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형 컨 베 이 어1.2.3.)극락으로)DNA 건축물)

후랑셩 작성일 05.05.14 11: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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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형 컨 베 이 어 1


회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온다. 얼굴은 파란 유리로 가려져 있다. 유리에 형광등이 비쳐서 가끔 번쩍인다.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네킹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들이 내 양 옆에서 팔을 잡는다. 수갑이 뒤로 채워져 있어 반항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복도로 들어선다. 거기에도 회색옷의 사람들이 서 있다. 모두 얼굴은 파란 유리로 가려져 있다. 검도 호구를 쓰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이다.

이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말을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곳의 관리인으로 오면서 말을 없애버린 것인가? 파란 유리 속의 얼굴을 상상해본다. 입이 없는 그런 모습이다. 눈은 충혈된 상태로 굳어져 있고, 녹색 파충류의 껍질 같은 피부를 하고 있을 것 같다. 말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든지 회색옷의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파란색의 형광등이 복도를 비추는데, 지하 터널 같은 느낌이다. 바닥과 벽과 천정이 모두 같은 색이다. 이것을 뒤집어 놓아도 어디가 벽이고, 바닥인지 구별 못할 것이다. 웃음이 나온다. 웃음소리가 복도를 타고 퍼진다. 그리고 다시 발자국 소리로 바뀐다. 내 옆의 회색 옷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단지 정해진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을 뿐이다.

기계음이 가까워진다. 말로만 들어오던 사형 컨베이어다. 제 2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의 특이한 점은 재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지 죽음만이 있는 곳은 아니다. 이 속에서 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재판이 패소하면 항소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시간이 조금 늘어난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간판이 붙어있는 문이 열린다. 넓지 않은 방이다. 벽 쪽에 컨베이어 벨트가 있다. 이것은 방 옆의 구멍을 따라 다른 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 한명이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폭이다. 벨트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한 사람이 방 옆의 구멍으로 나타났다. 팔과 다리가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는 힘이 없다. 천천히 벨트가 움직여 남자는 반대쪽 벽의 구멍으로 들어간다.

회색 옷들이 나를 벨트 있는 곳에 데려간다.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능숙한 솜씨로 나를 벨트에 묶는다. 나는 손과 발을 벨트에 묶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몸의 힘을 뺀다. 하지만, 심장에서 시작하여 사지까지 떨림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회색 옷들은 나를 남겨둔 체 문으로 나간다. 기계음이 귓속을 때린다.

벨트는 천천히 움직여 나를 방 옆의 구멍 안으로 이끈다. 도시의 시궁창 같은 냄새가 난다. 간간히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숨을 막는다. 그곳은 터널 같은 곳이다. 간간히 전등이 있을 뿐이다. 누운 체로 십자가에 못 박힌 기분이 든다.

조금 시간이 지나 커다란 강당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내 머리 위에 마이크와 카메라가 나타나고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 말을 한다.

"당신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증거는 확실합니다. 당신 옷에는 피해자의 혈흔이 관찰되었고, 흉기에서 당신의 지문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확실한 알리바이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법에 따라 당신은 사형입니다. 여자를 살해했으니 절단 형에 처해집니다.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사무적인 목소리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일상적인 것이라는 투.

"나는 안 죽였어요. 아내는 내가 집에 갔을 때 죽어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혼자 산책을 잘 나간단 말이에요! 공원 청소부들이 저를 봤을 거예요. 그들이 알거라고요!"

삐-하는 소리가 강당을 메운다.

"5월 11일 오후 2시30분의 증언을 번복했습니다."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

"같은 증언은 기각합니다. 도시법 101조에 의해 지금 유죄를 인정하면 가스 형에 처해지고, 무죄를 주장하면 절단 형에 처해집니다. "

"저는 무죄라고요!"

"절단 형을 선고합니다."

카메라와 마이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천정에 있는 구멍으로 사라져 버린다.

"잠깐만요! 저기요!"

내 목소리는 강당을 울릴 뿐이다. 벨트는 강당의 벽으로 천천히 움직여, 나를 터널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서 시끄러운 기계음이 터널을 진동신킨다. 절단기가 설치되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 이 정도에서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인구가 증가하자 정부는 적은 비용으로 재판과 사형을 할 수 있는 체재를 생각해냈다. 그것이 제 2의 아우슈비츠이자 제 2의 기요틴인 컨베이어 벨트 재판 체재이다. 재판과 선고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다 해결한다. 그리고 시체를 치우는 작업도 자동이다. 커다란 건물에 일하는 사람이 10명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은 이 체재의 효율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나도 이 체재가 아주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되고, 이렇게 빨리 죽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기이이이잉-

치아를 갈아낼 때 나는 듯한 소리가, 기도를 뚫고 들어와 숨쉬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 5m정도 앞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로봇 팔 같은 것이 터널 천장에서 나와 있고, 그 팔 끝에는 뾰족한 뭔가가 보인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뾰족한 것이 주사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커다란 주사바늘이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재판하기 전에 주사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통 없이 빨리 죽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간호사가 팔에다 주사를 넣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는 생각과 너무 다르다.

주사기 아래로 벨트가 이동하자 주사기 끝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가슴을 찌른다. 두꺼운 주사 바늘은 내 갈비뼈 사이를 통과한다. 비명은 터널을 가득 메우고, 주사약이 다 들어갈 때까지 로봇팔은 벨트의 속력에 맞춰 움직인다. 눈물이 마구 나온다. 주사 넣는 것이 이렇게 아픈데, 정말로 고통을 주는 것은 얼마나 아플까?

주사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피가 역류하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뇌혈관이 터져서 뇌사로 죽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내가 지나온 자리에서 자동으로 주사기 세척작업이 진행된다. 누군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을 찌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삐-하는 소리 후에, 방송이 나온다.

"앞으로 남은 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발목을 자릅니다. 그리고 곧바로 출혈을 막기 위해 burning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다음은 무릎 관절, 그리고 팔목, 팔꿈치 절단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절단에는 출혈을 막기 위한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그냥 죽여줘요! 제가 아내를 죽였어요!"

하지만 내 말을 누구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방송도 녹음되어 있는 소리다.

"마지막으로 목을 자릅니다. 목을 자르는 과정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동맥을 피해서 갑상선과 식도를 관통합니다. 그리고 옆에서 식도를 관통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목을 관통한 칼날이 회전을 하여 목을 절단합니다. "

방송에서는 내가 죽은 다음의 과정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설명한다.

"목 절단 후 바로 피가 벨트 속으로 들어가 발생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피 흡입기가 작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화장작업으로 들어갑니다. 뜨거운 불길이 여러분을 깨끗하게 정리해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뼛가루는 수거되어 가족들에게 전달됩니다. 저희 컨베이어식 재판 시스템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삑-소리가 나면서 올드 팝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경찰들에게 끌려가면서 경찰차 안에서 쓴 조서 에 [죽기 전에 듣고 싶은 노래]라는 항목에 썼던 노래다. 잔잔한 기타소리가 컨베이어 벨트 터널을 메운다.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한다. 그러나 구멍 난 벽으로 쏟아지는 벌레처럼 두려움이 밀려든다.

앞쪽에 어떤 물체가 보인다. 프레스 기계 같은 모양이다. 커다란 칼날이 어두운 조명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에 보라색 액체가 뿌려진다. 음악이 잠시 멈추더니 방송이 나온다.

"여러분의 감염을 막기 위해 칼날 소독 작업 중입니다."

다시 음악이 나오고, 그에 맞춰 흥얼거리려 하지만, 목소리는 연기에 질식한 것처럼 꽉 막혀서 나오질 못한다. 벨트는 움직이고, 내 다리는 절단 기계 아래에 도착한다. 칼날이 먹이를 물듯이 밑으로 떨어지고 발목이 떨어져나간다.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the end

사 형 컨 베 이 어 2
태환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 여러 개의 화면에서 몇 가지 데이터와 컨베이어의 모습이 나타난다. 자신의 담배 연기에 눈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주름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다. 연기는 모니터 앞을 지날 때만 잠시 모습을 비추었다가 어두운 방안에 퍼지며 사라진다. 환풍기가 규칙적으로 소리를 내며 방안의 공기를 빨아 마신다. 그것이 없었다면 태환의 작업실은 담배연기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모니터들에 미끈미끈한 연기 액이 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마움도 모른 채 시끄러운 환풍기 소리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저거 고치던가 해야지.”

검어진 손끝에 담배를 끼고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아침에 딸애가 면도를 해준 덕분에 턱과 볼이 깨끗해 보였지만, 모니터에서 나오는 희뿌연 빛은 기름기에 반사되고 있다. 입을 위로하고 연기를 크게 내 뱉는데, 눈은 모니터의 수치를 노려보고 있다. 근무시간에 담배를 피더라도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다.

그의 눈이 잠시 모니터를 떠나 책상 구석에 있는 접이식 액자로 향한다. 모니터 불빛이 액자를 비춘다. 두 장의 사진이 들어 있는데, 하나는 자신과 딸의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아내의 사진이다. 사진 속의 태환은 딸을 한 손으로 안아 올리며 웃고 있다.

