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9)

슬러 작성일 05.06.23 08: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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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무도회장의 손님들이 뜸해졌고, 5시 가까이 되자 오케스트라도 마침내 악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줄리는 파티가 파하기 직전까지 춤을 추었고, 손님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미슬라 부인 옆에 나란히 서서 마지막 손님까지 전송했다.
프리야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찾아보았으나 공주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밤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프리야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 애는 벌써 위에 올라가 쉬고 있어요. 나도 이젠 올라가려고 해요. 아마 점심때까지 일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새벽까지 자지 않고 있었는데도 부인은 어쩌면 저렇게 행복하고 만족해 보일까?
결혼한 뒤로 아침까지 계속되는 파티를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일 거라고 줄리는 생각했다.
「정말 멋있는 무도회였어요, 미슬라 부인.」
줄리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런 파티는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참석한 파티는 간밤의 파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기쁘군요. 궁전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이 무도회장을 아직도 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뻐요. 당신이 여기 머무는 동안, 앞으로도 자주 무도회를 열고 싶군요.」
부인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저를 위해 파티를 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줄리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파티를 좋아하신다면 몇 번이라도 부탁드리고 싶어요.」
줄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부인과 함께 넓은 계단 쪽으로 향했다.
「부인께서는 파티의 안주인 역할을 정말 훌륭하게 잘 해내시더군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요.」
부인은 즐거운 듯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나는 파티의 준비를 하거나 지휘하는 일을 무척 좋아하죠.」
부인은 우아하게 차려진 음식이 테이블에 남아 있고, 종이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는 무도회장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서글픈 듯이 말했다.
「하지만 간밤에 오신 분들은 내가 아니라 자이를 만나러 왔죠. 몇몇 나이 든 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당신네 나랏말로 뭐라 하더라...」
「비위를 맞춰 주는 사람 말인가요?」
「그래, 그래요. 무도회에서는 흔히 로맨스가 싹트잖아요? 내 나이가 되어도 로맨스에 대한 기분은 없어지지 않거든요. 정말 우습죠. 그럼 편히 쉬어요, 줄리.」
부인은 줄리를 가볍게 안아 주고 돌아섰다.
「안녕히 주무세요.」
줄리는 부인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전송할 뿐, 뒤를 따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잠잘 시간은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파티의 여운이 남아 마음이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잠자리에 들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텅 빈 무도회장으로 돌아가 보니, 넓은 홀은 조금 전까지의 북적거림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줄리는 반짝이는 종이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는 댄스플로어를 발끝으로 걸어가다가, 허리를 굽혀 신을 벗고 맨발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종이 부스러기가 없는 축제는 진짜 축제라고 할 수 없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왕자가 아치형의 문에 가볍게 기댄 채 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티에서 입고 있던 검은 상의를 지금은 입고 있지 않았다. 흰 셔츠 차림의 왕자는 평소보다 어깨가 넓어 보였다.
「그래요, 종이 부스러기는 파티를 화려하게 하거든요.」
줄리는 가지각색의 종이 부스러기를 손으로 들어올리면서 일어섰다. 종이 부스러기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 떨어졌고, 마지막까지 남은 것을 줄리는 공중에 뿌렸다.
「조금도 피로하지 않은 것 같군요!」
줄리는 다가오는 왕자를 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부질없는 생활에 어울리는 모양이야.」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간밤에 춤을 추는 당신을 보니, 당신도 피로를 모르는 사람 같더군.」
「전에 밤을 새워 춤을 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설마 제가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사리용 신이 낮아 정말 다행이었어요. 하이힐이었다면 도저히 밤새워 춤을 추지는 못했을 거예요.」
두 사람은 홀의 한 가운데서 서로 마주보았다. 줄리는 왕자의 얼굴을 관찰하면서 혹시 자신을 빈정대는 것이 아닌가 유심히 살폈으나,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것처럼 서로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왕자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불길 같은 것을 느낀 줄리는 그 불타는 눈동자 속에 빨려드는 듯했다.
「잠시 테라스를 걷지 않겠소?」
왕자는 두 사람 사이에 비단처럼 드리워진 침묵의 베일을 걷어내듯 말했다.
「얼마 안 있어 날이 새겠군.」
왕자는 줄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아직도 잔치의 여운이 남아 있는 넓은 홀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 전까지 그처럼 많은 사람이 붐볐던 것을 생각하니, 지금 이렇게 단둘이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 훌륭한 무도회였어요.」
줄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왕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사나이와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 강철처럼 억센 손아귀에 잡혀 있으면, 왜 손바닥에 전기가 통하는 것일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기쁘군.」
왕자는 솔직하게 기쁨을 나타냈다.
