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7)

슬러 작성일 05.06.23 08: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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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왕자의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사무실 안을 몰래 살펴보니, 깨끗하게 정돈된 책상을 사이에 두고 프리야와 자이가 마주앉아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공주의 말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왔다.
「요즘 세상엔 남편을 자신이 고르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침묵이 흘렀다.
공주는 초조한 듯 몸을 움직이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님은 자신이 하고 계신 일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죠? 제게는...」
「프리야, 너야말로 좀 정상이 아닌 것 같구나.」
왕자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 매력적이고 영리한 공주님은 어디로 갔지?」
「아무리 심한 말씀을 하더라도, 저는... 절대로 단념할 수 없어요!」
프리야는 선언하듯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지 목소리가 흥분해 있었다.
「심한 말은 하지 않아.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할 뿐이야. 그리고 나는 너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사람의 의견에 네가 놀아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줄리를 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에 대해서는 욕하지 말아 주세요. 제 귀중한 친구니까요.」
프리야는 외치듯 말했다.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네 입장을 잘 생각해 보라구. 틀림없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갖고 네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죠.」
프리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입장을 이용하려고 저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맞아,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프리야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님, 난 오라버님이 정말 미워요! 왜 매사를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시죠? 단 한 번이라도 남을 사랑한 일이 있다면...」
「그럼 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단 말이냐, 프리야?」
왕자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저는 절대로 프라카슈 다스 씨와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요!」
프리야는 벌떡 일어나 줄리가 있는 것도 모르는지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소?」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녜요.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에요.」
줄리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왕자는 다가오는 줄리의 모습을 말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줄리는 상대가 권하기도 전에 책상 앞에 걸터앉았다.
「자이...」
줄리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책상 위에서 양손을 맞잡았다.
「지난밤의 일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찾아왔어요.」
「왜 사과를 하려는 거지? 간밤에 당신은 꽤나 훌륭했는데.」
왕자는 물끄러미 줄리를 바라보면서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기댔다. 낙낙한 무명 셔츠는 위쪽의 단추가 풀어져, 불뚝 솟아 있는 가슴의 근육이 들여다보였다.
「나는 당신의 모습을 실컷 즐겼거든.」
「어머, 지독하군요!」
줄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러나 간밤의 행동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든 그에게 알리고 싶어서 말을 계속했다.
「테러리스트에게 제 모습이 발견되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믿어 주세요. 저는 절대로 테러리스트와 내통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과 똑같이 저도 테러리스트를 잡고 싶어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속이 매스꺼워지는 걸요! 로마의 폭파 사건을 보셨더라면... 그들에게 참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한 순간에... 저는 테러리스트 그룹에 대해서 계속 조사해 왔어요. 정말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까지고 그런 조직에 속해 있지 않죠. 결국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요. 언제까지고 조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살인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자부하는 사람들이에요. 빨리 테러리스트의 리더가 잡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테러리스트의 실태를 독자에게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죠.」
왕자는 말없이 줄리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왕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의 말은 아마 거짓말이 아니겠지.」
잠시 후 왕자는 입을 열었다.
「나로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고 싶지만...」
줄리는 몸을 일으켜 왕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데 그럴 수 없다는 건가요?」
왕자는 책상 위에서 연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편이 안전하거든.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는 눈을 들어 줄리를 쳐다보았다.
「운명에 의지하고 있을 수가 없어.」
「당신 자신이 사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신다는 말인가요?」
줄리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저를 언제까지고 스파이로 생각하실 건가요?」
「그보다 더 사소한 실수라도 옛날 같으면 목이 잘리지.」
왕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몸을 펼 때 그의 근육이 물결처럼 작은 기복을 이루는 것을 셔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새까만 머리 칼,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턱, 그리고 웃으면 드러나는 새하얀 이가 인상적인 왕자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사는 남자라기보다는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줄리는 헛웃음을 웃었다.
