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을 각오하고 쓰는 민족사학 비판(3) - 치우 신화

백승길 작성일 06.12.31 19: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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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사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스타는 아마도 치우일 것입니다. 민족 사학에 의하면 중화의 제왕 황제 헌원과 10여 년간 싸워 승리를 거듭하였다고 하는 상고대 최강의 군신이죠. 주류 사학에서도 치우는 상고대의 군신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주류 사학에서 나타나는 치우 신화는 사기를 비롯한 중국 측 기록을 전적으로 신빙하는 것입니다. ‘삼황중 마지막인 신농씨 말에 헌원이 혼란을 잠재우고 천하의 제왕이 되었으나 치우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치우와 헌원은 탁록이라는 지방에서 10여 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치우는 10여 년간 연전 연승을 거듭하다 헌원의 계략에 말려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이상이 중국측의 기록으로 당연히 치우는 중국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됩니다. (동아시아에서의 신은 실상 전설적인 위인이나 마찬가지) 군신이라 불리울만큼 전쟁에 능하였던 신으로 그만큼 포악스러웠고 흉측하게 생긴 신입니다. 전쟁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고대 중국에서 전쟁에 앞서 제사를 지내는 존재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한편 민족 사학에서 주장하는 치우 신화는 크게 두가지 계열로 나뉩니다. 동이족의 군신 치우 천왕 신화와 신시의 환웅 자오지 환웅 신화이죠.

군신으로의 치우 신화는 중국측의 기록과 비교해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전쟁의 시작 이유가 다르고 승리자가 치우로 나타난 다는 것이 다를 뿐이죠. 민족사학에서는 중국 고대의 신들인 삼황을 신시의 환웅이 중국을 지배하도록 파견한 존재로 보고 이들의 중국 지배권을 황제 헌원이 탈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농씨의 후손인 치우가 이에 맞서 싸웠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승리한 이후 치우의 생사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하여 헌원에게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힌 것 까지는 동일하나 이후 치우가 죽었다고 하기도 하며 혹자는 치우가 살아 '장당경'이라는 지역의 왕이 되어 800년 간 왕 노릇을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한편 자오지 환웅 신화는 치우를 신시의 역대 환웅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제14대 자오지 환웅으로 이야기하며 헌원과 싸운 사실은 거의 그대로 묘사합니다. 역시 치우를 승리자로 보고 있습니다.

민족사학계의 치우 신화를 보는 관점이 두가지라고 해서 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상고대의 신화는 항상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전해지고 각기 다른 시각으로 전해져 오히려 동일한 형태인 것이 드물 정도입니다. 일례로 중국의 삼황오제 신화에서 삼황은 신화마다 제각각으로 다르죠. 이런 만큼 신화의 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둘 중 하나를 거짓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일단 치우 신화의 기본 골격이 매우 흡사하며 수많은 기록에서 거듭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치우로 대표되는 어떤 부족과 헌원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모 부족 간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 부족 전쟁의 규모가 어떠하였을지는 추측이 불가능하겠지만 치우 신화의 내용처럼 장려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치우 신화의 시대로 추측되는 시기는 대략 기원전 3,000년 이상 되는 시기로 청동기조차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어지는 수천 혹은 수만명 규모의 대 전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수많은 기록에서 거듭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개 부족간의 단순한 분쟁보다는 훨씬 대규모의 전쟁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적어도 헌원은 신화에서 오제 가운데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중국 방면 부족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 부족과 대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싸웠던 치우족 역시 결코 작은 세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양측의 전쟁에 관해서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는 매우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첫째는 헌원족은 청동기, 치우족은 철기를 가진 것으로 표현한 것이며 둘째는 치우족을 기마민족으로 본 것입니다. 이 가운데 무기의 문제는 사실일 가능성이 극히 낮습니다. 물론 고고학적인 발견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청동기와 철기의 등장 및 사용의 문제는 단순한 시기가 앞당겨지는 문제를 넘어서 현재 학계가 이룩한 청동기, 철기와 문명발달 단계 간의 관계 설정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동기의 경우 그 존재와 문명발달 단계의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 여유롭게 설정 가능하나 철기의 경우 철기의 등장은 곧 부족 및 읍락제 사회에서 벗어난 왕권지향적 영토국가의 등장과의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에 기원전 3,000년 이상의 초고대에 철기가 등장한다고 주장할 경우 현대 역사학의 성과가 단번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문제인 기마민족 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합니다. 일단 전쟁의 주 무대가 된 탁록 지방이 정확하게 농경지대와 유목지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점, 기록에 묘사된 치우의 전투 방식이나 전략 등이 기마유목민족의 전술과 흡사하다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한편 전쟁의 성패에 관해 말해본다면 아마도 치우의 승리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싶습니다. 헌원은 치우에게 연전연패하여 잠도 편히 자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으며 최후에는 계략으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였으나 많은 기록에서 치우의 생존 가능성을 말하고 있고 헌원의 세력권이나 기타 등등의 문제에서 볼 때 치우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이후 치우족과 헌원족의 싸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치우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건 패배하였건 간에 치우족은 탁록 지방에서 사라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치우족은 분명 이후의 역사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치우족을 기마유목민족으로 본다면 이러한 부족 자체의 사라짐도 어느 정도 가능한 일입니다. 탁록 지방을 떠나 몽골고원 어딘가의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이죠. 고대세계에서 이정도의 이동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치우를 신시의 자오지 환웅으로 보는 시각은 터무니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일단 환웅의 존재부터가 의심스러운 것이 현실이죠. 환웅에 대한 기록은 민족사학 계열의 기록을 제외하고 전무한데다 묘사된 세력권, 정치 형태 등에서 현실성이 지극히 떨어집니다. 차라리 단순한 신화의 측면에서 묘사가 되었더라면 모르겠지만 신시의 환웅 역대기는 너무나도 역사적인 냄새가 짙죠.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다루려 했다면 그에 부합되는 다른 사료나 하다못해 고고학적 증거가 필요하건만 환웅의 역대기는 오직 민족사학계의 사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여 대를 이어져 내려온 환웅 가운데 다른 기록에 등장하는 환웅이 단 2명뿐이라면 충분히 의심스럽지 않을까요? 그것도 한명은 그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은 채 환인의 서자, 단군의 아버지로 나타날 뿐이며, 또 한명은 이름조차 다릅니다. 이 한명의 환웅이 바로 치우-자오지 환웅입니다.