「당신은 훌륭한 친구분들이 많아 행복하시겠어요.」
왕자는 놀란 표정을 짓고 줄리를 내려다본다.
「친구라고? 당신은 정말 순진하군, 줄리.」
왕자는 입끝을 약간 올리며 빈정대듯 웃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모두 당신 친구 아니에요?」
「아는 사람을 전부 친구라고 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사업상의 지기, 정치가, 상류 계급에 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모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야.」
「하지만 다완 씨만은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줄리는 다소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왕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다완 씨는 중요한 친구지. 그리고 간밤에 왔던 낯익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의 옛친구들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해 왔던 사람들뿐인 것 같군.」
왕자는 여기서 말을 중단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줄 리, 당신의 양친께서는 뭘하고 계시지? 당신은 내게 가족에 대해서 전혀 말해 주지 않았소.」
줄리는 뜻밖의 질문에 놀랐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갓난애 때, 소형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제가 12살 때 돌아가셨어요. 저는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이모님 댁에서 신세를 졌죠.」
「그랬었군. 안됐는걸, 양친을 일찍 잃은 것도 안됐지만 형제가 없었다는 것이 더욱 안됐군.」
줄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이렇게 살고 보니, 별로 안 될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오직 혼자서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면서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역시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는 때가 자주 있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푸념할 데도 없거든요. 어머, 제가 주착없이 수다를 떤 모양이군요. 당신에게 이런 이야길 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줄리의 이야기를 들려 줘서 기쁘군.」
두 사람은 테라스까지 왔다. 왕자는 줄리의 허리에 팔을 감고, 대리석으로 된 난간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약간 떨어져 난간에 나란히 기대고 있었으나, 서로가 상대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동녘 하늘이 밝아지면서, 수목들의 잎과 꽃들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머금은 장중한 침묵이 주위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침내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새들은 노래할 때를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어.」
왕자가 말했다.
「저것 봐,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어. 하늘이 해돋이를 예고하고 있거든...」
왕자는 뚜렷한 실루엣을 그리며 떠오르는 수목 너머 먼 지평선을 가리켰다. 핑크 빛을 띤 한 줄기의 빛이 나타났다. 검게 보이는 수목들 가지 사이로 장미빛 긴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줄리는 장엄한 자연의 변화에 압도되어 중얼거렸다. 왕자는 줄리를 돌아보며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당신은 더욱 아름답지.」
줄리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에게 안기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몸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춤을 열심히 즐기던데, 우리의 일을 벌써 잊었소?」
왕자의 뜨거운 입김이 귀에 와 닿았다. 억센 팔이 작은 몸을 덥석 감쌌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등을 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줄리도 믿음직한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왕자와 함께 춤추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니, 머릿속에서는 잊었을지 모르지만 온몸을 치닫던 그 감동의 떨림을 몸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키스해 주세요...」
줄리는 자신의 이런 강렬한 갈망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그의 넓은 가슴에 점점 더 매달렸다. 그는 마치 돌로 된 산처럼 느껴졌다.
「줄리?」
왕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왜 자신의 감정에 좀더 솔직하지 못하지? 이처럼 내 품에 안기고 싶어하면 서 왜 그런 감정을 억제하는 거야?」
줄리는 다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함께 일을 해야 하는데, 깊은 관계가 되면 안되잖아요...
줄리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깊은 관계가 되어 버리면, 저널리스트로서의 평형감각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인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왕자의 평가나 의견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신문기자로서 길러온 객관적 안목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리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도저히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팔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줄리는 촉감이 좋은 무명 셔츠 속에 있는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발산하는 사내 냄새가 새벽이 되어 피기 시작하는 꽃의 강렬한 향기와 섞여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왕자의 숨결이 다소 거칠어졌다. 전신을 짜릿하게 하는 두려움과 기쁨이 섞인 야릇한 감각이 줄리의 몸속을 치달았다.
내가 왕자를 이처럼 움직이고 있다니! 어떤 상대에게도 지지 않을 그가, 내 손이 닿기만 해도 떨고 있다니! 그가 내 마음을 격렬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과 같이, 그의 마음도 나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매력에 끌리고 있는 것처럼, 그도 내게 끌리고 있어. 과연 내게도 그런 매력이 있는 것일까?
