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8)

슬러 작성일 05.06.23 08: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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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줄리는 왕자의 팔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걸치고, 붐비는 댄스플로어로 향했다. 옷을 통해서도 그의 체온이 느껴져, 그의 팔에 닿은 손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몹시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군. 나하고 춤추는 것이 그토록 싫소?」
줄리는 왕자의 목소리가 무척 상냥해서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줄리, 오늘밤은 서로 무기를 버리는 게 어때?」
「어머, 진심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웬일이죠? 여기자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바뀌기라도 했나요?」
「나는 생각을 바꾸는 일은 좀처럼 없소.」
왕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모든 것이 전통에 따라 행해지고 있지. 그 전통에 따른다면, 오늘밤 우리는 얌전하게 있어야 해.」
「왜 그렇죠?」
줄리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이 나라에 휴일이 많은 것은 이런 사교적 모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풀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우린 모두가 축제에 참가하기만 하면 어려운 문제도 자연히 해결된다고 생각하거든. 인간관계를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려는 거지.」
미슬라 왕자는 처음으로 무방비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는 따뜻한 미소를 띄우면서 줄리를 내려다본다.
「그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고 싶지 않소?」
「찬성이에요.」
줄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루 정도 긴장을 푼다는 것은 확실히 서로를 위해 좋을 거예요. 평소에는 직업적 인 신문기자로서 왕자를 대해야 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을 억제해 왔다.」
그러나 오늘밤은 한 여성으로서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한 것 같군.」
그의 검은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오케스트라가 비엔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왕자는 줄리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웬일인지 갑자기 감정이 고조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줄리는 음악이 자신의 그런 감정을 숨겨 주기를 바랐다.
「어떻게 된 거지? 우린 춤을 추고 있는 거야. 잊어버렸소?」
왕자는 줄리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군요.」
줄리는 너무 쉽게 흥분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당신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지.」
줄리는 그의 몸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부드럽게 춤을 출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서서히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안겨 춤을 추게 되었다. 느린 템포의 음악에 감정을 맡기고, 왕자와 함께 같은 리듬을 타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마침내 오케스트라 소리도, 주위의 사람들도,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감정과 감정이 감미롭게 어우러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왕자의 향긋한 체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넓은 가슴이 강렬한 힘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줄리는 고개를 약간 숙여 이마를 그의 넓은 가슴에 가볍게 갖다댔다. 왕자의 유연한 몸이 가늘게 떨렸다. 왕자는 줄리의 허리에 대었던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줄리를 감쌌다.
이렇게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춤을 춘다는 것은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댄스플로어 는 몹시 붐볐으나, 왕자는 줄리에게 조금도 불편을 주지 않고 그녀를 이끌어 나갔다. 두 사람은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빙글빙글 돌았으며, 옆에 있던 사람들은 춤추는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줄리의 어깨에 걸친 얇고 가벼운 실크가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추었다. 오랫동안 일밖에 몰랐던 자신의 생활이 어쩐지 퇴색한 듯이 느껴졌다.
인생이란 이처럼 가슴 설레고 풍요롭고 즐거운 것이었구나.
마침내 새로운 인생이 줄리 앞에 열렸다. 음악과 로맨스로 채색된 밝은 인생이...
왕자는 몸을 구부리듯 하면서 줄리를 내려다보았다.
줄리가 손을 얹고 있는 야외용 예복을 통해서도 왕자의 탄력 있는 몸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 줄리의 몸에 스며들었고 그의 몸에 닿아 있는 부분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따스함이 점차 온몸에 퍼져갔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따스함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고, 온몸을 치닫는 이 강렬한 감각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뜨거운 감정은 점점 고조되었고, 잠자고 있던 감각을 더욱 일깨웠다. 관능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샘물이 넘치면서, 맥박치듯 온몸을 치닫고 있었다.
