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는 네다지 사부하슈 거리를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줄리는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석조 건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인도의 유명한 유적지 는 무갈조(祖) 제 5대 황제 샤 자한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아그라에 대리석 영묘(靈廟) 타지마할을 완성한 1600년대에 세운 것이다. 근대 건축에 대 한 지식이 없던 시대에 이만한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줄리는 일에 대한 생각은 깡그리 잊은 채, 장대한 건물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미슬라 부인이 개최한 무도회가 있은 다음날이었다. 줄리는 정오 무렵 요란한 전화 벨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잠들기 전에 뉴욕 본사로 통화를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우선 뉴델리 공항에서 의 지도자가 체포된 사건을 보고하고, 그런 다음에 편집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좀더 자려고 했으나 잠이 완전히 달아나 오후에는 뉴델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시장인 찬드 니 차크에나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슬라 부인과 프리야가 잠에서 깨기 전에 나가고 싶었다. 특히 왕자와는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그를 만나면, 다시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관계에 끌려들 것만 같아 두려웠다. 물론 생각을 정리하기는 쉽지만 과연 실천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왔던 줄리는, 이젠 그와 같은 것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줄리는 새벽녘에 자이와 나누었던 그 감미롭고 관능적인 순간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반쯤 눈을 감고 택시 한구석에 앉아 있어도 자신의 입술과 목덜미와 가슴에 와 닿던 그의 입술의 감촉을 또렷이 기억 할 수 있었다.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을 알았을 때, 나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완전히 맡겼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비밀의 화원에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기쁨을 가져다 준 그의 애무를 생각하면 그처럼 무조건 항복하고 만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직한 줄리는 왕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그처럼 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처럼, 줄리도 그의 것이 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택시는 유서 깊은 뉴델리에서도 가장 크고 번화한 찬드니 차크로 들어갔다. 미슬라 부인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에서 금과 은과 보석을 많이 팔고 있다고 해서 라고 부른다고 한다. 찬드니 차크의 거리는 저마다의 길이 각각 특색을 갖고 있어 구두의 거리, 놋쇠의 거리, 숄의 거리 따위의 이름이 붙어 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붐볐다. 줄리는 걸음을 멈추고, 군중이 높은 회색 담 앞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가는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커다란 회색의 벽으로 보였던 것은 실은 코끼리였고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그 코끼리는 커다란 통나무 같은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면서 위엄 있게 걷고 있었다. 동물과 인간의 냄새가 거리에 늘어서 있는 행상들의 수레에 놓인 식료품 냄새와 섞였고, 길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식당에서도 좋은 냄새가 풍겨왔다. 크림색의 신성한 소가 뒷골목에서 불쑥 나타나자, 줄리는 당황한 나머지 길가로 얼른 비켜섰다. 행상인들은 저마다 뭐라고 떠들면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줄리는 이 거리 저 거리를 둘러보고 다녔다. 망치로 쳐서 만든 놋쇠 램프, 조각을 새긴 병풍과 테이블, 상감을 한 상아 장식품과 보석, 화려한 실크, 무명, 울, 캐시미어 등의 직물. 줄리는 여러 가지 열매와 향료가 담긴 유리 항아리가 수백 개나 진열된 가게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녀는 그 가게에서 막 나왔을 때, 낯익은 사람의 모습을 본 듯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따라가 보니, 그 사람은 뜻밖에도 사랑스런 프리야였다. 젊은 왕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화강암으로 된 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얼굴은 행복감으로 눈부실 정도였다. 옆에 있는 남자와 무엇인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줄리는 자신도 모르게 건물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왕자는 공주가 남자친구와 나다니는 것을 허락할 리 없다. 줄리도 어느새 인도의 관습에 물들었는지, 마치 왕자나 미슬라 부인이 젊은 공주의 대담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처럼 심한 쇼크를 받았다. 프리야와 같은 신분의 젊은 여자가 시종의 수행도 없이 외간 남자와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줄리는 프리야와 함께 있는 남자를 자세히 보려고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날씬하고 키가 큰 그 남자는 누가 보아도 잘 생겼다고 생각할 만했다. 남자는 잠시도 프리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프리야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줄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하고, 사람들을 헤치면서 프리야가 있는 쪽으로 갔다. 