물론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태환은 너무 늙어 버렸고, 딸은 너무 커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커버린 딸은 죽은 아내의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사무실 구석에 놓여 있는 도시락이 그 증거 중의 하나이고, 잘 면도된 얼굴도 그 중 하나다. 태환은 늘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했고, 구두에도 광이 났다.

-아! 살려줘!

모니터 옆의 스피커에서 컨베이어 쪽의 소리를 내뱉고 있다. 사형수들이 마지막 고문을 받는 소리다. 모니터는 컨베이어에 묶인 채로 다리가 절단되는 모습을 비추고 있다. 절단과 동시에 혈액을 응고 시켜 출혈을 막는다. 컨베이어 통로 벽에 붙어 있는 로봇 팔들은 그런 일들을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죄수들의 출혈이 잘 멈추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태환은 자판을 두들겨 수혈을 명령하고, 로봇팔은 사형수의 정맥으로 피를 쏟아 붓는다. 그래야 그들이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태환이 사형수들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연찮게 사형 컨베이어 빌딩에 취직했고, 30년간 일하다 보니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되고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상관은 2년 전에 퇴직해서 지금은 태환이 빌딩의 총 관리인이 되었다. 월급이 크게 올라간 것도 아니고, 하던 일이 크게 바뀐 것도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했다. 다만 작업실의 환풍기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게 불만이었다.

-아악! 그냥 죽여줘!

흰옷을 입은 죄수의 발목이 잘려나간다. 태환은 충혈 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한다. 다시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리더니 진득진득한 냄새를 남기고 사라진다. 죄수는 병든 개처럼 몸을 떨고 있다. 커다란 바늘 하나가 죄수의 가슴에 박히더니 죄수는 다시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볼륨을 줄이자, 다시 환풍기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지금 발목이 잘린 사형수는 뉴스에 나올 정도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모니터 중의 하나는 그의 사형 식을 생방송으로 보여주고 있다. 앵커는 침을 튀기며 사건의 자료 화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너무 열변을 토하느라 그의 넥타이가 삐뚤어진 것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유괴된 어린 아이 사진입니다.

화면에 흰색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사진이 보인다. 곧 페이드 되고 다른 아이 사진으로 넘어간다. 다섯 장정도 사진이 지나갔는데, 모두 웃는 모습이다.

“저런 아이들을 먹다니…….”

태환의 입에서 담배 연기처럼 말이 뿜어져 나온다. 앵커는 목이 막히는지 물을 조금 마신 후 범인의 집에서 발견된 식인 테이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범인은 5시간 분량의 촬영을 했습니다. 그 중 2시간 정도는 죽이는 과정에 대한 것이고, 3시간 정도는 식인 하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비가 오려는지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환풍기 소리에 가려져 확실하지 않다. 태환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한 뒤 파란 색 작업복의 단추도 하나 푼다. 두통이 조금 생기면서 컨디션이 나빠졌다. 비가 올 때마다 그렇게 신경통이 생긴 것도 아내가 죽은 이후 계속 되고 있다.

화면에 범인의 얼굴이 뜬다. 관자놀이를 왼손으로 살짝 누르며 얼굴을 관찰한다. 평범한 얼굴이었고, 그렇게 심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길거리 가다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얼굴이다.

앵커는 아직도 열변을 토하고 있다.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자유시로 이사를 왔습니다. 1년 뒤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 후 30년 간 혼자 살면서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형은 10년 전 아내를 죽인 죄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형제가 모두 사형컨베이어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빗소리가 점점 명확해 진다. 울리는 듯한 소리가 사형 컨베이어 빌딩을 감싸고 있다.

-으악! 모두 죽여 버릴 거야!

-경찰은 과거에 김씨의 범행이 더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렇게 경찰이 예상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통 첫 범행에는 한 명만 유괴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에 김씨는 네 명의 아이들을 동시에 유괴했기 때문입니다.

태환은 도시락을 책상 위로 올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 옆에 놓는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삼십분 정도 남았지만, 아침에 속이 안 좋아 밥을 못 먹었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2부에서 계속 전한다는 말을 남기고 화면은 광고로 넘어갔다. 이름 모를 연예인들이 나와서 가정용 청소기를 선전하고 있다. 태환은 입을 오물거리며 죄수가 나오고 있는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컨베이어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는 모든 과정을 태환에게 전달하고 있다.

죄수의 비명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손톱 사이로 바늘이 들어가는 것이 꽤 아픈 것 같다. 다음 코스에는 열 개의 니퍼가 손톱을 뽑으려고 준비 중이었다. 물론 하나씩 뽑는다.

환풍기 너머로 천둥소리가 들린다. 보통 때도 어두워 보이는 자유시가 더욱 검게 변하고 있다.

태환은 죄수의 고통을 상상해본다. 피비린내 나는 긴 터널, 멈추지 않는 고통. 피가 나오면 다시 집어넣고, 정신을 잃으려고 하면 무슨 수를 쓰던지 깨어나게 한다. 심장이 도중에 멈추는 일도 거의 없다. 평화로운 죽음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 때문인지 음산한 기운 때문인지 태환은 몸을 한번 떤다.

사형수가 있을 때마다 태환은 고통을 상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죄수가 어떤 잘못을 했던 간에 고통을 주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버튼 하나 누르는 것으로 비명을 잠재울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다.

-으악! 제기랄!

죄수의 다섯 번째 손톱이 뽑혀나가고 있다. 고통은 거의 역치까지 닿았을 것이다. 사실 더 깨끗하게 고통을 주는 방법도 있다. 신경에 독을 넣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잔인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 사형컨베이어를 운영할 때에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그 세부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재판은 컨베이어 위에서 하되, 고통을 주는 방법은 더 깨끗한 방법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송법이 개편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잔인한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범죄율을 떨어뜨린다는 것에 사람들이 동의한 것이다. 사실 사형 식은 사람들의 좋은 오락거리가 되었고, 방송국에서는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팝콘과 코크를 옆에 끼고 다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사실 태환도 방송국으로부터 용돈을 얻어 쓰고 있었고, 그들은 죄수들의 고통스런 모습을 더 요구했다. 최근에 카메라 위치를 바꾼 것도 그런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휴대폰에서 멜로디가 반짝거림과 함께 울려 퍼진다.

-아빠, 저예요. 언제 들어오실 거예요?

딸, 우정이의 목소리다.

-오늘 빨리 들어오셔야 해요. 아빠 생일이잖아요.

“병원 일은 빨리 끝나니?”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데, 착각일 뿐이다.

-병원 컨베이어가 고장 나서 어제, 오늘 정말 바빴어요. 수리하는 데서 다시 프로그램 바꾸고, 기름치고……. 일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닌데요, 과장님이 먼저 퇴근하래요. 우리가 있어도 할 일 별로 없다고. 방해만 된데요.

죄수의 팔이 잘려나가고 있다. 날카로운 회전 톱이 천천히 살을 파고들고 그 사이로 피가 튀고 있다. 아마 그 과장이란 사람도 텔레비전으로 이 광경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야근했으니까 힘들 텐데, 빨리 들어가서 자거라.”

전화선 저쪽에서 우정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후후. 야근 중간 중간에 엎드려서 자요. 그래서 별로 안 피곤해요. 어쨌든 7시까진 들어오실 수 있죠?

“아마 그 정도에 집에 갈 수 있을 게다.”

-죽여 버릴 거야! 아! 모두 지옥에나 가라!

-그럼 아빠 먼저 가서 맛있는 거 준비하고 있을게요.

“그래. 저녁에 보자.”

전화를 끊고 나서, 모니터를 본다. 마지막 의식이 준비 중이다. 경동맥을 뚫는 것은 사실 죄수에게 별 고통을 주지 못한다. 뇌로 피가 가지 못하는 동시에 죄수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다만, 피가 뿜어져 나오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서 시행하는 것이다. 화면에는 비치지 않지만, 사타구니 옆의 정맥으로 강심제가 들어가고, 커다란 동맥들로는 수혈이 이루어진다. 이것으로 인해 오랫동안 피가 뿜어져 나오게 된다. 카메라는 앞 유리에 살짝 피가 묻을 정도로 가까이 놓여 있는데, 여론 조사 결과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리로 설치한 것이다.

태환은 전화기를 들고, 3번을 눌렀다.

“피가 좀 적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데…….”

-예. 그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습니다. 2리터 혈액을 투입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주게.”

조금 뒤 커다란 정맥과 동맥들에 바늘이 들어가고, 대용량의 수혈이 시작되었다. 죄수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전기 제어로 꼭 살아있는 것처럼 몸부림치는 것 같다. 벌린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지만, 시청자들은 미리 녹음된 비명 소리를 듣고 있다. 영화 촬영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태환은 죄책감을 털어 낸다.

피가 뿜어져 나와 카메라 유리의 반 정도가 피에 젖는다. 이 정도면 시청자들은 맥주를 마시며 쾌재를 부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악인은 잔인하게 죽어가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선한 주인공이 된 듯이 웃는다. 그에 따라 광고료도 올라가고, 태환에게 돌아오는 돈도 늘어난다.

하지만, 가진 돈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죽은 지 10년이 넘어가고 있는 아내의 빈자리는 여전히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머리를 송곳 같은 것으로 맞은 것 같습니다.