줄리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 이런 여성다움이 있었다는 사실에 줄리는 놀랐다. 격렬한, 저항할 수 없는 간절한 바람이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몸을 밀어내려고 했던 손이 지금은 그의 목에 감겨 있었다. 그의 숨결은 점점 더 가빠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왔던 억센 손으로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은 밀착되었고, 줄리의 몸은 떨렸다. 간절한 바람은 너무나 강렬해져 마침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고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 때문에 소리치고 싶은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자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일깨우지 못했던 나의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그것이 무엇일까? 일밖에 몰랐던 나의 인생이 그를 만난 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를 알게 된 순간부터 잘 정리된 단조로운 그림 같았던 나의 인생이 여러 가지 색깔로 채색되기 시작한 느낌이다. 그의 강렬한 개성이 그때까지 현실적으로 살아 왔던 나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데려다 주었다. 드라마와 정열로 채색된 세계. 에디가 죽은 후로 내가 나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만들어 낸 직업 여성으로서의 싸늘한 가면을 자이 미슬라 왕자가 여지없이 깨버린 것이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줄리는 그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어 그의 머리를 힘껏 끌어당기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몸은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고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얼굴을 음미하듯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더할 수 없이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그는 두 사람의 사이를 좀더 좁히려는 듯 몸을 더욱 구부렸다. 낮은 신음소리가 줄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작은 비명과도 같았다.
「아, 자이! 전...」
관능이라는 불길에 몸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줄리에겐 자신을 포옹하고 있는 그의 억센 몸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어. 지금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왕자는 줄리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그리고 그런 자세 그대로 테라스를 가로질렀다. 작은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넓은 정원 구석에 좁은 계단이 있었던 모양으로 왕자는 그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다 내려갔을 때, 높은 돌담이 앞을 가로막았다.
줄리는 말없이 뺨을 왕자의 어깨에 찰싹 붙였다. 왕자는 그런 줄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고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좋은 것을 보여 주지. 어렸을 때 아꼈던 나만의 비밀이야.」
왕자의 입술은 줄리의 이마를 가볍게 스쳤다.
「당신의 비밀?」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었지.」
왕자는 낮은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지 않도록 줄리를 보호하면서 온통 덩굴이 얽혀 있는 돌담을 따라 걸어갔다. 왕자의 숨결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겨우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야.」
두 사람은 돌담에 만들어진 묵직한 금속 문 앞에 와 있었다. 그 문에는 대대로 미슬라 왕의 상징이 되어 온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었다. 왕자가 돌담을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을 헤치자, 빗장이 나타났다.
「여기 온 것이 몇 해 만인지.」
왕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쪽에는 무엇이 있죠?」
줄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호기심에 싸여 물었다. 왕자는 빗장을 열고 문을 힘껏 밀었다.
「내 은신처라고나 할까. 비밀의 화원이지.」
왕자는 줄리의 손을 잡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덩굴 식물과 작고 큰 나무들, 그리고 여러 가지 꽃나무들이 강렬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곳을 잊고 있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왕자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미소지었다.
「정원사도 몇 해 동안 돌보지 않은 것 같아.」
「저는 이런 곳이 좋아요. 이곳은 궁전 안에서 형식과 예의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었지.」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옛날에는 혼자서 이곳에 자주 왔었어. 안에서 문을 잠그면,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있을 수 있거든.」
왕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녹슨 자물쇠를 잠갔다.
「자, 이젠 완전히 우리 두 사람 뿐이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지.」
왕자의 낮은 목소리는 무척 흡족한 듯했다. 그는 줄리의 손을 잡고, 장미 덩굴이 달라붙어 있는 작은 전망대로 데리고 갔다. 그 위에는 색은 바랬지만 푹신한 쿠션이 놓여 있는 넓은 대리석 벤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그 벤치 위에 걸터앉았다. 줄리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자이...」
목이 죄는 듯 목소리가 잠겼다.
「전 모르겠어요...」
줄리의 말은 왕자가 퍼붓는 키스 세례 속에 묻혀버렸다. 키스 세례는 그녀의 머리와 눈, 그리고 입술 위로 퍼부어졌다. 그의 입술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전신의 감각은 민감해져 기쁨이 솟았다.