줄리가 공주를 부르자, 그녀의 얼굴은 놀란 나머지 일그러졌고 사랑스러운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양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옆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프리야는 남자를 줄리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라르 데라르라고 했다. 그는 매력적인 제스처로 자기 소개를 했는데 그가 줄리의 몸의 곡선을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은, 조금 전 그가 프리야에게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한 줄리의 생각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정상적인 정신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자이야프라디슈 미슬라 왕자의 누이동생과 남의 눈을 피해 만나는 모험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소개를 하고 나자 별로 할말이 없었다. 줄리는 잠시 데라르와 대수롭지 않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작별인사를 했다. 프리야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사리를 잡아당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는 복잡한 기분으로 궁전으로 향했다. 찬드니 차크에서 잡아탄 고물 택시가 궁전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줄리는 프리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프리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생각도 없고, 비난할 자격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 만에 하나라도 프리야가 상처받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와 몰래 만난다는 것은 인도 사회의 관습을 깨는 일로써, 그 결과로 다치게 되는 것은 프리야뿐이다. 프리야가 사귀는 그 매력적인 젊은이는 겉보기엔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했다. 그런 면에서는 프리야의 남편으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가 너무 붙임성이 좋아 어딘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프리야와 몰래 만나는 것이 그녀의 신상에 어떤 위험을 안겨 주는가 하는데 대해 너무 무관심한 듯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프리야를 본다면 아무리 이성적인 남자라도 그녀를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밖엔 없겠지. 그리고 그녀에게 남몰래 구애할 수밖에 없는 남자는 특히나 그렇겠지.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젊은이는 왜 프리야에게 자기를 가족과 만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이 미슬라가와 다르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 줄리는 원형의 넓은 홀에서 멈춰 섰다. 줄리의 생각은 이 궁전의 또 다른 주인에게 쏠려 있었다. 새로 맺어진 자이와의 은밀한 관계를 아무리 잊으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멋있는 남자가, 자신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해 주다니... 줄리의 가슴은 더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뿌듯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줄리의 발길은 저절로 왕자의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 참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프리야의 신상이 걱정되었다. 여자는 관습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특히 요청되고 있는 사회에서, 경솔한 행동을 취하면 어떤 중벌을 받을지 모른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프리야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결혼만이 행복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줄리는 젊은 공주의 행동에 대해 밀고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밀회를 목격한 이상,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가까이 갔을 때, 빠른 말로 지껄이는 힌두어가 들렸다. 얼마 안 있어 노동자들이 흔히 입는 허름한 양복을 입은 몸집이 작은 남자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바로 뒤에 왕자의 모습이 보였다. 몸집이 작은 남자는 힌두어로 무어라고 말하고 나서 왕자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등을 돌렸다. 이때 그 남자는 줄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듯 걸음을 멈칫하다가, 곧 부끄러운 듯 눈을 아래로 깔고 외면하면서 줄리의 곁을 지나갔다. 줄리는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궁전의 밖에서 일하는 하인일까, 왕자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일까? 줄리가 눈을 돌렸을 때, 왕자는 복도의 벽에 기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줄리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왕자의 눈에는 의심할 여지없는 경멸의 빛이 담겨 있었다. 줄리는 왕자의 잘생긴 싸늘한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한번 쳐다보고, 이곳에 일부러 찾아온 것을 후회했다. 프리야의 밀회와 남 모르는 사랑에 대해서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던 자신이 얼마나 경솔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새벽녘에 나를 그처럼 열렬하게 포옹해 준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인가? 