줄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왕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왕자도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이젠 됐어.」
왕자는 뜨겁게 젖은 입술을 줄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줄리는 느릿느릿한 로맨틱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렇게 춤을 추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뺨을 그의 가슴에 갖다대고 눈을 감았다. 가슴에 넘치는 이 희한하고 멋있는 기분을 지금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추어 때로는 빙글빙글 돌았고, 또 때로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춤을 추었다. 이 사람이 그처럼 냉담하고 빈정대기만 하던 그 왕자일까? 이렇게 춤을 추고 있으니, 깊은 곳에선 그와 하나로 맺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줄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춤을 추었다. 몸도 생각도 마음도 하나였다.
두 사람은 우주가 연주하는 조용한 하나의 음악처럼 끝없는 하모니의 감미로운 진동, 바로 그 자체였다. 왕자는 더욱 힘껏 줄리를 껴안았다. 풀 먹인 빳빳한 셔츠가 줄리의 가슴 부분을 누른다.
「당신은 오늘 정말 아름답소.」
왕자가 속삭였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이 사리를 보내 주신 분은 당신이었죠?」
줄리는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스칸다라도 누가 보내 왔는지 모른 다고 말하더군요. 어머니께서 보내셨나 생각했지만... 정말 고마워요.」
「그 사리는 당신에게 정말 썩 잘 어울려. 화려하고, 불꽃처럼 빛나고, 그리고 신비해.」
왕자의 목소리는 갑자기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줄리의 불룩한 가슴 부분이 그녀의 의사와는 반대로 단단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는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가슴을 응시하다가 마침내 시선을 입술로 옮겼다.
「지금의 당신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소.」
다시 검은 눈동자가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내 마음이 당신의 입술에 얼마나 쏠려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당신의 그 입술, 나를 황홀하게 하는 당신의 희고 부드러운 피부. 당신을 손에 넣자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이곳에 당신과 내가 단둘이 있다면,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랑스런 줄리, 정말 당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왕자의 속삭임은 줄리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목안에서는 신음소리 같은 것이 새어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빨려들 듯 그에게 몸을 기댔다. 왕자는 곧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녀의 가는 몸을 힘껏 껴안았다. 줄리의 마음은 심하게 흔들렸다. 이젠 넓은 무도회장도, 주위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오직 줄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힘껏 껴안고 있는 갈색 피부의 남자와 멀리서 들리는 로맨틱한 음악 소리뿐이었다.
「부탁이에요, 무슨 말씀이든 좀 해보세요!」
줄리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왕자는 상냥함과 노골적인 정열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깊이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줄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자기가 줄리를 얼마나 갖고 싶어하는지를. 줄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온몸이 화끈거렸고, 그의 입술이 실제로 닿은 것처럼 잠자고 있던 모든 신경이 눈을 떴다.
화끈거리는 감각은 점점 넓게 번지면서, 마침내 거친 파도가 되어 줄리의 전신을 치달았다. 그의 말은 격렬하고 열렬한 입맞춤과도 같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친밀감이 가득 담겨 있어, 마치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그는 줄리의 입술에 거의 닿을 듯한 거리에 입을 가지고 와 속삭였다.
「당신에겐 정말 신비한 매력이 있어. 우리 나라의 전설에 영주 크리슈나를 사랑한 고피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지금 그 고피들과 같은 심정이오.」
「그 얘기를 들려주세요.」
줄리는 그의 몸에 감도는 따뜻한 향기를 맡으면서 속삭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밤하늘에 뿌려진 다채로운 별들을 바라보는 듯 행복으로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주일 동안, 그를 무시하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욕구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줄리였다.
그러나 그도 또한 줄리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기뻤다.
「고피들은 크리슈나의 시녀이자 아내였지.」
왕자는 눈에 애정을 듬뿍 담고 줄리를 내려다본다.
「어느 날 강가에 모인 고피들은 크리슈나를 불러내 크리슈나의 희한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고피들의 몸을 하나로 해달라고 부탁했어. 자기를 사모하는 고피들 중의 어느 하나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크리슈나는 자신의 몸을 여러 개로 나누어 모든 고피들에게 사랑을 주려고 했지. 크리슈나가 나타낸 영원히 변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누구의 마음속에나 다 있는 거야. 크리슈나야말로 여성에게 있어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줄리,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내게 있어 모든 것이야.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다른 여성은 하나도 필요없소.」
줄리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처럼 매력적인 왕자의 사랑을 받다니!
