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1)

슬러 작성일 05.06.23 08: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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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을 하겠다는 긴장감이 없는 듯하다. 가볍고 부드러운 잿빛 수트는 중요한 회합이나 회견 때 언제나 입고 가던 것이므로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아무래도 주름장식이 많이 달린 불라우스에 있는 것 같다. 역시 하얀 면 블라우스를 입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갈아입을 시간이 없다.
줄리는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머리를 빗어 하나로 꼭 묶었다. 윤기 있는 머리칼이 가느다란 목덜미 언저리에서 우아하게 흔들렸다. 줄리는 약속시간인 10시 정각에 왕자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왕자는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감색 반소매 셔츠에 흰 슬랙스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아마 오늘은 외출할 예정이 없는 모양이다.
「알았어. 그렇게 해주게.」
왕자가 말하자, 허약해 보이는 인도인이 일어나 줄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오늘은 서쪽에서 해가 떴나 보군, 줄리.」
왕자는 단둘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놀랐다는 듯이 검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왕자는 잠시 줄리의 전신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테이블에 펼쳐 놓은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올드미스 티를 내지 않기로 했소?」
왕자는 지도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 사실은 두번 다시 화려한 옷을 입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닌가 해서 걱정하고 있었소.」
「제가 어떤 옷을 입건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잖아요?」
줄리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럴까?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왕자가 눈을 들었다.」
줄리의 반응을 재미있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지도는 뭐죠?」
줄리도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가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왕자에게 이끌리고 있다 해도 그는 나를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일의 동료로서는 최고였다. 매일 아침 그의 사무실로 가서, 자기가 찾아낸 단서와 그가 제공해 주는 정보에 대해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과였는데, 이 한 시간은 매우 충실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추진하는 조사도 한결 수월했다. 이제 줄리는 테러리스트의 세계적인 움직임을 어느 정도까지는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끈질긴 노력이 열매를 맺어, 빈 칸 메우기 퍼즐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모를 파악할 날이 멀지 않았다. 테러리스트의 지도자 회의가 열리는 정확한 날짜와 장소만 알게 된다면...
「이 지도에 기입된 표시는 암살이 일어난 장소지.」
왕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없소?」
줄리는 책상 건너편으로 가서 왕자와 나란히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인도 지도의 군데군데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표시가 남쪽에 집중되어 있군요.」
줄리가 첫인상을 말했다.
「맞았어. 다완은 뉴델리에서 습격당했지만, 그밖의 사건은 모두 남부에서 일어났어. 참, 다완은 오늘 아침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갔다더군.」
「어머, 다행이군요! 그런 훌륭한 분은 몸을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데... 전 무도회 때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좋은 분이란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어요.」
줄리는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도 당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더군. 알고 있소?」
왕자는 반들거리는 나무 책상 너머에서 똑바로 줄리를 바라본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 눈은 줄리를 평가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줄리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인가요?」
「천만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 거요. 보기와는 달리 다완은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거든.」
줄리는 책상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탁이 있어요, 자이...」
왕자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서두르면 안돼, 줄리. 나와 당신의 생각이 그 점에서 일치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 나를 설득하려는 무모한 노력은 안하는 것이 좋아.」
왕자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는다.
「자, 다시 지도로 화제를 돌리기로 해.」
줄리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눈을 감고 10까지 천천히 세었다. 그리고 10까지 셌을 때, 왕자가 어떻게 여기건 상관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왕자는 테러리스트의 취재에 힘을 빌려주었고, 내가 인도에 온 것은 테러리스트의 취재를 위해서다.
편집장은 왕자의 마음에 들라고 나를 그에게 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일을 하는 데는 수월할는지도 모른다...
「만일에 내가 테러리스트 회의를 계획한다면.」
왕자는 다시 지도로 눈길을 돌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러리스트의 방해자인 경찰의 눈을 다른 데로 돌려놓으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암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은 북부지방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군요.」
줄리는 이미 개인적인 분노를 잊고 있었다. 왕자의 의견은 저널리스트의 직감에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암살이 시도된 곳은 마하라시트라, 타밀나두, 안도하프라데시 등이었어.」
왕자는 인도 남부의 주를 열거했다.