「틀림없이 그랬겠죠. 하지만 당신은 과거에 사는 일은 그만두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왜 그처럼 저를 싫어하시는 거죠?」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당신 말이 맞지만,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는 않아.」
줄리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 위에서 양손을 맞잡았다. 왕자가 손을 뻗쳐 그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뒤집어 자신의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시늉 을 한다.
「왜 저를 믿어 주시지 않는 거죠?」
줄리는 한데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부드럽고 친절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을 그녀는 하고 있었다.
왕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이 모를 리가 없는데. 당신과 나는 그 동안 자라 온 환경이 전혀 달라. 당신은 남을 믿고,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겠지?」
줄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그니스 이모는 이른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그럴 거야. 하지만 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받아 왔지, 남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라고. 언제나 최악의 상태를 생각하도록, 그리고 남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도록 훈련을 받아 왔어. 보아 하니 당신은 쇼크를 받은 모양이군...」
「어머니께서 당신을 그렇게 가르치셨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군요.」
「그렇지 않아. 나를 훈련시킨 사람은 어머니가 아냐. 프리야 때문에 나는 거의 아버지 손에서 자란 거나 다름없어. 아버지는 머리가 대단히 영리한 분이셨지. 옛날 식으로 자식을 교육시키지 않는 게 좋다는 친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나를 길러주셨어. 아버지께서는 항상 20세기에 왕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옛날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지.」
「대단한 소년 시절이었군요.」
줄리는 무심코 그렇게 말하면서 왕자의 뺨에 살그머니 손을 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왕자는 안색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실은 그렇지 않았어. 그 무렵은 무척 즐거웠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좋았던 때는 바로 그때였던 것 같소. 카슈미르의 여름 궁전에서는 사냥의 즐거움을 배웠지. 그 궁전에는 경주마도 여러 마리 있었지. 그 경주마들은 누구나 탐내는 것들이었어.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어디나 함께 데리고 다니셨지. 그 무렵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사업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고. 아마 아버지는 아들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건달로는 만들고 싶진 않으셨던 모양이오. 부질없는 일로 내 젊음을 낭비하고 다니면, 나를 쏘아죽이겠다고까지 말씀하셨지.」
줄리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 왕자는 싱긋 웃었다.
「확실히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셨지만 나를 잘 알고 계셨어. 뭐니뭐니 해도 친아버지와 친자식 사이였으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생각은 항상 옳았거든.」
「어떤 의미에서 말인가요?」
왕자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사람의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동기가 있게 마련이야. 글쎄, 무심코 영위하는 일상 생활은 좀 다르겠지만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관계를 가지려고 할 때나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랄 때는 사람은 반드시 책략을 꾸미게 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면서 내게 접근하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가 쉽게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 줄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예를 들면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 자기 조카에게 회사의 중요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 새로운 사업을 출자해 달라, 충고를 해달라, 중요한 정보를 달라...」
줄리는 무의식적으로 노트를 한장한장 넘기고 있었다.
「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왕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누가 뭐래도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득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당신도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가를 알아두는 것이 좋을 거요.」
「네. 솔직하게 말하면 저도 당신의 도움을 빌려고 이곳에 찾아왔어요.」
「당신이라면 대환영이지.」
줄리는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저는 일과 즐거움을 혼동하지는 않아요. 프로에게는 프로의 윤리라는 것이 있거든요.」
「지난밤의 당신으로 봐서는 믿어지지 않는 발언이군.」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옆을 돌아 줄리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 왔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그녀의 턱을 제끼고, 목 언저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은?」
「실수였어요.」
줄리는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목 언저리에 닿은 그의 입술의 감촉은 그녀에게 감미로운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줄리는 어떻게든 주의를 딴데로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왕자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관능의 불길이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다.