몸 한구석에서 불이 붙는 듯했고, 그 불은 곧 전신으로 퍼져갔다. 행복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속이 비치는 시퐁 사리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탄탄한 다리가 줄리에게 닿아 있었다. 줄리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격렬하고 황홀한 감각의 바다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그리고 왕자의 정열이 점점 불타 오르고 있음을 느낀 줄리는 그에게 힘껏 안기고 싶은, 그의 억센 힘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왕자가 무도회장에 있는 많은 아치형의 문들 중 하나를 빠져나가 옆에 있는 좁은 방으로 줄리를 이끌었으나 줄리는 그런 사실조차 희미하게밖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안은 그지없이 조용했다. 그것은 줄리에게 왕자와 자기가 단둘이 있다는 것을 더욱 새삼스럽게 느끼게 했다.
왕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촛불만으로 밝혀진 방의 한쪽 구석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왕자는 그녀를 힘껏 껴안은 채, 그쪽으로 향했다. 줄리는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져, 상대의 몸이 자신의 몸에 조금만 닿아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팔안에서 떨고 있었다.
「자이...」
줄리는 그의 상의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을 어떻게 끝내야지?」
왕자는 줄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그의 가슴에 귀를 바싹 대고 있는 줄리에게, 그의 격렬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왕자는 몸을 구부려 줄리의 귀에 입술을 맞추었다.
「하느님조차 우리를 시샘하지 않을까?」
왕자는 줄리의 턱을 손으로 떠받치며 얼굴을 들게 했다. 그녀의 입술은 반쯤 열려 있었다. 왕자의 검은 눈동자는 고혹적인 그녀의 입술을 음미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줄리는 눈을 감았다.
예상했던 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바람처럼 살짝 스칠 뿐이었다.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숨을 멈춘 듯 그의 가슴이 부풀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몸은 어느새 왕자의 팔에 안긴 채 들어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왕자는 줄리를 움푹하게 팬 벽에 밀어붙이듯 세우고 나서,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이때 줄리도 비로소 무슨 소리를 들었다. 왕자는 이미 그 소리를 들은 듯했다. 누군가가 부드러운 풀밭 위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줄리는 숨을 죽였다. 귀에서는 심장의 고동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왕자는 줄리를 보호하는 자세로 밖의 상황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겨우 3O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창문은 어른이 몸을 구부리지 않고도 나갈 수 있을 만큼 커서, 쾌적한 밤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오고 있었다. 이 창문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왕자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커다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어깨에 홀스터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는 너무나도 놀랐다. 자기 집에서 열고 있는 무도회인데도 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다니, 이 사람의 인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왕자는 벽에 켜져 있는 세 개의 촛불을 손으로 껐다. 좁은 방안은 금세 캄캄해졌고, 지금은 아치형의 복도를 통해 비쳐드는 무도회장의 불빛이 쪽나무로 된 마루 바닥에 반원형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왕자는 몸을 구부려 신을 벗었다. 그리고 맨발로 열려 있는 창 쪽으로 다가갔다. 유연한 몸이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줄리는 왕자의 모습을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목 언저리에서 맥박이 격렬하게 뛰었다. 다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바로 창 가까운 곳인 듯했다.
줄리는 왕자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장갑을 낀 손이 창틀의 아래를 잡았다. 왕자가 있는 곳에서 10Cm도 안되는 곳에 직경 20cm,길이 40cm가량의 원통형 꾸러미가 나타났다. 검은 장갑을 긴 손이 잽싸게 꾸러미를 창문을 통해 들여놓자, 그것은 구르기 시작했다. 원통형의 커다란 꾸러미는 무도회장으로 이어지는 아치형의 복도 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검은 손은 곧 사라졌다. 뒤이어 사람의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것도 금새 멀리 사라졌다. 이때 왕자는 이미 그 원통형 꾸러미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켜줘.」
왕자의 목소리가 침착해, 줄리는 가까스로 마비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둘러 문 쪽으로 간 그녀는 땀이 밴 손으로 스위치를 눌렀다.