「북부지방 펀잡이나 카슈미르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어. 그렇지 않소?」
「네, 맞아요.」
줄리는 고개를 끄떡였다.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단순히 회의장소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 암살을 감행했을까요?」
「이 일련의 사건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테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치체제를 바꾸기 위한 단서를 마련하자는 것이지. 다음에는 정부에 올가미를 씌우려는 목적도 있겠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대량 검거 등 강력한 수단을 쓰면, 죄없는 사람도 많이 다치게 될 거야. 그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반정부 운동을 대중화시키려 들겠지. 또 앞으로 있을 회의에서 자기네 세력을 과시하는 것도 이번 사건의 한 목적이 될 수 있고.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을 읽었소? 블랙 밴드라는 그룹이 성명을 발표한 것 말야.」
「네, 읽었어요. 그것에 대한 기사를 본사에 보냈어요.」
「어쨌든 사건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 여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런데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경찰과 신문은 블랙 밴드가 남부 인도의 테러 조직이라 말하고 있어. 경찰에서는 남부의 주를 수사할 모양이야.」
「그 동안 테러리스트는 북부에서 회의를 연다는 말이군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당신네 신문사의 스트링어는 북부 인도에서 그런 회의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까?」
「분명히 그런 소문은 있는 것 같아요.」
줄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 정보를 들었을 때는 델리가 회의장소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음, 델리도 북부인도에 있지. 대도시이기도 하고. 최근의 테러리스트는 시골보다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지. 도시라야 몸을 숨기기 쉽고, 요즘에는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북부에는 그밖에도 대도시가 있어. 찬리가르, 시므라, 스리나가르...」
「당연한 일이지만, 북부의 주는 아프가니스탄과 가깝잖아요?」
줄리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테러리스트 중에 러시아인과 통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들어올 수 있지 않겠어요? 파키스탄과의 국경경비가 아무리 삼엄하다고 해도 말이에요.」
줄리는 신중히 왕자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감정을 교묘하게 숨기는 사람이다. 가면과도 같은 얼굴에서 그의 생각이나 기분을 읽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도 줄리는 왕자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 리더가 공항에서 체포된 사건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군. 마치 일부러 체포된 것만 같아. 공항에 형사가 잠복해 있으리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말야. 대개 테러리스트는 기차나 화물선을 이용해서 들어오고, 걸어서 국경 을 넘어오는 경우도 있지. 파키스탄이나 네팔의 국경을 넘는 것이 이상적일 테지.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카슈미르는 여행객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 아닌가요?」
잠시 후 줄리가 물었다.
「맞았어. 더워지기 시작하면 상류계급 사람들이 떼를 지어 히말라야 산기슭에 모여들지. 사실은 나도 스리나가르에 별장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은 어떤가요?」
줄리가 물었다.
「카슈미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서지라고 할 수 있소.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고. 그러니 외국 관광객도 많지.」
왕자는 줄리의 생각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줄리는 일단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테러리스트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면 그들은 자신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초여름이에요. 뉴델리는 지난 며칠 동안 몹시 더워서 기온이 40도가 넘는 날도 있었어요. 이 시기의 뉴델리는 여행객들이 즐거이 찾아가는 곳이 되지 못해요. 여행객이 많아도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은 카슈미르가 아닐까요?」
「놀랍군, 줄리!」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고 찬탄의 눈으로 줄리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얼른 전화기를 들어 다이얼을 돌렸다. 그는 잠시 힌두어로 뭐라고 말하고 나서 수화기를 놓고 영어로 줄리에게 설명했다.
「당신의 의견이 잘못일 경우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우선 부하인 정보원에게 곧 카슈미르로 가라고 했소. 되도록 많은 정보를 수집하도록 명령했어. 또 외국인이 많이 참가하는 스포츠, 문화, 종교적인 행사가 개최되면, 카슈미르 이외의 지방도 조사를 하도록 말야, 그런데 카슈미르 지방에 사는 주민은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이야.」
왕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들은 머리에서부터 두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구별을 할 수 없어. 변장을 하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복장이 없지.」
「지금도 그 검은 천을 머리에서부터 쓰고 다니나요?」
줄리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물론이지.」
왕자는 입 가장자리를 끌어올리면서 냉소적으로 웃었다.
「평생 동안 검은 천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밖에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 봐, 나는 이슬람교도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줄리가 이슬람교도였다면, 그 아름다운 얼굴도 보지 못할 뻔했고.」
「언제나 몸을 천으로 감싸고 있으면 질식해 죽을 것 같지 않을까요?」
줄리는 몸을 떨었다.