「당신은 아직도 제가 테러리스트와 한 패라고 의심하고 계시는 거죠?」
「의심하지 않는 척하는 편이 나을까? 어느 쪽이든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기로 하지.」
왕자는 의자에서 줄리를 일으켰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줄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물러나려고 했으나, 미슬라 왕자의 억센 손에 어깨를 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내게서 도망치려고 하지? 그래, 생각나는군. 당신은 사랑을 나눌 때는 때와 장소를 가리는 여자였지. 당신의 남자 친구나 애인들은 언제나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해주던가? 아마 당신 정도의 미인이라면, 항상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었겠지.」
줄리는 왕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저를 괴롭히려고 안달을 하시는 것 같아요.」
줄리는 그의 본심을 알아내려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왕자도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지금은 나도 나 자신의 마음을 모르겠소.」
그는 줄리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그녀의 가는 몸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미풍처럼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줄리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팔을 만진다. 정말 탐스런 근육이었다. 이처럼 남자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해도, 모든 의지와 분별력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줄리는 자신이 테러리스트와 한패라고 비난받은 것도, 그리고 취재를 하러 이곳에 왔다는 것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의 팔에 안겨 있으면 황홀하고 따뜻한 바다 속을 천천히 여행하는 신비스러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줄리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몸이 떨렸다. 연꽃이 태양을 향하듯, 그녀는 그를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줄리는 자신이 그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그도 자신에게 이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유성처럼 전신을 치달았다.
왕자의 손은 줄리의 등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줄리의 머릿속은 욕망으로 가득 찼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처럼 자신을 어떤 한 사람에게 바치고 싶다고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반쯤 벌리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서 작은 비명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자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머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과 서로 사랑했는지는 지금은 문제가 아냐.」
줄리는 그의 가슴에서 격렬하게 뛰는 고동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고동 소리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그런 문제를 잊어버리자구. 테러리스트의 문제도. 이 순간은 당신과 나만의 것이야. 세상 만사를 잊고, 이 기쁨에 몸을 맡겨 보지 않겠소?」
줄리는 그에게 있어 자신은 한낱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에게 접근한 자신의 동기가 불순한 것이었고, 자신이 상대에게 스파이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왕자와는 직무상의 교제에만 그쳐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모두 부질없는 잠꼬대처럼 느껴졌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듯이 감정을 억제하고 있던 마지막 방파제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갔다...
「안돼요!」
줄리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입술이 그의 가슴에 밀착되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사향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줄리, 욕망을 쫓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거야. 서로의 욕망을 채워 보는 게 어떨까?」
왕자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감미로웠다. 줄리는 말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무실에 딸려 있는 조그만 방으로 데려갔다.
「자이, 누구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제발 손을 놓아주세요.」
줄리는 왕자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는 줄리의 어깨를 잡은 채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마침내 어깨를 움츠리며 손을 놓았다. 줄리는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쪽 발의 샌들이 벗겨지려고 해서 줄리는 몸을 구부리고 샌들을 고쳐 신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갑자기 샌들을 고쳐 신던 손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검은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의 절망의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줄리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지나자, 왕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엄하고 남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얼굴로 변했다.
「나를 좀 보라구, 줄리.」
그의 시선이 줄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의 눈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의 눈에서 그런 마음을 읽었을 때, 줄리의 몸에는 충격이 지나갔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말하지 않지만, 당신에게 있어 제가 하찮은 존재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저를 적을 공격할 때의 마지막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겠죠?
이런 생각을 하자 줄리의 가슴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 주었던 상냥함은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여유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그는 내가 이곳에 찾아온 까닭을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갑자기 생각에서 깨어난 줄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의 감정에 배반당한 듯한, 그리고 혼자 외롭게 남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줄리는 왕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줄리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얼굴 가득 만족한 듯한 미소를 머금는다. 왕자와, 그의 시선 앞에 완전히 마비된 줄리는 자신들의 세계에 깊이 빠져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자이! 줄리?」
미슬라 부인이 외쳤다.