아내가 실종된 지 3일 만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자유시의 어느 골목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되었다. 멍든 자국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눈은 커다랗게 뜨고 빗물을 받아낸다. 두개골에 뚫린 구멍으로 빗물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남편이십니까?”

검은색의 비옷을 입은 경찰이 사무적으로 물었고, 태환은 가라앉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검은 비옷들은 아내의 시체 주위를 바쁘게 움직여 다녔다. 태환은 죽은 아내를 살릴 수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바쁘게들 움직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커다란 비닐 주머니에 아내를 넣었고, 어두운 골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빗소리만 가득했다.

경찰은 아내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부검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사복 차림의 남자가 집으로 찾아와 사인을 받으려 했다. 태환은 아내의 몸을 메스로 갈기갈기 찢어 놓아도 범인을 잡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사인을 받지 못한 채 집을 나가야 했다. 태환은 빗소리를 들으며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감싸 쥐었고, 중학교에 입학 준비 중이던 우정이가 방구석에서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울고 있었다.

-세기의 악당인 유민성이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앵커가 흥분한 듯이 소리 지르고, 스피커에서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곧 이어 시청자들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얼굴이 벌겋고, 살찐 남자가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 놈은 지옥도 못 갔을 겁니다!

그러자 남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모두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 올라있다. 두 명 정도 인터뷰를 듣더니 죄수의 죽는 장면을 다시 보여준다. 잔인한 장면은 슬로우로 보여주며, 아래에 ‘범죄는 자신을 파괴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인다.

텔레비전 화면이 광고로 변하자 태환의 긴장감도 줄어든다. 시계는 12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소장님도 나가서 드실 겁니까?”

“아니, 딸이 도시락을 싸줬어.”

직원들이 모두 나가자 썰렁한 기운이 퍼진다. 직원은 전체 15명이다. 처음엔 10명이었는데,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 5명이 더 늘었다. 방송 기술자들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커다란 건물은 폐가처럼 언제나 썰렁했다. 비까지 내리면 창문이 몇 개 없는 건물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보통 비는 무거운 안개를 끌고 왔다.

자유시에는 밤이 빨리 찾아온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당연히 안개도 도로를 뒤덮고 있다. 새로 산 차의 헤드라이트가 도로를 밝힌다. 도시에서 태환을 반기는 것은 딸과 반짝이는 네온사인뿐이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올린다. 지금쯤 잠잠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유민성의 사형 식 소식이었다.

-무역 센터를 공격한 바이러스도 유민성의 범행으로 밝혀졌습니다. 범행동기는 계속 수사 중입니다. 범행이 다 밝혀지기 전에 사형 식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여론 조사에 의하면 찬성이 95%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빗물이 시야를 가리고, 와이퍼는 시야를 열어준다. 다리 위는 퇴근길 차들이 거북이처럼 서있다. 낡은 우산으로 겨우 비를 가리며 걸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이미 신발은 비에 흠뻑 젖은 것 같았다.

-경찰은 유민성의 집을 더 수사 중이며 그 주위는 현재 통제된 상태입니다.

옷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긴 머리카락이 새어나와 있다. 여자는 다리 난간에 잠시 서 있다가 강물로 뛰어내린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첨벙하는 소리조차 안개 속에 묻힌 듯 했다.

태환은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습한 공기를 막기 위해 에어컨을 틀었다. 아직도 머리 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뇌혈관 곳곳에 조그만 벌레들이 알을 낳으려고 아우성치는 듯이 귀가 윙하고 울렸다. 차 앞 유리 구석에 낀 먼지들은 비가와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자신의 두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정이는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태환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준석이도 부르지 그랬냐.”

“준석씨도 오고 싶다고 그랬는데요, 오늘 야근이라 어쩔 수가 없대요.”

둘이서 먹는 식사는 조금 썰렁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두통 때문에 입맛이 없었지만, 딸에게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이건 선물.”

딸이 예쁘게 포장된 상자와 봉투 하나를 꺼낸다. 태환은 곧 포장을 뜯는다. 그 안에 와이셔츠 하나가 들어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메이커로 샀어요. 꽤 비싸더라고요.”

우정이는 연신 싱글벙글 이다. 그리고 봉투도 빨리 열어보라고 보챈다. 봉투 속에는 종합 건강 검진권이 들어 있다. 우정이의 월급으로는 사기 힘든 것이다. 태환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의 주름이 위로 올라가 또 다른 물결을 만든다.

“히힛. 제가 일하는 병원 검진권이에요. 준석씨랑 돈 모아서 산 건데, 제가 사원이라고 30% DC가 된데요. 그래서 넙죽 샀죠.”

태환은 빳빳한 종이를 만지작거린다.

“아빠도 이제 건강을 생각해야 될 나이잖아요.”

“그래. 고맙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딸에게 묻는다.

“거기 컨베이어식 병원이라고 했지?”

“당연하죠. 요즘 컨베이어식 아닌 데가 어디 있어요?”

빗소리가 줄어들자 태환은 거실의 버티컬을 연다. 가로등 몇 개가 도시를 차지하고 있다.

“난 조금 겁나는구나.”

태환은 자신이 컨베이어 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의 머리 속에서 컨베이어는 사형식과 강하게 묶여 있는 존재였다. 죄수들의 고통을 상상하던 것이 현실로 일어날까봐 두려웠다. 밥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담배를 입에 문다.

“걱정 마세요. 아빠 생각하시는 거 다 알아요. 하지만, 병원 컨베이어는 아빠가 일하는 데랑 많이 달라요. 깨끗하고 밝고, 문제가 생기면 환자가 컨베이어를 통제할 수 있어요. 아빠도 다 알잖아요.”

태환은 한숨을 길게 내쉰다. 한숨을 따라 담배연기가 거실에 퍼진다. 아내의 영정 사진에 잠시 눈이 머문다.

“그래. 언제라고 했지?”

우정이 살짝 웃는다. 검진을 받지 않는다고 할까봐 은근히 걱정을 했었는데, 아빠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이번 달 아무 때나 된데요.”

태환의 등을 우정이 안는다. 태환은 등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빠, 되도록 병원에 빨리 다녀오세요. 두통도 계속되고……. 걱정 돼서 죽겠어요. 알았죠?”

굵은 음성이 ‘그래.’라고 짧게 대답한다.

다음날, 일이 끝나자 곧바로 병원으로 향한다. 자유시에 있는 가장 큰 병원으로, 멀리서도 녹색별 모양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태환은 일부러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으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자신이 컨베이어 위에 누워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교차로를 지나칠 때마다 유턴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갈등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비싼 것을 월급도 많지 않은 애들이 사온 정성을 생각하니, 차마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우정이가 기다리고 있다.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날씨는 어제처럼 많이 흐렸다. 다행히 두통은 별로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올드팝 한 곡이 끝난 뒤에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은 유민성의 집 지하실에서 숨겨진 방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아직 그 곳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유민성의 다른 범행에 대한 물건이 놓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겹군. 아직도 유민성 얘긴가. ‘

태환은 짜증이 일어 눈을 반쯤 감았다. 이마의 주름이 따라 내려온다. 그는 유민성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컨베이어에 묶일 때, 유민성은 벽에 걸린 카메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물론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라본 것일 테지만, 꼭 태환을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카메라 너머에서 태환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입 꼬리가 올라갔다. 태환의 등에 땀이 배었다.

전화 멜로디가 울린다.

-아빠, 어디까지 왔어요?

“병원 앞 사거리에서 신호 기다리고 있다. 금방 갈게.”

-아악! 다 죽여 버릴 거야!

라디오에선 죽기 전의 유민성의 목소리를 내보내고 있다. 이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것 같았다. 뉴스 앵커도 불안한 목소리로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게 말한다. 그러나 잘 훈련된 목소리일 뿐이다.

병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기다리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에 달린 화면으로 병원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최첨단 기술을 도입한 컨베이어식 병원입니다. 환자의 기다림과 비효율적인 시술이 완전히 해소된 시스템으로서 만족스런 회복을 최선으로 하는 병원이 되겠습니다.

화면에 미소를 지으며 컨베이어 벨트 위에 눕는 사람이 나오고, 잔잔한 음악이 깔린다. 천천히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치료를 받는다. 가는 도중에 원하는 시술이 있는 곳으로 벨트는 움직인다. 마취가 필요하면 들어가는 길에 마취가 이루어지고 소독은 기본이다.

태환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같이 탔던 여자는 2층에서 내렸다. 병원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는 것은 기분이 별로다. 태환은 엘리베이터 안이 커다란 관 같다고 생각했다.

“아빠. 왔어요?”

우정이 웃으며 반긴다. 하얀 제복이 아주 잘 어울린다. 커다란 금색 단추가 목부터 치마 끝까지 달려 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태환은 우정의 모습에 약간 어색함을 느낀다. 자신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파란 옷을 입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고, 우정은 흰옷을 입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다시 담배 생각이 났다.

“지금 방금 사람이 들어갔어요. 5분만 기다리세요. 휴게실에서 커피 마셔요.”

태환은 우정의 가느다란 손에 끌려 휴게실로 들어간다. 넓은 복도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없구나.”

우정은 태환에게 밀크커피를 주고 나서 그의 옆에 앉는다. 다리를 꼬고 앉는데, 하얀 구두에서는 윤이 난다.