「움직이는 광주리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겠네요.」
왕자는 두려워하는 줄리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줄리, 장차 당신의 남편은 당신에게 베일을 씌워 놓으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대로 놔두면 유혈사태를 몇 번이나 당하게 될 테니까 말야.」
「유혈사태라구요?」
줄리는 왕자의 진심이 알고 싶어 그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줄리를 아내로 맞은 남자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우리라 생각하지 않소?」
왕자의 목소리가 다정해졌다.
「당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너무 모르고 있어. 그리고 아시아 남자의 정열에 대해서도.」
「나는 결혼이 인생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줄리는 미소를 띄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최근에는 이혼이 그리 드문 것도 아니고, 또 이혼한 후라도 좋은 친구로 남아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어요.」
갑자기 왕자가 줄리의 손목을 꼭 잡았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미슬라의 피를 이은 남자와 결혼할 수 없어.」
왕자의 목소리는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탄식과 슬픔에 잠기게 돼. 줄리를 자기 것으로 삼은 남자는, 당신을 잃느니 차라리 당신을 죽이고 말 거야.」
줄리는 깜짝 놀라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눈길을 마주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미슬라의 피를 이은 남자라면 당신밖에 없잖아요?」
줄리는 왕자가 손의 힘을 약간 빼는 것을 보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줄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하녀인 스칸다라가 새로운 장미꽃을 침대 옆 테이블에 장식하고 있었다. 침실을 정리한 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스칸다라는 방에서 나가기 전에 언짢은 예감이 든다는 말을 줄리에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프리야의 약혼자가 궁전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줄리는 부드러운 장미꽃잎을 만지작거리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인도에서는 결혼식 당일에 비로소 신랑과 신부가 얼굴을 처음 대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일 프리야를 만나러 약혼자가 온다는 것은, 왕자가 떼를 쓰는 프리야에게 져서 상당히 양보한 증거다.
왕자는 애당초 라르 데라르라는 인물의 존재를 알지 못하므로, 프리야가 약혼자를 만나면 마음을 바꾸게 될 것이 아닌가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줄리는 왕자가 성급하게 일을 진행하려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프리야는 약혼자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애인을 배반하는 듯한 마음이 들어, 미칠 듯이 가슴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본다면, 자기가 자란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주를 위해 좋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라르 데라르라는 남성만이 자기의 이상적인 애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는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고 공주의 작은 가슴을 아프게 하다니 그는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가.
줄리는 오늘 아침 왕자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싸우겠다고 했다. 자이라면 어떤 장애를 극복하고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희미한 미소가 줄리의 입술에 떠올랐다. 왕자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어서, 매일 아침 만날 때마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목적한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정보를 얻고 싶다고 생각하면, 어느 틈에 그가 원하던 것이 손에 들어온다. 그 때문에 줄리도 취재하기가 아주 쉬워졌다.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지닌 그에게 비하면 노련한 플레이보이인 라르 데라르는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나 프리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리 사랑에 눈이 어두워졌다 해도 프리야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리는 없을 텐데.
줄리는 거실로 가서 신문과 연설원고, 정당의 선전용 소책자, 경찰의 기록 등 새로 수집한 정보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에 열중할 수가 없었다. 문득 깨닫고 보면 어느 틈에 프리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프리야와의 약속을 어기고서라도 모든 것을 왕자에게 말해 버릴까?
분명히 그는 언짢은 면이 있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진실이 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크게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자이의 사무실에서 텔렉스를 두드리고 있을 때나 테러리스트에 관한 자료를 읽고 있노라면, 왕자가 하는 일이 자연히 귀에 들어온다.
한 번은 거래처인 건설회사가 화재를 당했을 때, 왕자는 지불연기를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전화상대는 재정고문인 듯했는데, 왕자는 엄한 어조로 명령하듯 말했다.
「자네 부친과는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저당물을 처분할 생각이 없네. 그러니 이 일로 다시 전화할 필요는 없어.」
그러나 왕자에게 고자질하는 일은 역시 망설여졌다. 그리고 사업을 할 때의 그가 아무리 관대하다고 해도, 누이동생에 대해서도 같은 관용을 베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미슬라의 혈통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누이동생이 낮은 계급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미슬라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프리야를 몹시 꾸짖을 것이 뻔하다.
줄리는 신경질이 나서 읽고 있던 정치가의 연설원고를 내동댕이쳐 버렸다. 국민에게 아양을 떨 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논점이 없다. 통신사 사람들은, 정보 교환이 극단적으로 억제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사실을 파악하는 것일까? 자유로운 취재활동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는 인도 정부의 방침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굽이 낮은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달아오르는 대리석의 열기가 발바닥에 느껴졌다. 바깥 공기는 무더웠다. 줄리는 난간에 기대 넓은 뜰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온몸을 태울 것 같았다.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목덜미와 등, 그리고 팔이 금세 까맣게 탈 것 같았다.