「됐어!」
왕자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마루 바닥에 앉아 꾸러미를 자세히 살폈다.
「그놈을 놓친 것은 애석한 일이야.」
왕자는 고개를 돌려 열려 있는 창문 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놈의 도망가는 태도로 봐서 그놈이 남기고 간 도화선은 매우 짧은 것 같아.」
왕자는 바닥에 놓았던 권총을 집어들고 신을 신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줄리에게 다가왔으나, 줄리는 그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는 원통형의 꾸러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럼 이것은 폭탄인가요?」
줄리는 그렇게 물었으나, 워낙 놀랐던 뒤라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수제 폭탄이지. 이대로 댄스플로어까지 굴러갔다면 무도회장을 완전히 파괴할 만한 위력이 있는 거요. 이것을 만든 놈은 누군가가 이것을 발견해도 폭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없도록 많은 고심을 했겠지.」
「괜찮을까요?」
「두고 보자구.」
왕자는 다시 꾸러미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한쪽 끝을 손으로 잡고 살피다가 마침내 줄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330초 남았어 50초만에 폭발하도록 만든 모양이군. 이것이 만약 복도를 굴러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다면... 그러니까 고작해야 5초밖에 남지 않도록 계산된 것이지. 설혹 폭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도록.」
「이 무도회장엔 널리 알려진 저명한 분들이 많이 오셨잖아요...」
줄리의 목소리는 자꾸만 속으로 기어들었다.
만약 자이와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테러리스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지.」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놈들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이것을 던진 놈은 어떻게 경비원에게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왔을까? 오늘밤은 특별히 훈련된 경비원을 배치했는데.」
왕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경비를 재점검해 봐야 할 모양이군.」
「폭탄에서 신관을 제거하는 방법을 어떻게 아셨죠?」
줄리가 물었다.
「이쪽으로 와, 보여 주지.」
왕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줄리는 그를 따라갔다.
「사실 이런 것을 알아두면 도움이 되지.」
그러나 줄리는 전혀 미소를 지을 기분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은 어떤 농담을 들어도 웃음이 나을 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슬라 왕자라는 사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생사의 기로에 서본 경험이 없는 줄리로서는 좀처럼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이것 보라구.」
왕자는 줄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폭탄의 신관은 전기로 조작되는 거야. 두 개의 가는 선이 이 회중시계의 바늘에 각각 장치되어 있거든.」
「보통의 회중시계인가요?」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테러리스트들의 수법이야. 가까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하지. 신관을 떼어내기 위해, 내가 방금 바늘 하나를 부러뜨린 거야.」
「폭탄을 던진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요?」
줄리는 열려 있는 창문 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냐, 괜찮을 거야.」
왕자는 줄리를 안심시켰다.
「지금쯤 그 놈은 폭탄이 발견되어 신관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경비원이 자기를 뒤쫓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아직 이 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말이지. 사실은 범인을 내 손으로 잡고 싶었어. 범인을 쫓는 동안에 폭발했다간 큰일이어서 쫓아가지 못한 것뿐이오.」
「폭발했더라면 무도회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줄리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서 춤을 추는 무도회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야 이 안에 어떤 폭약이 장전되었나에 달렸지.」
왕자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원통 한쪽 면의 뚜껑을 비틀어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나직하게 정의감과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폭발했다면 오늘 이곳에 와 있는 3, 4백 명의 손님 가운데 2백여 명이 사망이나 중경상을 입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테지.」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검은 눈동자로 줄리의 창백해진 얼굴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자, 나를 따라와. 여기서 나가자구.」
왕자는 상냥하게 말하고 줄리를 끌어안듯 감싸고 좁은 방을 가로질렀다. 줄리는 말없이 그에게 몸을 맡겼다. 허리에서 모든 힘이 빠지는 듯했다. 왕자는 줄리가 떨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자는 줄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옆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줄리는 믿음직한 그의 팔에 허리를 안겨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려고 했다. 방망이질을 하듯 뛰던 심장의 고동도 차츰 가라앉으면서 가까스로 몸에 힘이 돌아오는 듯했다.