줄리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마치 함께 새벽을 맞는 것이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나를 안아주던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줄리는 왕자의 표정에서 호의나 상냥함, 또는 이해심 같은 것을 찾아보았으나 그런 것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줄리는 한 순간 당황했으나, 점차 노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왕자의 얼굴에는 경멸의 표정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입술은 불쾌한 듯 일그러져 있어, 차라리 직접 원망의 말을 듣는 편이 나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모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는 등을 휙 돌려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더할 수 없이 서로의 기분을 이해했는데, 지금 그는 왜 저처럼 험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것일까? 줄리는 왕자가 변심한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밤이 가까워질 무렵, 줄리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는 계속 공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야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공주는 침대에 신문을 펼쳐 놓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줄리에게 다가왔다. 프리야는 울었는지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고, 평소의 우아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자, 줄리는 왕자의 냉랭한 태도 때문에 프리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안심하세요, 프리야. 왕자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줄리는 프리야가 그 일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다면, 그 일이 걱정되어 음식도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이 들었다. 프리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줄리의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이겠죠? 제발 부탁이에요, 라르에 대한 말을 오빠에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 프리야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오빠는 절대로 이해해 주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알게 되면, 다시는 라르를 만날 수 없게 돼요. 저는 그 사람을 못 만나면, 살아 갈 수가 없어요.」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공주의 모습은 줄리에겐 충격적이었다. 「제발 일어나 주세요, 프리야.」 줄리는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 애인에 대해서 왕자님께 절대로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맹세해도 괜찮아요.」 줄리는 침대 커버를 손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자, 여기 앉으세요.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어요. 하지만 제게만은 말씀해 주시겠죠?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프리야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안심한 때문인지 아니면 절망감 때문인지 한바탕 흐느껴 울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눈물을 거두고 마침내 라르 데라르와 만나게 된 사정을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쇼핑을 나갔다가 우연히 라르를 만났다고 한다. 프리야가 가게에서 나오다가 상자를 떨어뜨렸는데, 마침 윈도쇼핑을 하고 있던 라르가 그것을 보고 그녀에게 상자를 주워주었고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다음날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1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후 프리야는 라르와 몇 차례 만났다. 그녀는 지난번에 마슬라 부인이 연 무도회의 혼잡을 이용해서, 궁전의 정원 한구석에서 밀회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프리야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애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늦게 홍조를 띤 얼굴로 돌아온 것이나, 줄리에게 사리를 입는 것을 도울 시간이 없다고 하던 것이나 모두 그 때문이었다. 줄리는 단순히 라르의 매력뿐만이 아니라, 남의 눈을 피해 가면서 만나는 짜릿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밀회 그 자체가 프리야의 마음을 더욱 흥분케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라르라는 청년은 온실에서 곱게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는 젊은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익히 알고 있는 플레이보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는 프리야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왕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의 불안한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주가 나간 뒤에도, 얼마 동안 그녀의 문제가 줄리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처음 만난 장면이 마음에 걸렸다. 이 인도에서 그런 우연한 만남이 있을 수 있을까? 결혼 적령기의 남녀는 가족이나 친지를 통해서 서로 알게 되지 않는가? 뿐만 아니 라 프리야가 우연히 만난 남자와 재회를 약속한 것도 관습에서 크게 벗어난 일이다. 따라서 프리야처럼 엄격하게 자란 소녀로부터 재회의 약속을 얻어낼 정도라면, 라르 데라르라는 남자도 웬 만큼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줄리, 너는 왜 그렇게 바보니? 그건 지나친 걱정이야. 자이에게 혼이 나서 이상하게 의심이 많아진 모양이구나? 줄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침대에 펼쳐 놓았던 신문을 휙 쓸어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라르처럼 매력적이고 세련된 남자라면, 첫눈에 반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 없잖아? 