「줄리?」
왕자는 잠겨드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이렇게 되기를 바랐지. 당신은 안 그랬소? 내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기를 당신은 바라지 않았소?」
왕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힘껏 겹쳤다. 격렬한 기쁨이 줄리에게서 두려움을 완전히 몰아낸다.」
이제는 줄리도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줄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뜨거운 환희에 몸을 맡겼다. 기쁨은 점점 더해가고, 이제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그의 입술의 감촉만을 느낄 뿐이었다. 자신이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남의 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던 환희가 점점 고조되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이, 도대체 당신은... 어쩌려는 거예요?」
「당신을 여자다운 여자, 당신이 바라는 여자로 만들어주려고 그러는 거야.」
그의 입술은 줄리의 입술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와 있었다.
「지금의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워, 줄리.」
왕자는 계속 속삭였다. 그는 줄리의 얇은 사리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스칸다라가 정성껏 만들어 준 주름이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투명하고 가벼운 실크는 슬립에서 떨어져나가, 마치 안개처럼 공중에서 하늘거렸다. 다음 순간, 왕자의 손은 사리의 모양을 갖추어 주는 초리에 닿아 있었다. 보드라운 속옷을 통해 속살이 비칠 때 왕자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빛났다.
줄리는 욕망으로 가슴이 아파왔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올렸다. 줄리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지 스스로 자신의 몸을 그에게 가까이 밀착시켰다. 얼마 안 있어 그의 입술이 얇은 속옷 위로 줄리의 가슴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다른 한쪽 가슴에 손을 얹고, 마치 귀중한 보물을 즐기듯 조심스럽게 애무했다.
줄리는 그의 입술이 가슴에 닿자, 아프도록 짜릿한 만족감을 느꼈다.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쾌감이 줄리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자이와 나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마침내 나는 그의 신비한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그의 존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줄리의 의식은 그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용해되어 하나가 되었고, 둘이 협력하여 낳은 감미로운 감정은 바야흐로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었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던 여자를 이렇게 품안에 안을 수 있다니.」
왕자의 눈은 흡족한 듯 웃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 줄리. 당신의 아름다운 몸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왕자는 다시 줄리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쳤다. 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을 때마다 줄리는 숨을 죽이고 몸을 떨었다. 줄리는 유연하면서도 억센 그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그도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몸을 떨고 있었다.
줄리는 자신에게도 그런 힘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스스로 자랑스러워졌다. 줄리는 밀려오는 환희의 물결과 점점 고조되는 정열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왕자는 초리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며 그녀의 불룩한 가슴에 손을 댔다.
그는 마치 부서지기 쉬운 귀중한 물건이라도 다루듯, 정중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시간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눈처럼 흰 가슴과 햇볕에 그을은 손,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은 꿈을 꾸고 있었다. 줄리는 말없이 몸을 떨었다. 저항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멈추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왕자는 줄리의 몸이 불길처럼 뜨거워질 때까지 천천히 애무하고 있었다. 줄리의 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환희의 감정이 한꺼번에 넘쳐흘렀다.
줄리는 왕자의 입술이 자신의 가슴 골짜기에 와 닿았을 때, 그의 머리를 힘껏 끌어안고 맨살에 닿은 그의 까실까실한 볼의 감촉을 즐겼다.
「당신의 몸은 정말 부드럽고 완전해...」
「자이, 자이...」
줄리는 그의 이름이 주는 음감을 즐기면서 되풀이해서 속삭였다. 그에게 자신의 불타는 가슴속을 알리기 위해 더욱 더 몸을 밀착시켰다.
이때 줄리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것, 그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줄리는 그에게 안겨 있으면서 정말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왕자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듬어 사리의 슬립을 풀었다. 줄리는 그가 슬립을 푸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그녀는 늘씬한 자신의 하얀 다리가 드러났을 때,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왕자는 커다란 손을 흰 레이스가 달린 얇은 속옷으로 뻗쳤다. 그리고 천천히 속옷을 벗겼다. 그 손의 움직임은 엄격할 정도로 억제되어 있었다.
줄리는 이처럼 자신의 정열을 억제할 수 있는 이 사람의 속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왕자는 자신의 옷을 벗는 동안에도 줄리의 몸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줄리는 인내심이 강한 그와 보조를 맞추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줄리는 그가 벌거벗은 몸으로 옆에 누웠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완벽한 남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왕자는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억센 팔로 줄리를 힘껏 껴안았고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를 포옹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넘치는 만족감과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이!」
줄리의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가 왕자의 마지막 인내심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우람한 몸무게에 눌려 그녀의 날씬한 몸은 쿠션 속에 잠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대로 있었다.
