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의 집시 2

풍경운영자즐 작성일 07.07.03 22:59:29
댓글 0조회 488추천 1

PK 초능력자 유명근

 

 

 


거창한 아파트 단지가 높은 하늘 아래에 우뚝 솟아 있는 많은 건물들 사이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 아래 초록 잔디밭을 지나가면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 검은 빛을 뽐내고, 모래바람 이는 놀이터에는 쾌적한 공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은행나무가 즐비하게 심어져 있다.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한 계절인지라 은행나무 사이로 두 그루의 앵두나무에는 불그스름한 열매가 자라나고 있었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놀 곳을 잃은 동네 꼬마 아이들은 아파트 단지 속의 놀이터를 찾아 몰려들었고, 놀이터 근처에 설치된 수돗가는 마음껏 뛰어 노는 아이들에게 둘도 없는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다.

 

“읏…”

 

수돗가의 물을 뿌리며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 마당에 수돗가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고 있는 무테안경의 청년에게 아이들의 물벼락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벼락을 맞은 사내의 머리카락은 햇살에 번뜩이며 하얀 광택을 발했다. 청년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털어 내었다.

 

“형. 미안요~”

 

“야, 저 형 화내면 어떻게 해?”

 

“무섭다. 다른 곳으로 가자.”

 

아이들은 무테안경의 청년이 혹시나 크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서로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리더니 청년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냉큼 도망을 쳤다. 한순간에 한산해진 수돗가에는 물벼락을 맞은 무테안경의 청년, 박진오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방금 산 책인데, 젖어 버렸네.”

 

진오는 방금 전 새로 구입한 책이 젖어 버린 것에 아쉬워했다. 진오의 성격이 섬세하기 다행이었지, 만약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아이들을 크게 질책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진오는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에 화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책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는 진오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책을 읽으면 늘 마음이 편하다. 책 속의 세상은 허상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의 결정체이며, 독자에게 재미를 유발하기 위한 사기라고 하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빠져들며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며칠 밤을 꼬박 새며 책을 읽는 바람에 피골이 상접하여 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피로한 몸을 흐느적거리며 굼벵이처럼 기어다니다가 잠에 빠져드는 것이 진오는 좋았다. 책이라는 것 하나에 온 신경은 물론 몸 속 세포 하나하나가 쏠리고 나면,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같았다.

 

진오는 물기를 털어 낸 즉시 수도꼭지를 잠갔다. 아이들이 혼나지 않기 위해 급히 도망친 바람에 수도꼭지가 제대로 잠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서 도로 벤치에 앉으려고 하는데 진오가 앉아있던 벤치에는 꼬마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자리를 빼앗겼다는 데에 진오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꼬마가 자리를 양보해 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우거진 은행나무가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고, 더우면 목과 몸을 축일 수 있는 수돗가까지 있으니 이보다 좋은 독서공간은 드물었던 것이다.

 

꼬마는 벤치 위에 두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물총을 개조하고 있었다. 몇 백 원 하지 않는 싸구려 장난감 물총이라서 그런지 물을 집어넣는 물통과 본체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물통을 물총으로 들이미는 꼬마가 안쓰러워 진오는 다가가 몸을 숙였다.

 

“형이 맞춰 줄게. 이리 줘볼래?”

 

꼬마는 진오를 한번 올려다 본 후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맞춰 보아도 물통은 물총 안에 들어가 지지가 않았다. 커다란 꼬마의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내릴 것만 같았다. 고사리 같은 손을 쉬지 않고 놀려댔지만 소용없었다.

 

그때서야 꼬마는 진오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물총을 내밀었다.

 

“형이 맞춰주세요. 대신에 꼭 맞춰야 해요. 저 이거 오백 원짜리 뽑기 해서 겨우 나온 거란 말예요.”

 

진오는 순수한 꼬마의 얼굴을 보자 덩달아 동심이 일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 형이 잘 맞춰서 줄게.”

 

진오는 꼬마의 손에서 물총을 건네 받았다. 꼬마가 하도 물통을 주물락 거린 탓에 차가워야 할 물통 안의 물이 미지근했다. 물통과 본체를 조립하려고 해보았지만 진오 역시 쉽게 되지가 않았다. 하지만 진오가 몇 번을 반복하여 끼적대자 쉽게 물통을 본체 안에 집어넣을 수가 있었다.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감탄하는 꼬마에게 물총을 내밀었다.

 

“여기 물통을 집어넣을 때 물통 뚜껑을 빼고서 집어넣어 봐, 그리고 집어넣은 다음에는 물통 뚜껑을 이렇게 닫으면 되는 거야. 어때? 쉽지?”

 

꼬마는 금세 이해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수돗가로 뛰어갔다. 새로운 물을 물통 안에 가득 담은 다음 도로 벤치로 달려와 진오 옆자리에 앉았다.