“컨베이어식이니까 그렇죠. 정말 효율이 엄청나요. 대부분 오자마자 시술을 받을 수 있으니까 대부분 박스에 들어가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거죠.”

우정은 컨베이어가 움직이는 부분을 박스라고 불렀다. 태환은 휴게실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빗소리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여긴 모든 것이 깨끗해 보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수술을 하게 되면 사람이 하니?”

우정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찡그린다.

“아빠, 요즘 TV도 안 보세요? 요즘은 머신이 대부분 수술을 다 하잖아요.”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태환의 모습은 초조해 보인다. 여러 가지 기분 나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다리에서 여자가 자살한 것도 생각났다. 후르륵거리며 커피를 식도로 천천히 흘려보낸다. 카페인이 들어가자 좀 기분이 나았다.

“넌 안 마시니?”

“전 아침에도 마셨어요. 하루에 두 잔 이상 마시면 머리가 아파요. 커피에 과민성인가 봐요.”

아내도 그랬다. 밤에 일한다고 커피를 두 잔 마셨다가 일도 못하고, 밤새 머리 아프다고 태환을 괴롭혔다. 태환도 덩달아 밤을 새야 했었는데, 좋지 않은 추억도 아내가 없는 지금에는 행복했던 추억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우정이가 많이 노력했지만, 바람 빠진 공처럼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딸은 곧 결혼을 해야 할 것이고, 태환을 떠날 것이다.

태환은 찬찬히 딸의 얼굴을 관찰한다. 아내 닮은 코에 눈매는 자신을 닮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응…….이제 가봐야지.”

우정이 먼저 휴게실 밖으로 나가고 태환이 따라간다. 구두굽 소리가 복도에 퍼진다. 태환의 보폭은 딸의 그것보다 좁다.

복도 중간에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컨베이어 박스의 시작부분일 것이다. 박스는 보통 건물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태환은 이 병원의 박스가 그 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수술하는 기계들은 자신의 일하는 곳의 기계보다 몸집도 크고, 복잡할 것이다. 게다가 여러 과로 나누어져 있으니 상대적으로 많은 공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얀 방 한쪽 면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태환은 자신이 일하는 곳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형 컨베이어는 은빛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깨끗이 씻기는 하지만, 틈틈이 핏자국이 얼룩이 되어 남아있다. 하지만, 병원 컨베이어 벨트는 하얀 색으로 너무나 깨끗해 보였다.

우정은 방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으로 태환을 안내한다. 태환은 그곳에서 자신의 옷을 캐비닛에 넣고, 옆에 개어 있는 환자복을 입는다. 좀 큰 것 같아 어색하다. 옷 방을 나오면서 우정에게 묻는다.

“그냥 눕기만 하면 돼?”

사형 컨베이어에서는 강제로 죄수를 묶어야 했다. 그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미쳐 버리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컨베이어에 오르게 한다.

“내. 제가 여기서 검진 카드 꼽고, 아빠 등록 번호만 누르면 시작돼요. 컨베이어는 움직이다가 검진 박스 쪽으로 들어갈 거예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졸리시면 그냥 주무셔도 돼요. 도중에 피 뽑는다고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요.”

우정은 다가오더니 스위치가 달린 동그란 것을 내민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이 스위치를 누르세요. 그러면 컨베이어가 멈추고 우리 직원들이 달려갈 거예요. 장난으로 누르시진 말구요.”

태환은 컨베이어 위에 눕는다.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끼지만, 스위치가 달린 기계를 꽉 잡는다. 윙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저는 위에서 모니터로 보고 있을게요.”

컨베이어에 달린 기계가 태환의 손과 발을 묶는다.

“이거……. 꼭 이렇게 묶어야 하는 거니?”

“아빠도 참. 이건 원래 다 하는 거예요. 피 뽑는데 움직이면 안 되잖아요.”

우정은 방 한쪽에 있는 자판기 같은 기계 앞에 선다. 검진 카드를 그 안에 넣고, 태환의 등록 카드를 넣는다. 기계가 잠시 반짝인다. 태환은 천천히 방 옆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이동한다.

태환이 구멍으로 들어간 뒤에도 우정은 아직도 기계 앞에 서 있었다.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안감을 나타냈다. 정상적이라면 기계의 모니터에 건강 검진 부분만 불이 들어와야 하는데, 다른 부분도 모두 깜빡거리는 것이다.

우정은 취소를 눌렀다. 뭔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아서 더욱 난감했다. 아빠 앞에서 짓고 있는 미소는 이미 땀 속에 사라져 버렸다.

취소 버튼은 작동하지 않았다. 기계를 주먹으로 몇 번 때리다가 모니터실로 달려갔다. 프로그램 담당자인 김성주가 모니터 실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기계가 이상해요.”

우정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김성주의 등도 젖어 있다.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김성주는 눈은 빠르게 움직이는 모니터의 글자들을 따라간다. 흰색의 글자들은 도중에 깨져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 아빠 어떻게 해요.”

우정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태환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우선 컨베이어 통로에 불이 꺼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컨베이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고개를 돌려도 빛이 보이지 않았다. 우정이 준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갈등하다가 이내 눌렀다. 그러나 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 뒤에 통로를 밝히는 형광등이 켜졌다. 앞쪽에 벨트의 분기점이 보였다. 저 곳에서 건강 검진 벨트 쪽으로 방향이 바뀐다. 그런데 태환이 누워 있는 벨트는 그곳을 지나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태환은 불안한 듯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긴 통로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도중에 사형 컨베이어처럼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환은 카메라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 문제가 생겼어요! 도와주세요!”

태환의 머리 속에 죄수들이 소리 지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니터 실의 스피커로 태환의 목소리가 전달된다. 우정은 두려움에 소리 지르고 있는 아빠를 눈물만 흘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선 전원을 내리고 환자들을 대피 시켜야겠어요. 우정씨 너무 걱정 말아요. 별 문제 없을 거예요.”

김성주는 우정을 남겨놓은 채 모니터 실을 나온다. 잠시 후 돌아온 김성주의 말은 뜻밖이었다.

“전원이 차단되지 않아요.”

우정은 놀란 얼굴로 김성주를 바라보았다. 김성주는 가쁜 숨을 내쉬며 모니터를 보고 있다. 그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이 보인다. 우정도 그를 따라 모니터로 눈을 돌린다. 모니터에 태환의 모습이 비친다. OS라고 써진 터널로 들어가는 중이다.

태환은 녹음된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인공 관절 이식술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환자분은 편안한 마음으로…….

인공 관절 이식? 멀쩡한 사람에게 인공 관절을 이식한다고? 태환은 놀라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손과 발의 포박만 풀면 벨트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을 조금도 뺄 수가 없었다. 곧 몸에 힘이 빠졌다.

-마취 주사가 들어갑니다. 눈을 뜨면 수술이 끝나 있고, 2주간의 회복기를 거쳐서 관절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녹음된 방송이 나온다. 주사기 하나가 태환을 따라오고 있다. 벽에 달린 로봇 팔이 태환의 팔을 고정시키고, 주사액을 몸속으로 밀어 넣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정은 태환의 수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환자복이 벗겨진 뒤, 골반 부분에서 절개해 들어가서 대퇴골단을 부수기 시작한다. 골 단은 곧 부서졌고, 로봇 팔은 대퇴골 두를 끄집어내고 흡입기로 뼛가루를 빨아들인다.

드릴이 대퇴골의 수질을 뚫는다. 그런 후에 인공 관절이 그곳에 삽입된다. 삽입될 때는 커다란 망치가 작동한다.

우정은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는다. 김성주는 우정을 의자에 앉힌다 하지만, 그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등은 땀으로 샤워를 한 듯하다.

수술이 끝나고 태환의 정맥으로 주사바늘 하나가 꽂힌다. 발목까지 내려갔던 환자복을 로봇 팔이 끌어올린다. 태환은 사타구니 부근에 고통을 느끼며 눈을 뜬다. 고개를 들어 고통이 느껴지는 골반 쪽을 바라본다. 환자복 때문에 피부 쪽을 확인 할 수가 없지만, 큰 수술을 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태환은 숨을 크게 몰아쉰다. 두통이 뇌의 주름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것 같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나 터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벨트는 직선으로 나아가다가 옆에 뚫린 구멍으로 태환을 끌고 간다. 다시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방송이 흘러나온다.

-팔의 감염으로 인한 절단 수술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절단 수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몸속의 모든 피가 머리로 몰리는 것 같았다. 태환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절규가 통로 사이에서 안개처럼 사라진다.

“어떻게 좀 해봐요!”

“비상 시스템도 가동이 안돼요. 전화기도 불통이고요.”

우정도 소방서에 전화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안테나 표시가 뜨지 않았다. 우정은 모니터 실을 나왔다. 전파 장애 때문에 전화를 못 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도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방화 셔터가 모든 방향의 길을 막았다.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태환의 앞에 모니터가 나타났다.

-Necrotizing fascitis, Amputation.(괴사성 근막염, 절단)

곧 글자가 꺼지고 모니터는 벽면으로 사라진다. 본능적으로 절단이라는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봇팔과 함께 주사기가 따라온다. 정맥에 다시 주사액이 투입된다. 태환은 눈을 감는다.