「아주 멋있는 생각이 떠올랐어!」
두 사람의 시선은 정말 열렬한 애인들처럼 서로 얽혀 떨어질 줄 몰랐다. 줄리는 마음의 동요가 얼굴에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부인 쪽을 바라보았다.
「멋있는 생각이라니, 무슨 일인가요, 어머니?」
왕자는 겉으로 아주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며 책상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줄리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파티지 뭐겠니, 자이! 무도회를 열려고 한단다. 정말 멋있는 축하 행사가 될 거야. 그리고 온 시내의 화제가 되겠지. 너의 아버님과 내가 옛날에 자주 열었던 무도회 같은 것 말이다.」
「파티라구요? 무슨 파티죠?」
「그야 물론 줄리를 위한 파티지. 주인공은 줄리니까.」
「줄리는 그런 대접을 받을 권리가 없을 텐데.」
왕자의 목소리는 워낙 낮아, 줄리에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후 2주일은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미슬라 부인과 프리야는 무도회 준비로 궁전 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법석을 떨었다. 파티를 연다는 것을 핑계로, 두 사람은 가구와 옷 등을 잔뜩 사들였다. 특히 프리야는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까지 했다.
줄리는 낮에는 될 수 있는 한 궁전에서 떨어져 있도록 했다.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잡념을 없애고 싶었다. 자신의 문제도,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특히 자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줄리는 잠을 자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은 테러리스트에 관한 조사를 하며 보냈다. 그녀의 하루는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영문판 신문과 잡지를 훑어보는 일로 시작된다. 소련을 포함한 모든 대사관을 방문했고, 그러다 보니 대사관원들과도 친해졌다.
그리고 정부관계의 서류와 정치 연설의 원고를 열심히 읽었다. 수첩은 정부 고관, 관리, 비즈니스맨, 지식인, 대학 교수, 각 정치 단체의 대표자와의 약속 메모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택시 운전수, 상점주인, 걸인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줄리는 다른 해외 특파원과 마찬가지로, AP와 UPI의 대표자나 인도에 특파원을 상주시키고 있는 대신문사의 기자들을 찾아갔다.
인도에 온 진짜 목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최소한 델리의 상황을 취재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 지도자의 회의가 언제 어디서 열린다는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내의 벽이나 건물에 붙어 있는 벽보나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로 써 있는 너덜너덜한 정치 포스터 등을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빌어 읽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늦게 궁전에 돌아온 줄리는 에 있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지칠 대로 지쳐 쿠션을 베는 것도 귀찮았다. 줄리는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일은 잘 되고 있는 거요?」
줄리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왕자가 소파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들어오실 줄은 몰랐어요.」
줄리의 몸은 갑자기 마비되는 듯했다.
「그렇겠지. 알고 있었더라면 당신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네, 그랬을 거예요.」
줄리는 일어나 앉으며 탐스런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하지만 이 방에 들어왔다고 저를 나무라시지는 않겠죠 ?」
왕자는 구석에 있는 바로 가서 마실 것을 들고 왔다. 그리고 줄리에게 글라스를 내민다.
「당신에겐 이것이 필요한 것 같군.」
줄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싸늘한 글라스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맞는 말인 것 같군요.」
왕자는 이번에는 자기가 마실 것을 가지고 와, 줄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줄리는 금빛 벨벳 쿠션에 기대어, 버번 위스키에 물을 타서 마셨다.
「다시 한번 묻겠는데, 일은 어떻게 되어가지?」
「성과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줄리는 글라스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단서라도 잡았소?」
「약간은.」
「어떤?」
줄리는 눈을 들었다.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물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주인의 입장에서 마지못해 물으시는 건가요?」
「나는 정말로 알고 싶은 때밖에 묻지 않아.」
왕자는 의자에 기댔다.