그러나 그는 어떤 한 가지 일에 열중해서 자신을 망각할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따뜻함이 느껴지고 위트 있는 세련된 남자 같지만 그의 외관을 한 꺼풀만 벗기고 나면 그 속에는 싸늘함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줄리는 이제 프리야와 그의 보이프렌드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옆방으로 갔다. 해야 할 일도 있었고, 사실 그들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봤자 뾰족한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줄리의 입장에서는 프리야가 라르를 좋아한다면, 그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런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프리야는 험난한 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결국 보상받게 되겠지. 그러나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야. 또한 프리야가 라르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라르가 육체적 관계를 강요한 다음 공주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프리야가 맹목적인 사랑에 이성을 잃게 되면, 나중에 그녀가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지 약간은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내게는 왜 그런 냉정함이 없었을까... 줄리는 반성했다. 내게 냉정함이 있었다면, 다음에 만났을 때 말대꾸도 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몸을 바치는 수치스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줄리는 얇은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방 속을 뒤져 팜플렛을 찾았다. 인도 공항이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자동적으로 군사 기지로 전환될 수 있는지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만한 인물과 장소를 적어, 그 하나하나를 검토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했다.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복도에서 왕자의 냉정한 태도에 대해 느낀 노여움과 실망이 아직도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 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왕자의 싸늘한 태도의 원인은, 자기가 뉴델리에 찾아온 이유에 대해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줄리는 그 문제를 일단 제쳐 두고 다시 일에 정신을 집중했다. 인도 출판물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나 작고 분명치 않은 활자와 몇 시간 동안 씨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조용한 밤중에 갑작스런 전화벨 소리는 신경에 거슬렸다. 줄리는 전화를 받으려고 일어서면서 온몸이 뻐근함을 느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궁전의 건너쪽 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고, 하늘은 먹칠을 한 듯 캄캄했다. 틀림없이 한밤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내 사무실로 와줘.」 왕자의 목소리가 짧게 명령하듯 말했다. 줄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왕자는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다. 흰 셔츠 사이로 햇볕에 그을은 가슴과 검은 가슴털이 보였다. 줄리는 찬드니 차크에 갔을 때 입은 오렌지색 선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왕자는 상의와 넥타이를 의자의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놓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새벽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왕자는 자신이 줄리를 불렀다는 것을 잊었는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오랫동안 서류를 읽고 있었던 듯,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왕자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손을 폈다 오무렸다 하다가 갑자기 등을 돌려 리큐르가 진열되어 있는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용건이 있으신가요?」 줄리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는 묵직하게 생긴 크리스털 술병을 들어 글라스에 술을 따른 다음 돌아본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읽어보지 않겠소?」 줄리는 책상으로 가서 텔렉스용 얇은 종이 다발을 손에 들었다. 그녀는 왕자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했다. 대략 훑어보니 그것은 보고서인 것 같았다. 페이지마다 코드네임이 달랐고, 페이지 위에는 인도 각지의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눈을 들었을 때, 왕자의 시선과 부딪쳤다. 「정보서류인가요?」 왕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의 정보원이 보낸 건가요?」 「아냐, 내 개인 정보원이야.」 줄리는 커다란 책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서류를 잘 닦인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양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으면서 생각을 집중하려고 했다. 한참 후 줄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서류를 들고,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보았다. 왕자는 얼마 동안 그런 줄리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마침내 커다란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수가?」 