TV에서는 갑자기 퍼진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방송을 하고 있다. 전문가는 바이러스가 정부의 컴퓨터에 잠복해 있다가 어떤 신호에 의해 활성화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그 근원지를 찾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성주는 모니터로 태환의 팔이 어깨 바로 아래에서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 절망감에 가득 찬 눈이었으나 그나마 우정이 밖으로 나가서 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환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어깨 쪽의 피부가 당겨지더니 잘린 면을 덮는다. 스탬플러 같은 기계가 피부를 붙인다. 붕대가 빠르게 어깨까지 감긴다. 머신들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수술을 끝마쳤다.

김성주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쥔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바닥이 없는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만약……. 이것이 끝이 아니라면?

병원에는 수많은 수술터널이 있다. 시스템 고장으로 우정의 아버지가 필요 없는 수술 두 개를 했다. 시스템이 정지하지 않는다면 아마 다른 수술까지 준비될 것이다. 우정도 시술 버튼의 모든 부분에 불이 들어왔었다고 했다.

모니터 실을 밝히는 불빛이 잠시 어두워 졌다가 켜진다. 태환의 목정맥으로 마취 깨는 액체가 주입된다.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 때문인지 그 아래쪽으로 감각이 없어진 듯 했다.

설마…….

태환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멀쩡하게 있어야 할 팔이 없다. 고통보다는 황당함에 눈물이 나온다.

“나를 여기서 꺼내달란 말이야!”

사형 컨베이어에서 죄수들이 하던 말들을 태환도 외친다.

도대체 이 상황은 언제 끝나는 것인가? 여기 관리자는 뭐하고 있는 거지? 우정이는 어디 있는 거야? 태환은 모든 것이 너무 답답했다. 컨베이어 터널 속에서 10년은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꺼내준다면 심장이라도 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가? 내장을 뜯거나 피를 모조리 뽑아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제 죽은 유민성처럼 손톱을 다 뜯어버릴 지도 모른다. 태환은 몸이 으스스 떨렸다.

사실 컨베이어 위의 죄수들의 고통을 상상해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태환의 상상은 조금 미화된 죽음이었다. 상상의 끝엔 천국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니…….

“아빠는 어때요?”

모니터실로 비실비실 들어온 우정은 화면에 태환의 모습을 찾는다. 얼굴에 검은 눈물이 얼룩져 있다. 김성주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한다.

“팔이 잘리셨어.”

“아…….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우정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그럴 리가 없다고 되새긴다. 신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아버지의 잘린 손을 발견한 우정은 짧게 소리를 지른다. 김성주는 쓰러지려는 우정의 어깨를 안아 올린다.

“지금 쓰러지면 안 돼. 사실 문제가 더 심각해. 우정의 아버지는 아직도 시술이 여러 개 남아있어. 그리고 화면은 우정의 아버지만 비추고 있지만, 다른 환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다 막혔어요.”

아침에 깔끔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이끼처럼 흘러내렸다.

“우선 태환씨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봐야겠어. 내가 컨베이어 안으로 들어가서라도 막아야지.”

우정은 아직도 울상을 짓고 있다.

“막혔다니까요. 다 막혔어요. 방화 셔터가 나가는 길을 다 막았어요.”

“알았어. 그래도 어떻게든 뚫고 나가야지.”

김성주는 우정의 어깨를 놓고, 키보드를 두들긴다. 입으로는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다. 바로 앞의 모니터가 깨진 글자들로 채워진다. 우정도 뭔가를 중얼거린다.

모니터가 몇 번 깜빡거리더니 ‘56/M 이태환’이라는 글자가 뜬다.

“기다려봐.”

우정에게 말하는 건지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화면에 더 많은 글자들이 올라온다.

-OS PS ENT GS CS NS (정형외과,성형외과,이비인후과,일반외과,흉부외과,신경외과)

김성주와 우정의 얼굴이 납으로 만든 인형처럼 굳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스피커를 통해 태환의 신음소리만 들려온다.

김성주가 먼저 입을 연다.

“OS는 이미 끝났으니까 이제 성형외과 차례인가?”

우정의 목소리는 현이 짧은 악기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다.

“무슨……. 시술을 할 건가요?”

김성주는 마우스를 PS(성형외과)라는 글자 위에 놓고 클릭 한다. 로딩이라는 글자가 뜨고 조금 뒤 모니터에 글자가 나왔다.

-Le Fort I advancement osteotomy (상악왜소증 치료)
osteotomy of mandibular body(하악체 절골술)
Reconstructive Surgery of Eyelids(눈꺼풀 제건술)

제기랄. 김성주는 속으로 외친다. 이걸 다 한다면 얼굴이 걸레가 될 것이다. 문제가 있는 얼굴도 아닌데 이렇게 칼을 많이 대야 하다니…….

우정은 눈을 감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눈을 뜬 순간 자신의 방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스피커로 들려오는 아빠의 신음소리는……. 틀림없는 현실이다.

김성주는 화면에 뜬 차트를 살펴보다가, 심장이 덜컹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우정을 본다. 다행히 우정은 눈을 감고 있고, 화면을 보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다시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모니터에 그 글자는 선명하게 쓰여 있다.

-No anesthetic. (마취하지 않음)

김성주는 태환이 성형외과 터널을 향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마취 없이 수술이 진행될 것이다. 우정이 비명 소리를 못 듣게 하려 스피커를 끌려고 했으나, 갑자기 모든 불빛이 꺼졌다. 우정과 김성주는 어둠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들은 미세하게 느껴지는 진동으로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성주는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니터 앞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쥐어 잡는다.

그 때, 태환은 어둠 속에서 얼굴의 피부를 절개하기 위해 준비 중인 전기톱날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밤에 뉴스는 30분 먼저 시작했다. 앵커는 침을 튀기며 특보를 전하고 있다.

-유민성의 집의 지하 창고에서 발견된 CD에서 다른 범행이 녹화된 것이 확인되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첫 범행은 사형 컨베이어 관리자인 이태환에게 앙심을 품고 이태환의 아내를 죽인 것으로, 지하에서 발견된 일기장에 적혀있다고 경찰은 말했습니다. ‘이태환은 누명을 쓰고 사형 컨베이어로 들어간 나의 형을 더욱 고통스럽게 죽였다. 이태환에게 형의 고통을 뛰어넘는 것을 안겨주겠다.’고 일기장에 썼습니다.

화면에는 발견된 일기장과 여러 장의 CD가 보인다.