 

꼬마는 진오가 가르쳐 준대로 물통을 먼저 넣은 다음 뚜껑을 닫는 것을 반복했다. 괜히 따분한지 진오가 보고 있는 책을 꼬마는 힐끔 쳐다보았다.

 

“형아, 뭐 보는 거예요?”

 

“책 읽지.”

 

“영어로만 되어 있는 데요? 어렵지 않아요?”

 

“하나도 안 어려워.”

 

“히잉…”

 

꼬마는 어려운 영어가 너무나도 많이 적혀 있는 탓에 책을 본 즉시 눈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진오가 보고 있는 책은 영국에서 발행된 3)미스테리 써클 전문서적이었다. 책에는 충격적인 UFO 사건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풀이해 놓았을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4)우주비행사들의 외계인 빙의(憑依)사건도 세밀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는 어렵게 구한 서적인 만큼 매우 관심을 가지며 책을 읽었다.

 

꼬마는 진오의 책을 쳐다보는 것을 포기하고 물총을 가지고 놀 것을 택했다. 혼자서 빵야빵야를 외치며 허공에 물총을 쏴대던 꼬마는 하늘에 무엇인가가 깜빡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빛은 어떻게 보면 일반 햇빛처럼 보였지만 태양은 남서쪽인 반대편에 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꼬마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 빛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하지만 이 꼬마가 어찌 알겠는가.

 

그것이 바로 일억만 분의 일이라는 엄청나게 적은 확률로 마주친다는 ‘워프(worp)의 눈’일 줄을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물총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해 쏘았다.

 

“빵야!”

 

그 순간 하늘에서 깜빡이고 있던 하얀 불빛은 갑자기 찬란한 안개를 뱉으며 꼬마의 몸을 감쌌다. 그것은 너무나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꼬마의 몸은 희뿌연 안개 옷을 입고 천천히 허공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어라?”

 

꼬마는 살아있기라도 하듯 스르르 움직이는 안개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발이 땅에 닿지가 않고 몸이 점점 하늘로 높이 붕 뜨기 시작하자 해맑았던 얼굴은 금세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물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으…으…앙! 무서워, 형!”

 

진오가 고개를 돌린 것은 꼬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난 후였다. 꼬마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하늘 높이 붕 떠 있었다. 진오는 믿지 못할 이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꼬마의 울음소리는 어느새 비명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진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책을 벤치 위에 올려놓고, 잠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지. 박진오, 침착해야 한다.’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접했던 미스테리한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줄이야.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진오는 재빨리 벤치 위로 올라가 있는 힘껏 손을 뻗쳤다. 아슬아슬했지만 꼬마의 한쪽 발을 잡을 수가 있었다. 이제 손에 힘을 주고 힘차게 잡아당기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꼬마의 몸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진오의 몸까지 감싸게 된 것이다.

 

“아니?!”

 

살아있기라도 하듯 스르르 움직이는 안개는 진오의 몸을 모두 휘감고 나자,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오는 이런 혼비백산(魂飛魄散)한 틈에도 쉬지 않고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그는 예전에 읽었던 일본(日本) 미스테리 책에서 이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5)워프의 눈 현상이 틀림없어!’

 

꼬마의 발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지만 알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충분히 두려움 자체였다.

 

꼬마의 얼굴을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든 진오의 얼굴로 꼬마의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무서워…흑흑! 엄마, 다시는 아무데나 물 안 뿌릴게요. 집에도 일찍 들어갈꺼구요, 밥도 잘 먹을게요. 엄마…엄마…잘못했어요. 엉엉.”

 

이제 지상과는 20미터 높이로 간격이 벌어졌고, 워프의 눈과는 불과 3미터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대로 빨려 들어가야 하는 건가? 이대로?!’

 

그때였다.

 

진오와 꼬마아이는 어떤 굉장한 힘(力)을 느끼고 동시에 고개를 떨구었다.

 

“엇?”

 

그건 놀람의 연속이었다.

 

진오 또래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눈을 부릅뜬 채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워프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두 사람을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이 힘의 장본인은 바로 몸을 떨고 있는 저 청년의 것이 틀림없었다.

 

진오는 순식간에 그 청년의 정체를 깨달았다.

 

‘설마 6)원격이동(teleportation)을 부리는 초능력자?’

 

5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세 사람에게는 매우 긴 시간이었다. 그때서야 안개가 걷어지면서 공간의 문이 닫혔다. 공간의 문이 닫히자 마자 진오와 아이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초능력을 지닌 청년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설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기적과도 같은 우연의 일치였으며, 우리에게 낯설지만 생소하지 않는 ‘있을 수 없으나, 존재하는 그 무엇.’의 사건이었다.

 

초능력을 지닌 청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훔쳐내고는 진오와 아이를 향해 달려왔다.

 

“괜찮아?”

 

초능력을 지닌 신비의 청년.

 

이 청년이 바로 진오의 둘도 없는 운명의 벗, 유명근이었다.


 

풍경운영자즐의 최근 게시물

무서운글터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