「어떤 단서를 잡았지?」
줄리는 취재에서 얻은 정보를 꺼냈다. 뉴델리 경찰은 처음에는 비협조적이었으나, 여러 차례 찾아가는 동안에 태도를 누그러뜨려 취재에 협력해 주게 되었다.
줄리가 인도에 도착하기 며칠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3주일 전 패스포트 위조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이에 대해 철저한 단속을 했는데, 그 성과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압수한 서류 속에는 잘 알려진 아랍인 테러리스트의 위조 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 기자와 만난 것은, 미국식의 아이스크림과 피자를 파는 가게 에서였다.
그는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인도 정부의 반대로 신문에 실리지 못했던 사건에 관한 이 야기를 한밤중이 지날 때까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예를 들면, 뇌물을 받고 소련제 라이플과 폭탄의 밀수를 눈감아 준 관리의 이야기, 그리고 소련의 어떤 외교관이 인도 수상의 초청으로 수도를 방문하게 된 바로 전날에 모종의 범죄 혐의로 체포된 이야기, 그러나 이 사실이 기사화될 경우 소련 대표단 환영 리셉션에 불온한 공기가 감도는 것을 염려한 인도정부가 그 사건에 대한 일체의 보도를 금지한 이야기 등등... 그밖에 보세 창고에서 대량의 라이플이 도난당했지만 지금까지 그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건, 이런 모든 것이 불과 한 달 사이에 일어났다고 했다.
「궁전의 경비원이 그날 밤 나무 밑에서 발견한 라이플이 어쩌면 도난당한 그 총이 아닐까요?」
줄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밖에도 그녀가 입수한 여러 가지 정보 중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왕자에게 차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실마리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줄리의 육감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가까운 시일 안에 북인도에서 테러리스트의 집회가 열린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했다.
왕자는 상대의 이야기를 유도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느새 줄리는 자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날마다 혼자서 골치를 썩이며 말상대도 없는 괴로운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생각도 점점 정리되어 갔다.
「꽤 열심히 일을 했군.」
줄리가 이야기를 마치자, 왕자는 위로하듯 말했다.
「그것이 저의 직업인 걸요. 여러 차례 말했지만요.」
왕자는 미소지었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께서는 시내에 사는 사람들 절반쯤을 무도회에 초대한 모양이야.」
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저를 위한 파티 말인가요?」
「그래, 당신의 환영 파티 말이오.」
「당신은 그런 파티는 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죠?」
왕자는 글라스를 입으로 가지고 가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사과한다면 용서해 주겠소?」
「사과하실 생각인가요?」
「적어도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당신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군.」
왕자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말했다.
「사과를 받고 싶진 않아요. 괜찮아요.」
줄리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마셨어요.」
사실은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대한 왕자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물으면 여러 가지로 오해를 받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줄리는 왕자의 매력에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감정을 마음대로 자제할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으련만. 역시 그와 만나는 기회를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는 등을 돌린 줄리의 팔을 잡았다.
「또 싸움을 시작하자는 건가, 줄리?」
왕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상냥해서 줄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래요.」
그녀는 갑자기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 화끈거렸다. 줄리는 등에 강한 시선을 느끼면서 문으로 향했고 방을 나오면서 살짝 돌아보니, 어깨가 넓은 장신의 왕자는 창가로 가고 있었다.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왜 이처럼 울고 싶은 것일까.


줄리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미슬라 부인이 연다는 무도회를 가슴 설레이며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파티에는 정계와 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 참석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 사람들에게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하룻밤만이라도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유혹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들뜨는 것도 당연하다. 무도회가 있는 날 아침, 프리야가 줄리의 방으로 찾아왔다.
「줄리, 이직 무도회장을 보지 못했죠? 자, 구경시켜 드릴 테니 함께 가요.」
프리야는 줄리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방으로 안내했다.