역시 여기는 아시아, 동양의 나라인 것이다. 미국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사무실 창 너머로 왕자의 모습이 흘끗 보였다. 정연하고 날카로운 얼굴, 타는 듯하면서도 지적인 눈동자, 넓은 어깨... 그는 동양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을 겸비하고 있었다.
세련된 매너를 지닌 날카롭고 지적인 비즈니스맨이면서 상상도 못할 정도의 정열을 동물적인 육체에 지니고 있다. 감히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의 힘으로 그가 줄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듯했다. 줄리는 매끄러운 대리석 난간을 꼭 쥐었다.
안돼, 왕자의 힘에 져서는 안돼! 일단 굴복해 버리면 참을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될 거야. 그는 나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나서는 쓰레기같이 내버릴 테니까. 나를 테러리스트의 스파이라고 공격했을 때, 그는 분명히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매력적인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마음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줄리는 왕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멀리 나무숲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불붙기 시작한 뜨거운 생각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이튿날 아침, 스칸다라가 프리야의 메시지를 가지고 줄리를 찾아왔다. 프리야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 썼으나, 그 글씨로 보아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줄리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푸른 줄무늬가 있는 흰색 선드레스를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그 위에 입을 흰색 블레이저(화려한 스포츠 용 상의)는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오늘은 각국 대사관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그전에 프리야를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공주는 옷을 입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머니까지 와서 도와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프리야가 갑자기 휙 돌아다본다. 그 바람에 애써 예쁘게 단장했던 사리의 가슴 주름이 펴지고, 빤짝이는 금색 실로 수놓은 연한 백합빛 시퐁이 폭포처럼 마루에 흘러 떨어졌다.
「어머, 프리야! 참 예쁜 사리인데요!」
줄리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아주 잘 어울려요. 마치 동화에 나오는 공주님 같아요.」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공주는 울상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제일 추하게 보이고 싶어요! 누구도 결혼하고 싶지 않을 만큼 추한 여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 이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어머니가 달랬다.
「마음을 진정시켜, 그런 말을 하면 줄리에게 실례가 되는 거야. 줄리는 네 추한 모습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냐. 줄리, 이 사리는 자이가 선물한 거예요.」
부인은 말을 끊고 줄리를 바라본다.
「저도 그 의견에 찬성이에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리를 보아 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처음이에요.」
「줄리, 제발...」
프리야는 결사적이었다.
「오빠에게 전해 주지 않겠어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오빠는 당신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듣잖아요? 부탁이에요, 절 이런 꼴로 만들어 놓지 않게 해 주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오빠가 직접 프라카슈 다스 씨에게 이번 일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게 해주세요.」
사리의 주름을 펴고 있던 미슬라 부인이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들었다.
「줄리, 나도 부탁하겠어요. 그렇게 말해 줄 수 없을까요?」
부인은 생각에 잠기듯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 줄 거예요. 사실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러다가는 프리야가 병들어 눕게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서둘러 결혼할 필요가 있는지 나도 의아한 생각이 들어요. 이 애는 아직 젊으니까 1년쯤 기다려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물론 상대편에서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왕비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아이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프라카슈 다스 씨가 아니라도 자이는 틀림없이 훌륭한 배필을 구해 줄 거예요.」
「그래요, 엄마 1년만 기다려 주세요!」
프리야가 기쁜 듯이 외쳤다. 지금의 프리야에게는 1년이 영원처럼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왕자님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예요.」
줄리는 기대를 걸고 바라보는 그녀에게 미안한 듯이 말했다.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프리야가 자신있게 말했다.
「저녁식사 때의 모습을 보면, 오빠가 당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정말 그래요, 줄리.」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틀림없이 깨달았을 거예요.」
「아마도 자이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정치와 인도의 장래 등에 당신도 흥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자이는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는 모양이에요. 그 애가 그토록 환하게 웃는 것은 아주 오랜만에 봤어요.」
「하지만 그것은 일에 관한 이야기예요.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요.」
줄리가 대꾸했다.