「괜찮소?」
잠시 그녀를 살펴보던 왕자가 물었다. 줄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왕자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문을 밀었다. 그곳은 맛있어 보이는 오르되브르를 차려놓은 테이블이 있는 좁고 긴 방이었다. 촛대에는 수백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넓은 아치형의 문이 무도회장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기운을 차릴 만한 것을 갖다 줄 테니까.」
왕자는 미소를 머금고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엄격한 독재자같은 표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까지는 그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해도 매사가 잘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줄리는 키가 큰 왕자의 모습이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도록 벽걸이 뒤로 몸을 숨겼다. 왕자는 얼마 안 있어 나이 지긋한 남자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줄리도 그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수상의 보좌관으로 일하는 다완이다.
「미스 코넬, 다완 씨를 소개하지. 다완 씨, 이쪽은 미스 코넬입니다.」
「처음 뵙겠어요.」
줄리는 미소를 띄우면서 손을 내밀었다. 첫눈에 이 나이 지긋한 외교관이 마음에 들었다. 다완은 은발에 귀족적인 용모를 한 마르고 키가 큰 사람이었다. 다완은 옛날식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미슬라 왕자의 불타는 듯한 눈이 호랑이의 눈을 연상케 한다면, 이 남자의 눈은 독수리의 눈을 연상케 했다. 줄리를 보는 그의 눈은 날카롭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우리 둘만 있게 해주시겠소, 자이?」
다완이 말했다.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제일 나이 많은 저를 데려오셨으니, 이젠 이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분은 안전할 겁니다. 안심하시고 호스트로서의 책임을 다하십시오. 하지만 왕자께서는 남자의 선택을 잘못하셨는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왕자보다 20살밖에 더 먹지 않았거든요. 왕자님의 눈앞에서 이 아름다운 분을 훔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죠.」
다완은 아버지가 딸을 보는 듯한 눈으로 줄리에게 미소지었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었다.
「미스 코넬을 누군가에게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왕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맛있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집어 줄리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그걸 내게 주시죠.」
나이 지긋한 외교관은 큰소리로 말하면서 접시를 받아들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집어서 먹여 드릴 테니까요. 자, 당신은 어서 가보시죠, 미슬라 왕자님.」
「그러기를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 경비 주임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실례하1겠습니다.」
왕자는 다완에게 웃어보이고, 줄리에게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얽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유머와 그녀에 대한 이해심, 그리고 욕망이 담겨 있었다.
그의 그윽한 눈동자에는 분명한 언어가 있었다.
폭탄 사건이 있기 전에 어두컴컴한 방에서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던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야. 그리고 그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연기되었을 뿐이야. 마침내 왕자는 아치형의 문을 지나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완벽한 호스트가 되어 주위 사람들을 접대했다.
자신감에 넘치는 말투, 당당한 태도, 줄리는 그의 믿음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매력 넘치는 일거일동에 사로잡혔다. 무심코 나이 지긋한 외교관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이해심 담긴 눈으로 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기회에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다완 씨.」
줄리가 말을 꺼냈다.
「저는 뉴욕 신문의 해외 특파원이에요. 인도에 있는 동안 꼭 만나뵙고 국제 테러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네, 미슬라 왕자한테서 들었습니다.」
다완이 대답했다.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다완이 줄리의 손을 잡았다.」
「왕자님이 그러셨어요?」
줄리에게는 몹시 뜻밖이었다.
「그래요. 이번에 꼭 만나 달라고 해서 이 파티에 참석한 겁니다. 테러리즘에 관한 정보라면 당신이 틀림없이 흥미를 보일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요.」
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주일 동안 내내 다완과 같은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고 면회신청을 했었으나 모조리 거절당했었다.
「북인도의 어디선가 열릴 예정인 테러리스트 지도자들의 모임에 관해서 알고 계시나요?」
다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약간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빈틈없이 상대를 살피는 눈이었다.