자오지 환웅이라는 이름과 치우 간에 언어적 관계성은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오지 환웅의 신시를 만주 가운데서도 가장 깊숙한 지역인 하얼빈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양측의 격돌 현장이 하북성 내륙 일대인 것은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물론 이를 두고 신시 세력의 막강함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료와 유물 유적을 놓고 분석해볼 때 만주 일대의 세력이 하북성까지 미칠 만큼 강대한 정치적, 군사적 위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현대 학계에서는 신시 세력은 고사하고 헌원의 세력조차도 황하 중류의 하남성 북부, 산서성 남부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헌원의 세력이 탁록에서 누군가와 싸웠다는 사실조차 의문스러울 정도인데 신시의 세력이 하북성에 미쳤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현세 씨의 [천국의 신화]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치우족의 세력권을 기마유목민족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치우족의 세력권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시 세력에 이것을 비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주 일대는 유목이 행해질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숲과 물이 풍부한 만주 일대에서 유목이 행해질 수 없습니다. 이른바 고구려 및 부여의 반농반목적 경제기반에서 말하는 반목은 목축이지 유목이 아닙니다. 유목은 목축을 하기에도 땅이 척박하기에 선택하게 되는 방법이죠. 탁록 일대는 바로 북쪽에 고비사막을 접하고 있으며 황토고원 위에 있는, 농경에도 무리는 없지만 유목에 더 적합한 땅입니다. 이곳을 근거로 치우족이 웅비하였을 가능성은 높으나 신시 세력이 이 일대에까지 미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치우 신화의 결론을 내리자면 자오지 환웅 설은 불가능하며 군신 치우 신화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이 치우가 한민족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섣부른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치우가 소속되었다고 알려진 ‘동이족’이 민족의 개념이 아닐 뿐더러 ‘하나’의 부족이나 국가에 가까운 존재가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고조선 등의 고대 국가가 동이족으로 총칭되는 여러 부족들 가운데 상당수를 지배 하에 두었음은 분명하지만, 그 여러 부족과 치우의 역사적 연관성을 추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인데 치우를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약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고조선, 고구려에 지배를 받았던 부족들까지 우리 민족의 범주에 넣고 그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중국은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 국가를 지배한 전력이 있는 몸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롯한 모든 행위가 면죄부를 받는 순간이군요. 과거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모든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 모두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로 편입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사실상 제국주의에 가까운 발상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각설하고, 민족의 정체 수준을 떠나 분명 치우족은 기마유목민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결국 민족사학자들이 줄기차게 영광의 역사 가운데 하나로 주장하는 치우 신화는 우리 민족의 신화인지도 의심스러운 고대 전쟁의 신화인 것입니다. 물론 치우 신화에 대한 고대로부터의 지속적인 추앙으로 볼 때 한민족과의 혈연관계 여부를 떠나 치우를 우리 민족의 ‘신’으로 보는 것은 하등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신화는 신화일 뿐 역사는 아닙니다. 신화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는 것이 역사학이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신화로부터 역사를 ‘추론’하는 것이지 신화 자체를 역사로 일컫는 것이 아니죠. 치우 신화 역시 마찬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치우 신화에서 말하는 영광은 신화의 세계일 뿐 역사가 아닙니다. 일단 치우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전쟁 규모, 병장기들부터가 이미 서로 다른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한 역사적 사실 혹은 전설이 신화로 변화하면서 신화가 만들어지는, 혹 신화가 변화되는 당시의 상황이 덧입혀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치우 신화를 두고 우리 민족의 영광을 논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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