-이태환의 아내는 유민성의 첫 식인범행의 피해자로, 유민성은 그녀의 머리에 구멍을 뚫고, 뇌를 빨아먹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그 모습이 담긴 30분짜리 동영상을 일반에 공개할지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10월 23일, 어제 이태환의 시신이 자유 종합 병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유민성은 종합 병원의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미리 설치해 놓고, 그 트리거로 이태환의 주민 등록 번호를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태환은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컨베이어 치료 시스템 속에서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사인은 쇼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11시경 이태환의 딸인 이우정씨가 자유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이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써 이우정씨는 50번째 자유 다리 투신자살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자유시는 나흘째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길 운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The End
사 형 컨 베 이 어 3
네온사인은 어느 때 보다 더 흔들거렸다. 저희들끼리 짝을 맞추고, 거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처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인다. 내 걸음에 박자를 맞추는 건지, 아니면 음악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둘 다 인 것 같다.
내 입술 사이의 주름을 따라 짙은 술 냄새가 나지만, 이 거리의 취인들에 비해 더 마신 것인지는 모르겠고, 모두가 술을 먹어야 하는 날인 양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입에서 알콜 냄새가 풍긴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거리에는 양복 입은 사람도 있고, 젊은 힙합 바지도 있고, 외국인도 있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도 있다. 양쪽으로 술집이 들어선 거리에서 모든 사람이 네온사인의 리듬에 따라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어쩌면 내 눈만 흔들거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노래 소리는 노래방의 좁은 통로에 붙어 있는 먼지 쌓인 스피커에서 들려온다. 드럼 소리가 퉁퉁거리며 먼지를 털어 낼 것 같지만, 스피커 위에는 여전히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그 대각선에 위치한 노래방에서도 빨간 불빛과 함께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두 가지 노래는 행인의 귀를 혼란시킨다. 노래 소리에서도 술 냄새가 난다.
한때의 무리가 어두운 하늘 아래 대낮 같이 밝은 거리를 지나간다.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노래 소리와 어울려 한차례의 소음을 만들어 낸다. 반짝이는 네온 불빛에 가장 어울리는 말인 양, 욕지거리가 무리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고 무리는 한바탕 웃고 다시 술 냄새를 거리에 흩뿌린다. 술 냄새를 맡은 전단지가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한바탕 축제를 벌인 것처럼 거리의 여기저기를 장식한다. 무리 중에 어느 누구도 전단지에 눈을 주지 않지만, 전단지는 그 자체가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거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무리에서 가장 비틀거리는, 하얀 웃옷에 술을 쏟은 듯이 젖어 있는 남자가 술집 앞의 간판을 치기 시작한다. 깨지는 소리와 남자의 고함 소리가 잠시 노래 소리를 덮는다. 무리는 쓰러질 것 같은 남자를 부축해 더 빨리 움직인다. 남자는 병든 닭처럼 눈을 뜨고, 입에선 침이 흐른다. 남자를 부축하고 있는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의 LA Lakers라고 써진 점퍼 위에 침이 묻고 있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구역질하는 소리가 나고, 무리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춘다. 나이트 벽보로 가득한 벽에 토사물을 남기고 무리 중의 여자 목소리에는 술 냄새가 나는 짜증이 섞여 있다. 잠시 멈춰선 틈을 타서 담배를 꺼내 문다. 멀리서 봐도 화장 냄새가 느껴지는 여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짜증 섞인 말들을 토해낸다. 여자가 토해낸 말들은 토사물을 남기지 않고, 담배 연기가 되어 밤하늘에 노래 소리와 함께 퍼진다.
무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깨진 간판 조각과 토사물, 여자의 진한 화장 향기가 남는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지나가고, 새로운 향기들이 그 위에 깔린다.
외국인 한 명이 술집 앞에 서 있다.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외국인에게 말을 걸어 보려 다가간다. 까만 힙합 바지에 티는 무릎에 닿으려 한다. 남자의 다리는 막 마라톤을 끝낸 사람처럼 풀려 있다. 그의 혀도 풀려서 하고자 하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거의 내장 속에서 풍겨 나오는 알콜이 남자의 뜻을 더 잘 반영하고, 그걸 맡는 외국인은 고개만 끄덕일 뿐 말도 없고, 표정도 굳어 있다. 이내 대화는 시들시들해 지고 외국인은 자신의 노란 머리를 한번 만지더니 자리를 떠난다.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과 떠들다가 한바탕 웃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지만, 웃음은 전염되지 않고 다시 네온사인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거리는 사람을 잡아먹고, 다시 토해낸다. 거리를 둘러싼 술집이라는 위는 잡아들인 사람들을 술이라는 위산으로 덮어씌우고, 거리로 토해내고, 거리는 다시 다른 거리로 사람들을 토해낸다. 토해내 질 때마다 조금씩 몸은 흐트러지고, 머리는 헝클어진다.
갈색으로 염색한 내 머리도 흐트러져 있다. 날씨는 춥지 않지만, 술집 앞에 있는 계단에서 한기가 올라와 내 엉덩이를 파고든다. 몽롱한 상태에서 엉덩이에 정신을 집중한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일어서면 되는 것이지만, 알콜은 이상한 의지가 생기게 한다. 이를테면 차가움에 반항하는 행위 같은 것이다.
눈으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것도 오래 못 가는 것이 눈꺼풀의 무게가 한사람에게 오래 눈이 머무르게 하는 것을 막았다. 몸의 일부는 피곤했고, 다른 부분은 피곤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행동을 관장하는 뇌가 이미 알콜에 굴복했고, 위에선 신물이 올라왔다. 이미 게워낸 상태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거리의 퍼지는 최신 가요는 이미 오염되었지만, 가끔씩 머리 속까지 파고드는 맑은 공기가 후두를 파고 들 때도 있었다. 나는 더욱 많은 공기를 마시려고 숨을 들이킨다. 감은 눈에서 폐를 펴는 힘이 약하다.
“괜찮아?”
친구 하나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친구의 손에는 땀이 배어 있다.
“4차는 언제 가냐?”
친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뭔가를 물어보는 것은 내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어기전이다. 친구는 어깨에 올렸던 손을 들어 그 손에 문신처럼 걸려 있는 시계를 들여다 본다. 눈은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힘이 없다.
“모르겠다. 시간도 애매하고... 아마 다들 집에 갈 거야.”
시간도 한계에 닿았고, 어쩌면 내 자신도 한계에 닿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오기가 발동하는 날이다. 이런 기분이면 보통의 주량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후배들은?”
“거의 다 갔어.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빨리 들어와.”
친구는 술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가 들어가자 손등과 볼에 와 닿는 한기가 느껴진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영 쉽지가 않다. 머리 속에선 친구와 내가 마음에 두었던 후배가 키스하는 장면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반복되었다. 흑백으로 재현되고, 다시 컬러로...
제기랄.
머리 속에서 그 화면이 반복될수록 피는 역류하는 듯 했고, 세상 모든 것을 내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으로 신맛이 올라왔고, 기억까지도 다 토해내고 싶었다. 천천히 일어서며 친구가 들어간 구멍을 바라본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지금부터의 일은 타버린 사진처럼 아주 작은 부분만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곳에 더 오래 있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골목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어떤 전단지도 나를 잡지 않았다.
목적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는 게 우선이다. 비틀거리면서도 달렸다. 사람들의 어깨에 치이며 차가운 밤공기를 폐 깊숙이 받아 들였다. 내 몸 속으로 들어온 시원함은 어느 정도 알콜과 싸울 수 있다. 벼랑으로 치닫고 있는 내 본능을 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숨이 차서 잠시 멈춰야 했던 지점에도 술집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또 나를 먹으려는 것인가? 헐떡거리며 옆에 있는 술집의 간판을 본다.
paradise
여기에 들어가면 천사 옷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술을 가져오는가? 재미있는 상상에 잠시 웃다가, 이런 상황에 웃는 내가 한심해서 다시 웃는다. 행인들의 시선이 뒷목을 간지른다. 그만큼 술집이 나를 토해냈고, 내 몸이 흐트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또 술집을 찾고 있고, 그것만이 현실의 무게를 잊게 해주는 유일한 비상구라고 느껴졌다. 뛰고, 숨차고, 잠시 쉼으로 인해서 조금 술이 깬 상태에서도 본능의 외침은 알콜을 원했고, 내 눈은 paradise를 바라보고 있다. 두 달 동안 자르지 않아 눈을 찌르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호흡을 하느라 굽혀 있던 허리를 편다.
하지만,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발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가 생각해 봤는데, 몽롱한 정신으론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어쨌든 머리와 다리의 싸움은 5분 정도 술집 앞에서 이루어졌다.
“어? 오빠 뭐해요?”
심장이 소리를 알아보고 혼자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알아챈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술집 간판에 머물러 있던 시선만이 후배에게 향한다.
“집에 가시는 거예요? 전 잠깐 이쪽에서 친구 만나고 다시 들어가는 길인데...”
본능은 다시 도망을 가기 시작한다. 시키지도 않은 말을 혀가 내뱉는다.
“아... 나는 이 술집에서 동창들 만나기로 했어.”
혀가 꼬이면서도 더듬지 않는다. 이 정도면 나의 거짓말에도 신임이 갈 것이다.
천천히 돌아서 paradise라고 써진 문으로 들어간다. 후배에겐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떨릴까봐 두려웠던 것도 있지만, 이번에는 발이 먼저 움직여 몸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이다.
후배가 뒤에서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내 귀는 작은 목소리를 잡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상태가 아니다.
paradise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누구를 찾으러 온 마냥 바에서부터 구석 자리까지 한번씩 훑는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과 바는 자신들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사람들로만 가득한 것 같다. 얼굴을 어둠에 의지한 채 저마다 자신의 화제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테이블에서 흘러내릴 정도로 많이 내 놓지도 않으며, 옆 테이블에서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파란 불빛이 한 줄로 장식된 바의 끝 부분에 가서 앉는다. 동그랗고 빨간 의자가 파란빛을 먹고 있다. 양주로 가득 찬 장식장 앞에 서 있는 여자 바텐더의 목이 길고, 희다. 내게 다가오는데, 검은 옷에 걸린 장식들이 요란하게 불빛을 반사하고 있다. 갈색의 머리 안으로 검은머리가 자라 나오고 있고, 그 속에서 샴푸냄새와 땀내가 섞여 나온다.
