줄리의 등으로 돌려, 넓은 가슴으로 그녀를 감싸듯 끌어당겼다. 넘치는 기쁨이 그녀의 이성을 배반하고 온몸으로 퍼졌다.
「자이, 제발 놓아주세요.」
줄리는 필사적으로 소리치려고 했으나, 그 소리는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왕자의 입술이 그녀의 저항을 빨아들이듯 덮쳐왔다. 불타는 정열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저항하려는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오히려 격렬하고 감미로운 기쁨이 마음 구석구석까지 번진다.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자제의 매듭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결국 줄리의 입술은 망설이듯 그의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줄리는 그의 커다란 등에 손을 돌려 그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 온몸을 떨었다. 맨살이 닿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옷이 주체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그의 팔에 완전히 맡기고 있었다.
왕자는 바스로브 속으로 손을 넣어, 억센 손으로 그녀의 등을 애무하다가 갑자기 바스로브를 끌어내려 상반신을 드러나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스로브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행동을 망설이게 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그녀를 대담하게 했다.
그가 황홀한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왕자는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손을 대고, 평소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냥한 태도로 애무했다. 그는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감쌌다.
「정말 매끄럽고 부드럽군...」
왕자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 속삭였다.
「게다가 이처럼 희니까 놈들에게까지 발견된 거요.」
왕자는 격렬하게 맥박치는 그녀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희니까...」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말뜻을 알았을 때, 줄리는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기를 안고 있지만 조금 전과는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열정이 갑자기 식어버린 것일까? 거친 호흡만이 조금 전의 정열을 증명하고 있었다.
「놈들의 머리가 그렇게까지 좋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왕자는 전혀 감정을 섞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밤의 정적 속에서 무척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다시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거라고 그들에게 말해 줘.」
왕자는 갑자기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줄리는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왕자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으나 줄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또 한 가지 그들에게 말해 줘.」
왕자는 냉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는 한, 당신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당신이 나를 방해한다면 나는 당신을 가차없이 파멸시킬 거요. 지금까지 나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위협한 자가 밟은 운명을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요. 당신이 아무리 애처롭게 보여도 내 마음은 흔들리 지 않아. 보기와는 달리 당신의 마음이 대리석처럼 단단하고 싸늘하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줄리는 간밤에 있었던 일이 모두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테러리스트가 그처럼 가까이까지 왔는데도, 자기로 인해 그들이 도망쳐 버렸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이나 테러리즘의 세계를 추적한 끝에, 이제는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는 테러 행위에 대해 지독한 증오감을 느끼고 있는 줄리이고 보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가능성을 잔인하게 짓밟는 자들이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본의 아니게 무척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한 줄리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잠시 후 줄리는 전화통을 초조하게 노려보면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간밤에 왕자가 방에서 나간 뒤, 그녀는 신문사에 전화를 신청했었다.
인도에서는 해외 전화가 연결되기까지 2시간에서 12시간까지 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간밤에 있었던 일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외신부에 전하고 싶었다.
그 일을 마치고 나서 왕자와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었다. 왕자가 테러리스트와 한패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오해를 풀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테러리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의 도움을 바란다는 것은 헛된 짓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인간으로 생각된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테러의 공법자라니.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줄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보았지만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테러리스트들을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달빛이 잘못이었다.
내 모습이 달빛에 비친 순간,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하면...
줄리는 걸음을 멈추고 매니큐어로 아름답게 다듬은 손가락으로 흰 리넨 스커트를 잡아당겨 주름을 폈다.
그 사람은 나를 최면상태에 빠지게 한다. 나는 마치 꿀을 찾아 날아가는 벌처럼 그의 팔에 안기고 만 거야.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야...