「눈을 감아요.」
프리야는 열려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줄리가 눈을 감자, 그녀는 줄리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젠 됐어요. 눈을 뜨세요.」
줄리는 거울처럼 잘 닦인 쪽나무로 된 마루 위에 서 있었다. 무척 넓은 방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훌륭한 벽화가 그려진 아치형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앙에 늘어뜨린 샹들리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리스털이 아로새겨져 있었으며, 그것이 천장에 반사되어 현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카네이션을 잔뜩 꽂은 커다란 수반이 5단으로 겹쳐 쌓여져, 방안의 건조한 공기를 촉촉하게 해주었다. 난이며 장미며 백합의 꽃장식이 우아한 기둥과 마호가니 벽에 걸려 있었다. 방의 한쪽에 있는 아치형의 문 반대편에는 리넨으로 덮인 긴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자기와 은제 그릇, 그리고 크리스털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방 같아요!」
줄리는 자신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왕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굉장하죠? 아버님과 어머님은 이 방을 자주 사용했어요. 하지만 제가 장성한 뒤로는 한 번도 무도회를 열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군요.」
줄리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위한 파티라면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쓰라고 오빠가 명령했거든요...」
프리야는 매력적인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자님이? 믿을 수 없는데요.」
줄리는 적이 놀랐으나, 왕자가 빈정대느라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곧 생각을 고쳤다. 프리야는 아직 어리니까 순진하게도 오빠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손님들이 다 모이면.」
기대로 가슴이 부푼 프리야는 오늘 따라 유난히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정말 멋있을 거예요.」
「저는 이런 것이 좋아요. 널찍하고 아무도 없는 곳이.」
줄리가 말했다.
「사람으로 가득 차면 너무 떠들썩하고, 어쩐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줄리, 어떤 옷을 입겠어요?」
프리야가 물었다.
「저는 사리를 새로 샀어요. 황금빛 자수를 가득 놓은 거죠.」
「어머, 깜박 잊었군요. 요즘 계속 바빠서...」
줄리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줄리, 지난번에 산 사리가 있잖아요? 그것을 입으면 정말 멋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그 옷을 입어야 할 모양이군요. 이브닝드레스를 가지고 오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것이 필요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지난번 에서 산 것 중에서 고르기로 하죠. 입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물론, 기꺼이...」
프리야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파티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려야만 해요.」
프리야는 변명하듯 수선스럽게 중얼거리고, 줄리의 시선을 피하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줄리는 프리야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스칸다라가 도와 드릴 거예요. 물론... 저도 갈 수 있으면 도와드리겠지만.」
그날 밤의 저녁식사는 미슬라 부인의 거실에서 하게 됐다. 프리야는 너무 흥분해서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모양인지 줄리와 부인이 채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줄리도 얼마 안 있어 자리를 떴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스칸다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것이 좋을지 모르겠네. 당신의 의견을 말해 줘요.」
줄리는 사리가 있는 침실로 향하면서 말했다.
「마담, 보시죠!」
스칸다라는 침대를 가리켰다. 커다란 흰 리본을 두른 금빛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리본에는 라벤다의 꽃다발이 곁들여져 있었다.
「누가 갖다 놓았을까?」
줄리가 중얼거렸다.
꽃다발치고는 너무 컸다. 더구나 뉴델리에 이런 선물을 보낼 만한 사람은 없지 않은가.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마담. 제가 들어와 보니 벌써 놓여 있었어요. 열어 보시죠. 안에 명함이 들어 있을 테니까요.」
스칸다라가 재촉했다. 꾸러미를 풀어 보았으나 명함은 들어있지 않았다. 얇은 종이를 걷어내자 보석과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손으로 만든 시퐁이었다. 줄리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보았다. 검정에 가까운 감색과 어두운 에메랄드빛 바탕에 여러 가지 색깔의 실로 작은 별을 아로새긴 것처럼 수를 놓은 것이었다.
사리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펼쳐진 열대의 바다를 연상케 했다. 그것을 핑크 빛 침대 커버 위에 펼쳐 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사리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스칸다라가 상자 안에서 줄리에게 꼭 맞는 초리와 슬립, 그리고 은색 샌들을 꺼냈다. 사리를 입어 보다니 꿈만 같았다.