「그것은...」
부인은 크게 손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염려 할 것 없어요. 원래 미슬라 가문의 남자들은 대대로 토론하기를 좋아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나를 믿어요. 당신이 자이에게 가 있는 동안 나는 이 애를 달래 놓겠어요.」
서재의 문을 노크할 때도 줄리로서는 거의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왕자의 의견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미슬라 부인과 공주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애원하다시피 매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그것이 아무리 헛된 노력이라 해도 시도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왕자가 내 의견을 들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들어와요.」
문을 두드리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는 책장 앞에 서서 책을 펴들고 있었다. 방안은 어두컴컴하고 나무와 책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왕자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들어온 사람이 줄리라는 것을 알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흰색 고급 면 셔츠 사이로 늠름한 근육이 드러나 보인다. 풍성하고 시원해 보이는 면 팬츠 위에 굵은 검정 벨트가 둘러져 있고, 그것이 허리를 한층 더 강조해 주고 있었다. 이처럼 남자다운 사람이 달리 또 있을까. 줄리는 황홀한 눈으로 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한테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오늘 아침에는 일을 쉬겠다고 말해 놓았는데.」
왕자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대사관에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다른 예정을 세워 놓았어.」
「해리의 전갈은 받았어요. 일부러 전해 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얘기를 하러 왔어요. 그런데 뭘 하고 계셨죠?」
「보디가드를 항상 곁에 둘 수 없어서.」
왕자는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체육관에 가서 몸을 단련하고 있었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미술의 대가인 다이센 데시마드가 한 말이 생각나질 않는 거야. 그래서 그가 한 말을 찾아보려고 돌아왔어. 그런데 무슨 일이지? 새로운 단서라도 찾아냈소?」
「그 얘기가 아니에요.」
줄리는 눈앞에 있는 갈색 피부의 사나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오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줄리는 생각없이 그를 만나러 온 자신을 후회했다. 왕자가 책을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면 놀러 왔다는 말인가, 줄리?」
「프리야의 일로 잠시 할 얘기가 있어요.」
줄리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음...」
왕자는 안심했다는 듯 전신에서 힘을 뺀다.」
「내 얘기를 잘 들어주세요.」
줄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공주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공주는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 어머님도 프리야에게 조금만... 그러니까 일년쯤 시간을 주면, 결혼할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고 계세요.」
「무슨 속셈이 있는 듯한 말투로군.」
왕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깔보듯이 줄리를 내려다본다.」
줄리는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공주의 애인 이야기를 덮어두고 어떻게 그녀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다만 미슬라 부인의 의견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1년쯤 지나면 프리야의 신상에도 여러 가지 일이 생겨, 라르의 매력이 흐려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일년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거죠?」
줄리가 따졌다.
「어머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프리야로서는 결혼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왕자는 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누이동생에게 서양 여자와 같은 권리를 주고 싶지는 않아.」
「남편을 직접 선택하는 권리 말인가요?」
「애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 말이야.」
「프리야가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지금 한 말은 프리야에게 대한 것이 아니야. 당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그 화원에서의 내 태도를 나무라는 건가요?」
줄리는 도전하듯 왕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서양과 동양은 전혀 사정이 달라요. 우리 나라에서는 여성이 애인을 가졌다고 해서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구요.」
왕자가 긴 손으로 줄리의 턱을 받쳤다. 땀내 비슷한 남자의 체취가 풍겨왔다. 왕자가 줄리의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리 내가 왕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내게 당신을 비난할 자격은 없어.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줄리.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건, 우리가 경험한 그때의 일은 지워지지 않아.」
순간 줄리는 정신이 아찔했다.
두번 다시 다정한 말을 걸어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왕자는 나를 갖고 싶어하던 그때처럼 둘 이서 똑같은 감정을 느끼기를 원하는 것이다. 줄리는 강한 자제심 속에서 흔들리는 그의 가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소원에 부응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자 몸속에서 뜨거운 욕망의 샘이 용솟음쳤다.
그 역시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아. 자존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한 인간...
줄리는 비로소 왕자의 참모습을 본 것 같았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세요, 자이?」
줄리는 손을 내밀어 가만히 그의 가슴을 만졌다.
「당신을 그토록 두렵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뭐죠?」
왕자는 줄리의 맑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인도에서는 권력자가 남을 신용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오래 권력의 자리에 군림할 수 있어. 나는 남을 믿지 말라는 교훈 속에서 자랐어.」
왕자는 말을 끊고 손을 떼었다.