그때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줄리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외신부에 전화를 신청한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말하고, 기사를 구술하기 시작했다. 찍찍 하는 잡음이 크게 들려 큰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늘 아침 미명에 테러리스트 그룹이 뉴델리에 사는 유명한 실업가이며 보수 정치가의 리더인 미슬라 왕자의 저택에 잠입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북인도 지방을 다스려 왔던 왕가의 후손인 자이야프라디슈 미슬라 왕자의 경비원이 궁전에 불법 침입한 3명의 남자를 발견했다. 수제 폭탄 몇 발과 소련제 라이플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도망친 후 발견되었다. 현재 인도에는 조직적인 테러리스트 그룹은 없으나, 간밤의 공격은 최근 세계적인 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전문적 테러리스트의 소행에 의한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다.


구술을 끝내자, 전화의 상대편에서 귀에 익은 편집장의 목소리 들려왔다.
「줄리?」
웨스 하딩이 외쳤으나 줄리는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요!」
「봄베이의 스트링어에게 연락을 취해. 당신의 거처를 그 사람이 알아두는 게 좋겠어.」 그 사람도 기사의 요약을 써야 하니까.」
「그렇게 하겠어요.」
줄리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좀더 자세한 것을 물으려 했으나, 전화는 곧 끊겼다. 줄리는 수화기를 든 채 잠시 창 밖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었다. 성급한 웨스 하딩의 귀에 익은 목소리. 뉴스 편집실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임이 중요함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나는 중요한 취재를 위해 파견된 직업적인 신문기자다. 매력적인 왕자의 손이 닿기를 기다리는 무책임한 여자 따위가 아니야!
줄리는 수화기를 들고 봄베이를 신청했다. 실은 어제 전화를 하려고 생각했으나, 대사관에서의 취재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잠시 후 스트링어 아난도 나올로지와 연결되었으나 편집장의 목소리보다 더욱 멀었다. 아난도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봄베이에서 실업중인 젊은이들 한 패가 알제리아의 테러리스트 훈련소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훈련 기간은 1개월. 그들이 이미 그곳을 향해 인도를 출발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고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느냐고 묻자, 아난도는 크게 웃었다.
「의 단골 정보 소스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 이봐요, 줄리. 인도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에 봄베이에 한 번쯤 와주어야 할 것 아냐?」
아난도는 이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놓기 전에 갑자기 생각난 듯 덧붙여 말했다.
「집사람이나 나나 당신이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어.」
「정말 고마워요. 꼭 한 번 찾아가겠어요.」
줄리는 즐거운 듯 명랑하게 대답했다. 정보의 출처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아난도가 준 정보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를 쫓아 인도에 온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져, 줄리는 다행스러웠다. 테러리스트는 인도에서 회합을 갖고 각자의 조직을 재정비한 다음, 그들을 그룹 별로 각국에 보낼 계획인 것이다. 각국의 테러리스트가 같은 이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들의 당초 목적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 형태든 간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줄리는 테러리즘을 취재하기 위해 테러 조직이 출판한 책을 읽어보았으나, 아무리 읽어 봐도 그들이 사회를 파괴한 뒤에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줄리는 얇은 무명 블라우스 위에 스커트와 같은 새하얀 재킷을 입고, 굽이 높은 흰 샌들을 신었다. 탐스런 머리를 윤이 날 때까지 빗질을 하면서도 아난도가 준 뉴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줄리도 전에 그런 훈련을 받는 캠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천 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여러 나라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입소자는 테러리스트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48페이지 짜리 책인, 브라질의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마리켈라가 쓴 을 교과서 삼아 공부한다. 그리고 KGB 의 관리도 와서 그들에게 암호서류와 위조 패스포트를 만드는 법, 폭탄 제조 방법 등을 가르친다. 그리고 입소자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끊기 어려운 유대관계 따위는 철저한 훈련으로 영원히 없애 버린다고 한다.
줄리는 몸서리를 쳤다. 향수를 필요 이상으로 뿌려 다른 생각을 하려고도 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미슬라 왕자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냉정한 그를 만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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