「미슬라 왕자가 당신의 조사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갖고 있는 정보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죠. 그런데 이렇게 멋있는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제인 것 같군요.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죠.」
다완은 넓은 복도를 지나, 수를 놓은 천이 걸쳐져 있는 소파로 줄리를 안내했다. 무도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실크와 새틴을 번쩍이면서 홀을 드나들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내용이 들릴 염려는 없을 듯했다.
「이곳에 있으니 기분이 매우 좋군요.」
소파에 나란히 앉자 다완이 말했다.」
「저 문 앞에 서 있는 젊은 남자가 아까부터 선망의 눈으로 당신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노외교관이 고개를 약간 끄덕이면서 말했다. 줄리가 그쪽을 바라보니, 무척 핸섬하고 머리가 갈색인 한 남자가 다완이 말한 대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알겠습니까?」
노외교관은 줄리를 감싸듯 하면서 말했다.
「젊은 남자에게는 저렇게 멋있는 젊음이 있고, 늙은이에겐 정보가 있죠. 하지만 당신은 저널리스트니까, 아마 정보 쪽에 더 흥미를 갖고 있을 거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친구를 좀더 기다리게 해야겠군요.」
「어떤 정보를 갖고 계신가요?」
줄리는 열을 내며 물었다. 다완의 목소리는 점점 진지해졌다.
「당신의 생각은 이 근처에서 테러리스트들이 국제적 규모의 지도자 회의를 열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암살자를 한둘 교환함으로써 인도에 테러 조직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던가요 ?」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줄리는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여러 가지로 조사한 결과 얻은 답은 그런 것이었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다완은 단언하듯 말했다.
「당신이든 나든, 아니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좋아요. 누군가가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크죠.」
「그건 무슨 뜻이죠?」
줄리는 다완이 틀림없이 이번 모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소도 진짜 목적도. 그 정보가 정부 소식통에서 나온 것이라면...
「확실히 국제 규모의 테러리스트 모임이 있죠. 하지만 그들이 모이는 이유는 당신이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추진하고 있는 광역 테러의 공격 태세를 정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 협정을 맺기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그 협정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각국의 테러리스트 그룹이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줄리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통의 목적으로 서로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다.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줄리가 인터뷰한 미국 정부의 테러리스트 문제 담당자는 세계적 규모의 테러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세계의 토대를 서서히 파괴하려는 조직적인 시도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회의는 다음의 맹공격을 위한 조직을 만들려고 열리는 것일까?
「그들의 파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합법적인 민주 정부 사이에도 의견 조정이 어려운 것처럼, 그들끼리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다완이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며 말했다.
「각국 테러 조직의 리더들이 인도에 찾아오고, 이 나라에서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나요?」
「운이 좋다고나 할까, 직책상 그런 정보가 자연히 들어오게 되어 있죠.」
그는 어색한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다.
「우리 나라 정부는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테러리스트의 리더와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거든요.」
다완은 여기서 말을 중단했다.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테러리스트 그룹인 의 지도자를 뉴델리 공항에 진치고 있던 정보부원이 오늘 아침 목격했죠. 그 사람을 잡아 심문했더니 그 인물은 아까 내가 설명했던 이유로 인도에 찾아왔다고 고백했어요. 회의의 장소와 시간은 나중에 연락받기로 되어 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이탈리아 정부가 그 인물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요청해 왔기 때문에 그 인물은 곧 이탈리아 정부의 보호 관리를 받게돼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되었죠. 아마 지금쯤 그 인물은 수주일 전에 로마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에 대해 심문을 받고 있을 겁니다.」
지난번 폭파되었던 로마역의 광경! 눈앞이 캄캄했던 당시의 일을 생각한 줄리는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산더미 같던 시체...