여자는 바를 경계로 하여 내 앞에 서서 아무 말이 없다.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옷에 걸린 이름표를 본다. miyu. 가명인가?
“이름이 미유에요?”
여자는 당황한 듯이 손을 입에 가져간다.
“아... 내.”
“아이스 하우스 한 병 주세요.”
여자는 흔들리는 눈빛을 수습하고, 맥주를 꺼내온다. 내 혀는 제멋대로 춤추고 있다. 맥주도 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목구멍을 연다. 소주가 지나갔던 자리에 맥주가 지나가고, 알콜은 뇌를 만난 후 나를 지배한다.
병을 반 정도 비웠을 때 여자가 다가온다. 손에 들린 물 컵을 내 앞에 내민다.
“혼자 오셨나 봐요?”
물 컵에 떠 있는 얼음을 보다가 어릴 때 얼음 때문에 이빨이 깨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손으로 컵 옆에 하얗게 물이 서린 부분을 만지작거린다.
“네.”
짧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동정심을 유발하고 싶지는 않지만, 표정조차 불쌍해지고 있다. 여자의 눈을 올려다본다. 속눈썹이 길다.
“무슨 일 있었나요?”
여자는 바에 팔을 괴고, 바 안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나와 눈높이를 낮춘다. 처음 들어 왔을 때보다 사람은 많이 줄어 한산해 보인다. 나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쉰다. 여자가 그 모습에 웃음 짓는다.
무슨 일.... 무슨 일 없는 사람은 없다. 다들 일을 가슴에 품고 산다.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남에겐 안 중요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간혹 둘 다에게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일이 있으면 공감대가 형성되고, 토론 거리가 생기고, 어쩌다 살을 섞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공감대가 깨지면 보이지 않는 앙금만을 남기고 제 갈 길로 사라진다. 내가 혼자 술을 먹게 된 일도 여자에게 중요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한낱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여자들의 수다에 안주가 될 뿐이다.
얼음물을 들이키자 머리 속까지 냉기가 올라와 몸 전체를 움츠리게 만들고, 표정도 찡그려진다. 여자는 아직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냥.. 뭐... 그렇고 그런 일이죠. 도시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로맨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애틋한 것은 아니고요. 순정 만화처럼... 해피앤드도 아니죠.”
혀가 미끄러져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혀 보다 멀쩡한 귀가 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여자는 자신이 말상대가 되어 주고 싶은 모양이다.
“음.. 그러셨구나.”
여자는 천천히 아래위로 고개를 흔든다. 로맨스는 단순한 것이고, 술 먹고 찾아오는 남자들의 것은 더욱 뻔하다. 여자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거만해 보이지는 않는데, 얼굴에 가느다란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기. 가게 앞에 흰 선 보셨어요? 사람 모양으로.”
여자가 화제를 돌린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저 혼자 말을 계속한다.
“어제 이 건물에서 사람이 뛰어 내렸어요. 여학생이었는데 여기 와서 술을 먹었거든요. 동료들이랑 와서 술 먹고, 토하고.... 손님 많을 때였는데, 갑자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죠.”
어쩌면 내가 이 술집에 들어오기 전에 그 흰 선 안에 서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말을 마친 새로운 손님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여자가 할 말이 더 있는지 없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화젯거리를 제공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대화란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보통 때 같으면 그것도 좋은 화젯거리일 것이다. 투신자살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의 떨림과 자신을 동일화 시켜 스릴감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동정을 하거나 욕을 한다.
하얀 선으로 변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고, 고민에 찌들어 옥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한 하나의 충동감이 일을 부추겼고, 결과로 하얀 선이 생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얀 선이 지워지기 전에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그 일에 대한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가끔 동료들과 술을 먹거나 미팅을 할 때 알콜의 힘을 빌려 그 기억을 떠올리고는 돈 안 드는 안주거리로 사용하기는 한다.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여자가 다가온다.
“그런데 말이죠. 떨어지던 여자가 지나가는 사람 위로 떨어졌어요. 지나가던 사람은 목뼈와 척추를 다쳤대요.”
내가 묻는다.
“지나가던 사람은 남자에요?”
“아니요. 여자요. 부딪치는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떨어진 여자는 머리를 땅에 박고 즉사했지요. 그런데 그 여자, 그러니까 떨어진 여자의 발이 지나가던 여자의 몸 위에 올라가 있던 거예요. 아무도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조금 뒤에 경찰이 왔는데, 그 멍청한 순경이 시체랑 쓰러진 여자를 삥 둘러서 스프레이를 뿌리지 않겠어요?”
여자의 입에서 향긋한 단내가 났다. 재즈의 반복적인 선율이 바 위에서 춤춘다. 나는 입을 열어 말을 하는 대신 맥주를 들이 붙는다. 다시 속이 안 좋다.
여자는 계속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다리에서 몇 명 자살했는지 아세요?”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꾸 묻는다. 알콜이 섞인 공기 어두운 공간 안에 낮게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내 발 밑에서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건너려면 작은 배가 필요할 것 같다.
“늘 두세 명씩 뛰어내리지 않습니까..”
술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두 가지 소리는 서로 반대되면서도 죽을 때까지 숫자를 맞춰나갈 것이다.
“오늘만 열두 명 죽었어요. 신기하죠? 한 명은 몸에 불을 지르고 뛰어 내렸대요. 죽으면서도 한번 튀어 보려고 그랬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자는 껌을 씹고 있다. 말을 잠깐 쉴 때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을 오물거렸다. 입에서 나는 단내는 껌 향기일 것이다.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술병을 비웠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술병을 가리키고 다시 일자를 그렸다. 여자는 ‘네.’하고 말한 뒤 한 병을 더 꺼내온다.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할로겐램프 세 개중 두 개는 꺼져 있다. 아래 조약돌을 유리로 덮어놓은 바닥은 내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테이블은 이제 많이 비어 있다. 구석 쪽의 테이블에는 나처럼 혼자서 술을 먹는 사람이 있다.
고개를 살짝 드는데 나와 눈이 잠깐 마주친다. 어쩌면 술기운에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
“아는 분이에요?”
여자가 묻는다. 여자와의 대화에 무료해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내 앞에 있는 술병을 든다. 그리고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술을 먹는 남자 쪽으로 다가간다. 어차피 혼자 술 먹는 놈들은 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고독이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고, 말상대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남자 앞에 앉아 테이블에 술을 내려놓는다. 불빛은 어두워 남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얀 눈이 뭔가에 반짝였다가 이내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약간 섬뜩한 느낌과 술김에 왔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혼자서 술 마시는 것 같던데, 저도 그러니 우리 얘기나 하며 술 먹죠.”
보통 때면 튀어나오지 않을 말들이 지가 알아서 나온다. 테이블 위로 길게 내려온 전등 아래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온다. 평범하게 생긴 남잔데, 눈 옆에 주름이 조금 있고,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러죠. 저도 혼자 있기 심심하던 참이었습니다.”
다행히 남자는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 쪽을 바라보던 여자도 이미 관심을 끊고, 행주로 바를 닦고 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형님이라 부를 테니, 말 놓으세요.”
말을 풀어 가는 것은 친근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약간 밑지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하면 이 남자가 술값을 모두 지불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혀가 덜 꼬이는 느낌이었고, 이 정도면 뻔뻔한 취객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다.
남자는 몸에 달라붙는 듯한 검은 옷을 입었고, 앞머리는 눈을 살짝 가릴 정도로 내려와 있다. 머리카락 사이로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눈이 드러난다.
“그러지.”
남자는 짧게 대답하고,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올린다. 나도 술병을 들어 남자의 잔에 한 번 붙인 뒤 입에 갖다 댄다. 혀에 닿는 감촉과 흘러드는 느낌이 중추신경을 만족시키고 있다.
“자네는 학생인가?”
남자의 목소리에는 깊이가 있다. 바닥에 깔린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낮게 깔려 내 귀로 들어온다.
“졸업한지 일 년 지났고, 지금은 백수입니다.”
백수라고 말하면서도 별로 부끄러움은 없었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찾아 쉬지 않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희미하지만 곧 확고한 답을 찾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답이란 언제나 고민을 원하고, 고민을 충분히 한 사람에겐 그 모습을 보여주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생각의 고삐를 놓는 순간 세상은 비참해진다.
남자는 손을 올려 여자를 부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맥주를 피처로 더 시키고, 잔 하나를 더 주문한다. 내 술병이 비었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다.
“다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지.”
남자는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비우고, 여자가 술을 가져 올 때까지 기다린다. 고개를 살짝 돌린 남자의 어설프게 면도한 구레나룻이 보인다. 그것만으로 이 남자가 결혼을 안 했을 것이라는 추리를 해낼 수 있다.
술이 오고, 말이 오가고, 술이 다시 목구멍을 지난다. 술을 들어가게끔 되어 있고, 말은 나오게 되어 있고, 돈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라도 거스르려 하면 조화가 깨지고, 정상적인 즐거움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나는 그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 후배 때문에 속상했던 일을 잊으면서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자네 운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마 내 얼굴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일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제가 원한다고 해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자면.... 노력해도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저를 비관주의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현실과 운명은 그런 거니까. 지금까지 전 그렇게 살아왔고, 제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걸어왔어요.”