「그런데도 나는 줄리를 신뢰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야.」
「그렇다면 신뢰하면 되지 않겠어요? 간단한 일이에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왕자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검은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운명은 당신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자주 있어, 줄리.」
그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잘 알고 있어. 지금까지 우리 사이가 어떤 것이었던 우리는 원만하게 지냈소.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고싶어. 몇 천 번, 몇 만 번이라도 그렇게 해 주고 싶어, 하지만...」
왕자가 줄리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줄리는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 그의 손, 그의 검은 눈동자에 떠오른 불꽃... 줄리는 왕자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것은 운명인 것이다. 내 영혼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다.
무도회가 있던 그날 밤 이후, 가슴속에서 싹트고 있는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인 것이다. 줄리가 서서히 시선을 들었을 때 불타는 듯한 검은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환한 웃음이 왕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느닷없이 셔츠를 벗어 마루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상반신은 마치 조각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왕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리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꽃잎 모양을 한 선드레스의 작은 단추를 능숙한 솜씨로 끄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맨살에 닿았을 때, 줄리는 약간 몸을 떨었다. 몸의 중심에서 뜨거운 것이 넘쳐 나왔다. 그녀는 기쁨의 예감에 사로 잡혀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그의 팔을 가만히 만졌다.
「무척 수줍어하는군, 줄리.」
왕자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왕자는 선드레스의 어깨끈을 벗기고 드레스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윽고 그 손이 가슴에 와서 멎었다. 기쁨의 파도가 한꺼번에 밀어닥쳤고 줄리는 뜻하지 않은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이 사람은 아직도 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니, 이제는 그렇지 않겠지.
자이는 줄리를 껴안았다. 어깨끈이 완전히 벗겨져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더욱 힘있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까칠까칠한 가슴털이 그녀의 민감한 가슴을 스쳤다. 줄리는 신음했다. 이윽고 신음소리는 요구의 속삭임으로 변해갔다.
왕자의 몸이 긴장했다. 그는 꼭 껴안은 그녀의 몸에 입술을 가져갔다. 줄리는 그에게 달라붙어 솟구치려는 기쁨의 절규를 애써 참고 있었다.
「내 짧은 인생 중에서 이처럼 기쁜 일은 없었어.」
자이가 속삭였다. 가슴속에선 충족된 신음소리가 낮은 연속음을 내고 있었고 마침내 그는 줄리를 안아서 조용히 융단 위에 뉘었다.
「이런 행복을 갖게 해준 누이동생에게 감사해야겠어.」
「참, 그렇군요?」
줄리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프리야 때문에 내가 여기 왔어요.」
「다시 한번 잊어 줄 수 없을까?」
왕자가 다정히 재촉했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태산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공주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다.
줄리는 냉정을 되찾고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미슬라 가문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누이동생쯤은 쉽게 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단순히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줄리는 자신으로서도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의 큰 힘으로 왕자를 떼밀고 재빨리 일어났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의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고 왕자는 그러는 줄리의 모습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그 눈에 맹수가 먹이를 보았을 때와 같은 섬광이 빛났다. 줄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왕자는 덤벼들 생각은 않고 가만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상반신을 벗은 채 벨트를 매기 시작했다. 발에 아무것도 신지 않고, 코튼 팬츠를 입었을 뿐인 왕자는 옛날의 장군 같았다.
그녀의 감각은 마비돼 있었으나, 두려운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남을 이용하는군요?」
줄리가 나무랐다.
「누이동생의 일만 해도 그래요.」
실망과 수치로 눈물이 치솟았으나 줄리는 애써 이것을 억제했다.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왕자는 전혀 감정이 깃들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났을 때는 언제나 그런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줄리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도중에 그만뒀지? 당신의 동료들은 내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텐데?」
「정말...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군요!」
줄리는 분노가 치밀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 피가 역류한 줄리는 사이드테이블에 있던 무거운 꽃병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무서운 힘으로 꽃병을 왕자에게 던졌다. 왕자는 얼른 몸을 피했다. 고풍스런 도자기 꽃병이 책장에 맞아 큰소리를 내며 깨지고, 아름다운 파편이 융단 위에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귀를 찢는 듯한 그 소리에 이어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런 속에서 도자기의 파편이 내는 방울 소리 같은 작은 소리가 들렸다. 줄리는 망연히 파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러리스트와 한 패라는 의심을 받고 온몸에 치솟았던 분노가 완전히 가시고, 지금은 허약해진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어째서 그 옆에 있기만 해도 이토록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일까? 어째서 그를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극단적인 것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줄리는 이렇게 외치고는 얼른 방에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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