줄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완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스 코넬, 당연한 일이지만...」
다완은 상대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줄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만약 이 정보가 보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뉴스소스가 나라는 것을 밝히겠죠? 이라거나 이라고 쓰면 어떨까요?」
줄리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렇게 쓰는 것이 좋겠군요.」
다완도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눈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미슬라 왕자나 나나, 이 파괴 단체가 자신들의 행동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나중에 자신들의 계획이 밖으로 누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로가 동료를 의심하게 될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저희들끼리 의심하게 해서 조직을 내부로부터 분열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 결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거든요. 자, 이젠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겠소. 저 젊은이를 좀 보세요. 나 같은 늙은이는 당신과 같은 파티의 꽃을 오랫동안 독점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노병은 사라질 뿐...」
다완은 줄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윽고 쑥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청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이구, 브륀넨 씨!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스 코넬, 이 분은 서독 대사 보좌관이신 브륀넨 씨입니다. 브륀넨 씨, 단 것은 어떨지요? 코넬 양과 함께 먹으려고 가지고 왔는데, 나이값도 못하고 미녀와의 이야기에 열중해서 그만... 어서 드시죠. 저는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옛친구가 저쪽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웠어요, 다완 씨.」
줄리는 물러가는 노 외교관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원 별말씀을. 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로 연락하십시오.」
노인이 사라지자 한스 브륀넨이 말을 꺼냈다.
「다완 씨는 인도 정부에서도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는 분이죠. 미안합니다. 당신에겐 재미없는 화제인 것 같군요. 그럼 이 맛있게 생긴 과자를 먹어 볼까요? 아무튼 미슬라 왕자의 요리사는 일류라는 평판이죠.」
젊은 남자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머, 오케스트라가 왈츠를 시작한 모양이에요.」
줄리가 명랑하게 말했다.
「함께 추실까요?」
「대단한 영광입니다.」
젊은 독일인은 기쁜 듯이 얼굴을 활짝 펴고 접시를 소파 위에 놓았다.
줄리가 브륀넨과 함께 무도회장으로 돌아간 것은 이미 한밤중이 지나서였는데도, 무도회장은 아직도 커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 독일인은 빼어난 춤솜씨를 갖고 있었다. 그는 줄리를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다루면서 우아한 몸짓으로 그녀를 리드했다. 춤에 몰두하고 있는 탓인지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줄리는 파트너가 말이 없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완이 알려준 정보는 테러리스트의 지도자 회의에 관한 최초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붉은 여단의 지도자가 인도에서 잡혔다는 것은 대사건이며, 그것은 테러리스트의 네트워크가 이미 국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완의 이야기는 재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의 정부나, 정부란 것은 특파원에게 때론 거짓 정보를 흘릴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오늘 공황에서 테러리스트가 잡혔다는 사실 여부는 그다지 확인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줄리는 아침에 이미 본사에 가장 먼저 보내야 할 기사를 머릿속에서 정리해 두었다. 줄리는 다완이 들려준 이야기의 다른 면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다완을 소개해 준 사람은 왕자였다.
노외교관의 말에 의하면, 왕자는 내게 터러리스트 체포에 관한 독점 기사를 쓰게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왕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자이는 왜 내 일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물론 사람 하나 소개해 주었다고 해서 전면적인 지원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소개받은 사람은 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장 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줄리는 파트너가 헛기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미안해요. 음악에만 열중하고 있어서...」
줄리는 당황하면서 말했다.
「뭐라고 말씀하셨던가요?」
「아까부터 노르웨이 대사가 이쪽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대사를 만나 보셨습니까?」
「물론이에요.」
줄리는 차례로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댄스플로어를 누볐다. 머릿속에선 기사의 윤곽이 잡혀갔고 적당히 마신 샴페인 덕분에 기분도 좋았다. 줄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파트너와 춤을 즐겼다.
가끔 손님들에게 둘러싸인 왕자의 모습이 보였으나, 그는 다시는 줄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줄리는 왕자와 춤을 추었을 때가 무도회의 하일라이트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 이외의 파트너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멋있어도, 자신을 감은 그들의 팔이 아무리 다정스러워도, 그리고 그들의 눈에 아무리 희망의 빛이 담겨 있어도, 왕자의 거만하기조차 한 포옹에서 느껴지는 신비하고 자극적인 무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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