줄리는 속삭이듯 말하고는 눈을 들어 왕자를 찾았다. 「다완 씨가?」 왕자의 얼음처럼 싸늘하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글라스를 놓고, 책상 쪽으로 와서 줄리와 마주섰다. 「다완은 틀림없이 살아날 거야. 그 사람도 무척 조심했지만, 위험 인물이라기보다는 중요 인물로 리스트에 올라 있었지.」 줄리는 서류를 전부 읽고 나자, 그것을 순번대로 맞추어 책상 중앙에 놓았다. 보고서에는 지난 두 시간 동안 인도의 대도시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테러리스트가 일으킨 몸서리쳐지는 사건을 취재했을 때 느낀 혐오감이 다시 살아났다. 줄리는 일어나서 책상에 가볍게 기댔다. 고개를 숙이자 금발이 흐트러졌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은 무언가 알고 있소?」 그렇게 말하면서 왕자가 다가왔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검은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경고를 하고 있었다. 줄리는 눈을 들었다. 「당신은 무척 제 미움을 사고 싶은 모양이군요.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에요.」 그녀의 몸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는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줄리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몸에 억센 손이 닿았는가 싶더니 왕자가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아무리 울지 않으려고 해도 눈물은 계속 쏟아졌다. 줄리는 왕자의 부드러운 무명 셔츠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이제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조금 전에 일어난 테러 사건을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슬픔이 그녀의 가슴에 번졌다.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모두 착한 마음을 가진 현명한 사람들이다. 다완 씨처럼... 왕자는 말없이 줄리를 껴안은 채,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줄리의 눈물이 멎자, 왕자는 그녀를 풀어 주었고 신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줄리는 책상을 짚으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눈물로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다음, 얼굴을 들어 왕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한꺼번에 밀려온 감정의 물결로 마음의 응어리가 씻겨졌는지 이제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리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해요, 추한 모습을 보여 드려서. 그런데 왜 그 보고서를 제게 보여주셨죠?」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소.」 잠시 후 왕자가 대답했다. 무엇인가 살피는 듯한 표정이 검은 눈동자에 떠올랐다. 그것 말고는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마 이 사람은 나를 위로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 무서운 보고서에 비하면, 다른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 성명을 발표했나요?」 「아냐, 아직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침까지는 발표하겠지.」 줄리는 무의식적으로 보고서를 들고 다시 살폈다. 「이 암살 사건은 인도의 테러리스트가 조직 정비를 끝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요?」 줄리는 왕자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아내려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테러리스트들이 이미 모임을 가졌었다는 얘기군요. 그렇다면 우리의 정보가 틀렸다는 얘기 아니에요?」 줄리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 이 조직적인 일련의 사건들은 꽤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일 거야. 테러리스트의 특징은 절대로 충동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하나하나의 행동은 사전에 충분히 조사되고 계획된 다음에 실행하게 돼. 이런 대규모 사건이라면, 준비하는 데만도 몇 개월 걸렸을 것이 틀림없어. 특히 동시에 여러 명의 요인을 습격한 이번 사건의 경우는 더욱 그렇지.」 「꽤 드라마틱한 방법이군요.」 줄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테러리스트들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자기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거든. 그것이 보통의 범죄 사건과 다르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런데 이번의 암살 사건은 광범위한 것이지만, 인도 국내에 서 일어난 일이지. 오늘밤 다른 나라에서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보고는 아직 없어.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이미 내게 보고되었을 테니까.」 왕자는 놀라고 있는 줄리의 얼굴을 보면서 덧붙였다. 입술 끝이 올라가면서 딱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국제적인 음모에 가담하고 있는 건 아냐. 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즉각 알 수 있으면, 사업상의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국제 무역이나 국내 경제에 바로 영향을 미치거든.」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밤의 사건은 다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테러리스트의 그룹이 협정을 맺은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의 리더는 어제 아침에야 인도에 입국했어.」 왕자는 자기의 의자에 앉아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빨리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어. 나는 이번 암살 사건을 국내에서 새로 형성된 테러 그룹이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으킨 일이라고 생각해. 