그의 눈 깊숙이 호랑이의 눈 같은 불길이 있었고 그것은 줄리의 얼굴을 향해 밝게 타올랐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신들이 함께 만든 억누를 수 없는 세계로 뛰어들고 말았다. 두 사람의 영혼은 새로이 눈뜬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었고, 이때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마침내 왕자는 몸을 일으켜 팔꿈치를 짚고 옆으로 누웠다. 줄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함께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줄리는 그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줄리는 가지 말라고 말하듯 그의 우람한 등에 매달렸다.
「이젠 돌아가 봐야 해.」
왕자는 조용히 타일렀다.
「아침 당번이 무도회장을 정돈하러 을 거야.」
「가지 말아요.」
줄리는 하인들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면서 청소하는 소리가 미리부터 들린다는 듯 귀를 막으면서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가지 말이요.」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왕자의 깊은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담겨 있었다. 깊은 바다 속으로 잠겼던 사람이 해면으로 얼굴을 내밀듯, 줄리는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정원의 높은 벽 너머 회색 하늘이 갑자기 밝은 청색을 띠더니 지평선에 걸려 있던 한 줄기 핑크빛 띠가 하늘 전체에 생생한 빛을 뿌린다.
한참 후에 줄리는 옆에 있는 왕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아직도 팔꿈치를 짚고 비스듬히 누운 채, 줄리의 몸을 아쉬운 듯 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에 그의 검은 머리가 반짝였다. 줄리는 지금까지 어느 한 사람을 이처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매력적인 검은 머리의 왕자를 이토록 사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맛본 감미로움은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왕자는 고개를 들어 줄리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 속에 타고 있던 정열의 불길은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즐겁고 흡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잘 왔어, 사랑스런 줄리. 당신은 마치 먼 여행에서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그네처럼 보이는군.」
줄리는 생긋 웃었다.
「어머, 정말 그렇게 보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왕자의 눈이 줄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린 꽤 멀리까지 날아 온 것 같군. 하지만 또 함께 날 수 있지. 자, 나를 따라 와.」
왕자는 몸을 일으켜 벤치에서 발을 내리고 기지개를 켰다. 줄리도 따라 일어섰다.
「어머, 어떻게 해요!」
줄리는 걱정스러운 듯 소리쳤다.
「저는 사리를 어떻게 입는지 모르는 걸요.」
왕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적당히 몸에 감으면 돼.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테라스를 통과할 필요는 없어. 문을 나가서 흰쪽 길을 따라가면 뒤쪽 복도로 들어갈 수 있거든. 그곳엔 하인들이 없을 거야.」
왕자가 일어서자, 갈색의 우람한 몸이 줄리의 눈앞을 가렸다.
「아, 줄리.」
왕자는 격정에 사로잡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계속 단둘이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줄리는 고개를 들어 왕자를 올려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 나는 정말 빠져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품안에서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그 난폭하고도 자유로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나를 믿지 않고 있지 않은가? 나를 테러리스트의 끄나풀로 생각하고 있고, 왕자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데 말이다. 그는 내 역할을 십분 이용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줄리는 마음속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왕자에게 등을 돌렸다.
왕자의 그와 같은 잘못된 의심은 별문제로 치고라도 신문기자로서의 공평한 안목을 버려서는 안된다.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그런 안목을 가질 수가 없다.
「줄리.」
왕자는 줄리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댔다.
「이쪽을 돌아 봐요.」
줄리는 왕자를 돌아보았다.
「왜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아까와는 얼굴이 달라 보이는데.」
줄리는 이제 유쾌한 기분이 될 수는 없었으나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지금의 이런 기분을 앞으로는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자이.」
줄리의 목소리는 더욱 심각해졌다.
「우린 이렇게 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의 일을 위해서도, 당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도 공평한 일이 아니에요.」
「공평하지 않다니?」
왕자의 검은 눈동자는 줄리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저를 믿고 계신가요?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보시죠. 정말 저를 믿고 계신지...」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의 눈에는 고뇌의 빛이 어려 있었다. 줄리는 그가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얇은 사리를 집어 몸에 감았다.
그리고 장미 덩굴이 얽혀 있는 전망대를 뛰어내려 문의 빗장을 벗겼다. 잠시 후, 줄리는 뒤쪽의 복도를 달려 자기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맨발에 와 닿는 대리석 바닥의 싸늘한 감촉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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