줄리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스칸다라가 줄리의 몸에 사리를 감아주고, 앞에서 주름을 잡듯 가볍게 여몄다. 귀에는 어머니가 남겨 주신 에메랄드 귀걸이를 달았다.
끝으로 라는 향수를 손목과 목 언저리에 약간 뿌리고는 준비를 마쳤다. 30분 후, 줄리는 무도회장의 활짝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
미슬라 부인이 프리야와 함께 오기만 하면 된다. 낮에 보았을 때는 휑하게 넓어 보였으나, 몇 백 명이 들어차 있는 지금은 훨씬 좁아 보였다. 이때 부인이 줄리를 발견하고, 팔찌로 장식한 손을 들어 보였다.
「줄리! 여기예요, 여기! 훌륭하죠?」
황후는 어린애처럼 수다를 떨었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도록 해요.」
얼마 안 있어 줄리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남자들은 입을 모아 그녀를 칭찬했고, 그녀는 더할 수 없는 만족감에 젖었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 덕분에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줄리는 손님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때로는 춤을 추기도 했다. 홀의 반대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을 때, 자이의 검은 머리와 미소짓는 환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위의 남자들보다 머리의 절반은 더 키가 컸다. 유연한 몸매에 꼭 맞는 야회복을 입은 그는 눈부실 정도여서 주위의 비즈니스맨이나 외교관들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그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그룹 쪽으로 걸어갔다.
「코넬 양 아닙니까?」
자이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 옆에 붙임성 있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줄곧 당신을 찾았죠. 함께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줄리는 남자의 팔에 안겨 춤을 추었다.
남자는 춤이 아주 능숙했다. 잠시 후 파트너는 줄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유명인이 되어 있어요.」
남자는 씽긋 웃었다.」
「제가요?」
「그래요. 신문을 읽어보지 않으셨나요? 당신은 신문기자죠? 자신이 취재 대상이 된 기분은 어떻습니까?」
줄리도 며칠 전 신문의 사회면에 실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인도에서 가장 고명한 귀족의 손님인 줄리 코넬을 뉴델리의 사교계에 소개하는 무도회가 열리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해외 특파원이라는 신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생략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강조하면 기사의 흥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칼럼니스트가 일부러 숨긴 듯했다.
줄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경력을 비밀로 해두고 싶었기 때문에 그 기사를 고맙게 생각했다. 줄리는 춤을 추면서 프리야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미슬라 부인과 함께 입구에서 손님을 맞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공주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홀 안으로 소리없이 들어왔다. 홍조 띤 얼굴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약간 취한 듯했다. 프리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리의 주름을 편 다음, 아름답게 땋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나서, 떠들썩한 손님들 속에 섞였다. 파트너는 춤을 추면서도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이기나 한 것처럼 끊임없이 농담을 던졌고, 줄리도 적당히 장단을 맞추면서 대화를 즐겼다.
그러나 마음은 자꾸만 프리야 쪽으로 쏠렸다. 아무래도 프리야의 태도가 이상한 것 같았다.
그처럼 오늘밤의 무도회를 고대했던 프리야가 잠시나마 무도회에서 벗어나 있다니... 어쩐지 이상하다.
뿐만 아니라 사리를 입는 것을 도와 달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왜 그처럼 변명 같은 말을 했을까. 왕녀의 신분이 아니고 보통의 젊은 여성이었다면, 남자친구와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프리야의 경우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코넬 양!」
춤이 끝났을 때 파트너는 진심으로 말했다.
「당신이 인도에 있는 동안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요.」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줄리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파트너는 줄리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줄리가 먼저 실례가 되지 않도록 미소를 띄우면서 남자로부터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왔고 눈을 들어보니 검은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야.」
미슬라 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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