온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앞으로 있을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테러그룹의 리더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싶었던 거야.」 왕자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다. 「그들을 한꺼번에 체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은 없을까요?」 줄리는 자신에게 묻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 왕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 속에는 무서울 정도의 노여움이 숨어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줄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줄리는 왕자가 암살 현장에 가까운 경찰과 전화를 하면서 모은 정보를 검토했다. 그런 다음, 왕자의 텔렉스를 이용하여 뉴욕의 외신부에 기사를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하는 편이 국제 전화를 이용하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하다. 왕자는 비서를 깨워 돕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줄리는 기계의 사용 방법을 잘 알고 있다면서 거절했다. 먼저 지의 텔렉스 넘버를 누르고, 머릿속에서 작성한 문장을 타이핑해 나갔다. 왕자가 보여준 정보 서류에 자세한 사실을 덧붙였다. 암살 사건에 이어, 지금까지 인도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에 관한 정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도 첨가했기 때문에 전부를 끝낼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줄리는 모든 사건에 대한 타이핑을 마쳤을 때, 적어도 테러 사건의 끔찍함을 어느 정도 전달했다는 확신이 들어 겨우 만족했다. 의자에 기대서 한숨을 돌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 이 역력했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전부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내일 신문을 위해, 다시 생존자들의 정보를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희생자들은 정부 고관이나 각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업가들인데 테러리스트들이 가장 증오하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줄리는 왕자 덕분에, 적어도 일련의 테러 행위를 기사화한 최초의 해외 특파원이 된 것이다. 줄리는 왕자의 사무실로 통하는 텔렉스룸의 문을 닫았다. 왕자는 데스크를 향해 앉아 있다가 줄리가 들어온 기척을 느끼고 커다란 지도를 보던 눈을 든다. 눈썹 가까이까지 머리가 내려와 있었다. 흰 셔츠는 구겨져 있고, 단추도 두 개나 풀어져 있다. 「저 때문에 늦게까지 못 주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줄리는 열쇠를 자신이 맡아 문단속을 할 걸 잘못했다고 후회했다. 데스크의 불빛이 줄리의 드러난 팔과 어깨 언저리의 흰 피부를 짙은 금빛으로 보이게 했다. 긴 밤을 지낸 탓으로 선드레스는 구겨져 있고, 허리와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어딘지 도발적이었다. 「괜찮소.」 왕자는 지도를 밀어내고 크게 기지개를 켠다. 이때 셔츠의 가슴 부분이 벌어지면서 근육질의 가슴이 드러났다. 「나도 할 일이 많거든.」 줄리는 천천히 왕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2미터쯤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더이상 접근하면, 그의 강렬한 매력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몇 시간 동안 계속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이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줄리는 자신의 주위에 강한 자석과 같은 힘이 감돌고 있음을 느꼈고, 그의 정열이 다시 불붙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그 보고서를 제게 보여 주셨죠?」 줄리는 그 자리에 선 채 물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나?」 왕자는 줄리의 찰싹 달라붙은 선드레스를 통해 드러난 몸의 곡선을 즐기면서 천천히 물었다. 「몹시 신경이 쓰여요. 그처럼 도움이 되는 보고서를 보여 주셨다는 것을 이제 저의 취재에 협력해 주기로 결심하신 걸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저의 의표를 찔러, 저와 테러리스트와의 관계를 확인해 보고 싶으신 건가요?」 「아무튼 나는 공명정대했다는 것만은 말해 두지.」 왕자는 긴 침묵 끝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당신을 돕기로 결심했어. 당신이 나를 이용해서 테러 리스트에게 어떤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나는 반대로 당신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지. 나는 기다리기를 싫어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내 방식이거든.」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줄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와주겠다고 말한 왕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의 말을 이해할 만했다. 결국 취재에 협력해 줄 수는 있어도 믿어 주지는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 기사의 문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대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꼭 증명해 보여 줄 테다! 「우린 서로 상대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왕자는 얼굴에 빈정거리는 듯한 빛을 띄우며 줄리를 쳐다본다. 「천만에요.」 줄리는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신 것 같군요.」 줄리는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 듯 방을 나왔으나, 자신의 결백을 믿어 주지 않는 사람의 것이 되고 싶어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