술기운 때문에 내 말에는 끊김이 많다. 남자는 차분하게 내 말을 끝까지 듣는다. 내 눈은 여러 번 감았다 떴다 하지만, 남자의 눈은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이 그의 주위에서만 멈춰버린 느낌이다.
남자의 관자놀이 아래쪽이 씰룩거리는데, 내가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했다. 시선을 의식하는 듯 손바닥으로 볼이 있는 부분을 살짝 문지른다. 지루해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의 생각을 조금도 읽을 수가 없다. 석고를 박아 넣은 듯한 눈은 미동도 없이 저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듯 하다.
저 눈.... 어디선가.
전에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한 사람의 시신을 건져낸 것을 본 적이 있다. 대학 들어와서 두 번째 여자 친구와 고수부지를 걷고 있었는데, 비가 안개를 타고 내리는 저녁이었다. 으스스한 느낌에 데이트는 흥이 나지 않았고, 축축한 공기가 꾸물거리며 콧구멍을 쑤셨다. 내 팔뚝을 잡고 있는 여자 친구의 손에서도 온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강가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 친구는 다른 쪽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지만, 내 발은 이미 강가 쪽으로 힘을 쏟고 있었다. 내게는 뭔가 색다른 일이 필요했다.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있었고, 그 무리를 해쳐 나오자 검은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까만 우산을 들고 있는 중년에게 물었다. 그에게는 축축한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입고 있는 밤색 양복을 뒤로 젖히면 그 속에는 엄청난 곰팡이가 집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자살한 사람이에요. 다리에서 뛰어 내렸죠. 뭐... 흔한 일이지만, 이 여자는 그리 멀리 떠내려가지 않고, 발견됐어요.”
중년의 입에서도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부근의 모든 것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빗물에 젖은 풀들은 사람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있다. 검은 색 우비들 사이에 여자도 풀처럼 쓰러져 있다.
강물에 투명해지고 흙 묻은 원피스. 여자의 허벅다리까지 치마는 올라와 있고, 발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는데 피는 보이지 않는다. 눈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구 죽었나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게 묻는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호기심이 되어 접혀 있다. 나는 중년이 내게 말했던 것을 녹음한 듯이 그대로 남자에게 말한다.
“에이... 그런 일은 흔하잖아....”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우산에 얼굴을 파묻고, 풀밭 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건물 사이로 사라진다. 무표정하게 시체를 바라보던 여자친구가 입을 연다.
“눈이 징그러워...”
그 말에 나도 시체의 눈을 바라본다.
“징그러워.”
여자친구가 반복하며 말한다. 내 팔을 더 세게 잡아 내 품으로 숨어든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눈은 뭔가 투명한 젤리 같은 것이 끼어 있는 듯 했고, 움직임이 없었으나 내가 움직이면 곧바로 눈을 돌려 바라 볼 것 같았다. 내 몸은 비를 맞지 않아도 떨리고 있었다. 그 눈은 움직이지 않아도 주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관찰하는 것 같아서, 어안처럼 위를 보고 있어도 주위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그런 느낌. 움직이는 순간 내 동작이 포착되어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앞에서 술잔을 드는 남자가 바로 그런 눈을 가지고 있다. 눈동자는 멈춰 있지만, 그 속에는 이 술집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고, 우리는 원형 어항 속에 들어 있는 관상어일 뿐이다. 나와 바텐더 여자, 그리고 몇몇 테이블의 사람들이 모두 남자의 눈에 감시당한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그렇게 말하기는 해도 자네는 참 낙천적인 것 같군.”
남자는 짧게 말한다. 술기운 때문인지 다리가 떨린다. 노래가 바뀌고, 술집의 분위기가 바뀌는 듯 하지만,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왼손을 허벅지 위에 놓는데 떨림이 손바닥을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다.
“낙천적이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목이 타서 다시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긴다. 맥주를 마시는 것은 내 마음을 숨겨보려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바의 여자가 음악 소리에 맞추어 살짝 허리를 흔들며 리듬을 타는데, 내게는 음악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절 보면 그런 얘기 가끔 해요. 우선 표정이 그렇잖아요. 얼굴도 하얗고, 잘 웃고.... 하지만, 그건 가면일 뿐이에요. 한꺼풀 벗겨내면 제 실체가 드러나죠. 자기 모순에 허우적거리는 모습과 비관주의, 니힐리즘 같은 거죠.”
내 다리의 떨림이 내장을 타고, 목구멍까지 올라와 성대를 괴롭히고 있지만, 혀에 힘을 주어 말의 떨림을 막는다. 하지만, 남자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 비관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걸지 않아. 정말로 자기 모순에 빠진 건가?”
자기 모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내 마음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변동이 많으며 여러 가지가 같이 폭발하기도 한다. 뒤죽박죽이고 틀이 없다. 그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답답해서 비관주의나 니힐리즘 따위에 한정시켜 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정해 버리면 이 남자에게 먹혀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다. 내 속이 샅샅이 분석되는 순간 나는 어항 속에서 꺼내져 바닥에 내 팽개쳐지고, 내장이 터지고 뇌수가 바닥에 흐르는 상상을 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가 듣는 노래들과 상상들은 이상하게 죽음과 연관되어 있어요.”
남자의 폐에 들어있는 공기가 기도를 타고 성대를 스친다.
“대학생들은 종종 어떤 한계적인 상황에서 도피를 꿈꾸는데, 그것의 좋은 소재가 죽음이지. 과거부터 죽음은 너무나도 많은 종교적 상상력과 결합되어 있어. 그것은 신비주의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데, 요즘은 그것을 멋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결국 죽음의 실체도 모른 채 어디선가 자살을 시도하는 거지. ”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남자의 말을 듣는다. 마음 속에는 남자의 말에 대한 반항심이 끓어 오르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려 입을 다문다. 내 감정 하나하나도 옷을 벗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머리 속을 채우고 있다.
“요즘은 TV에서도 실재로 죽이는 것을 보여주지 않나? 이젠 죽음이 오락이 되어 버린 시대야. 잔인한 죽음과 성스러운 죽음을 다 방송하면 과연 죽음은 무엇이 되느냔 말이지. 한낱 오락거리밖에 되지 않는 거야.”
방광이 뇌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혀에 힘을 준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다리에도 힘을 준다. 내 뒤통수에 남자의 시선이 끊어지지 않음을 느낀다. 내 걸음은 비록 점잖으나, 교미하는 날파리처럼 마음은 급하게 화장실로 가는 복도를 지나고 있다.
남자의 시선이 미치지 않은 곳까지 가자 몸 속의 혈관이 동시에 이완되는 듯 했고, 조금 두통이 느껴졌다. 복도 벽에 살짝 기대어 있다가 toilet이라는 표시를 따라 걸었다. 다리의 떨림은 바로 걷는 것을 힘들게 했고,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게 만들었다. 여자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화장을 짙게 하고 머리를 노랗게 한 여자가 나오며, 내게 눈을 흘긴다. 화장품 냄새가 열려있는 화장실의 지린내와 섞여 후각을 자극한다.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얼굴이 날아간 여자와의 잠자리는 어떨까? 내 시선이 여자를 따라간다. 여자는 내게서 시선을 피하고 도망치듯이 복도를 빠져나간다. 그에 맞추어 구두소리도 작아진다.
여자 화장실을 지나치려는데, 뭔가 흰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여자 화장실 안을 들여다본다. 가장 안쪽에 있는 칸의 문이 열려 있고, 거기로 여자의 얼굴이 삐져 나와있다. 바닥에 키스를 하듯이 아래쪽으로 얼굴을 하고 입술이 바닥에 닿아있는데, 뒷머리 쪽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그 안쪽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렇게 바닥으로 얼굴만 삐죽 나오려면 괴이한 모습으로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들어가 보려다가 범인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친다. 바닥이 하얀 색이어서 나중에 하얀색 스프레이로 선을 긋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의 피가 빨간색으로 바닥을 물들였으니, 빨간색 스프레이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파란색?
방광에 고인 물을 버리고 나오는 길에 다시 여자 화장실을 살짝 들여다본다. 여자의 얼굴이 살짝 돌아가는 것 같더니 나와 눈이 마주친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은 유난히 하얗다. 아직 안 죽었나? 화장실을 문을 살짝 닫고, 복도를 빠져 나온다. 내 발걸음은 노란 머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는 화장실에 갈 때에 봤던 자세 그대로 테이블에 앉아 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손을 모아 깍지를 낀다.
“여자 화장실에 누가 죽어 있어요.”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인하진 않았지만,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전달력이 크고, 흥미도 있게 만든다. 하지만, 그 말에 내 호흡과 남자의 호흡에 변화가 오는 것 같지는 않다. 남자의 동공도 변화가 없다.
“자살인가?”
“아무래도 타살 같은데요. 뒷머리가 깨져 있는 것 같아요.”
짧은 정적이 흐른다. 음악도 한 텀이 끝나 그 사이에 짧은 갭이 테이블의 정적과 맞물린다. 남자나 나도 그 정적을 깨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요즘 거리에 자주 울려 퍼지는 영화 ost가 나온다. 스피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를 토해낸다.
“어차피 다 똑같아.”
남자는 맥주 잔 속에 어린, 공기 방울을 들여다본다.
“죽음은 마찬가지야. 다 지겨울 뿐이지.”
내가 침묵하자 남자가 계속 말을 잇는다.
“죽음을 계획해 본적이 있나?”
컵에 있는 맥주를 다 비운 다음에야 대답을 한다.
“여러 번이요.”
“어떤 종류로?”
“뭐... 뻔한 거죠. 거기에는 타인의 죽음을 계획한 것도 있어요. 거기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자면, 전철에 친구를 민 것이 처음이었죠. 밤 세도록 그 녀석의 죽음을 계획했고, 그대로 실천했어요. 특별히 미웠던 것은 아니고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죽였을 거예요. 아니면 자살했을 지도 모르죠. 그리고 퍽!하는 소리.... 전철에 부딪힐 때 들리던 소리가....”
손을 양쪽으로 펴며 ‘퍽’을 강조한다. 남자는 말없이 내 빈 잔에 술을 채운다.
“그 소리가 몇 달간 나를 따라 다녔어요. 그 친구 대신요.”
“자신의 죽음을 계획한 것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손을 앞으로 내민다. 손목에 길다란 흉터가 나 있다. 남자가 손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소매까지 걷어 그 위의 것까지 보여준다. 뭔가 가슴 속에서 일어나 이 남자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것 말고도 많아요. 약을 먹은 일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병원에서 고생 좀 했죠....”
“무엇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나?”
“모르겠어요. 모르기 때문에 죽으려 했던 것 같아요.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구.”
바텐더 여자가 다가오더니 서비스라며 납작한 과자들로 된 안주를 놓고 간다. 안주 하나 집어 입에 넣는데, 남자는 안주에 손을 대지 않고 나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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