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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근과 처음 만나던 날을 회상하자 진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후훗. 그때 빨려 들어가던 나와 아이를 구한 녀석이 바로 명근이었지. 잠……깐?!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간다…….’
진오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명근에게 소리쳤다.
“전에 내가 인쇄했던 수봉산에 대한 자료집 기억하지? 택시기사가 워싱턴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 말이야!”
명근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나무젓가락을 빨다가 이내 생각해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히 기억하지. 기사에서는 제 4의 눈의 현상이니 뭐니 떠들어댔었지만 사실 그건 워프(warp) 현상이었잖아.”
“맞아. 워프현상은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워프의 눈이 있지만 사람의 눈과 그 시선이 정확하게 맞아야만 작용한다고 들었어. 그 확률이 거의 억만 분의 일이라는데 수봉산에서는 종종 흔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워프의 눈 지속시간이 여기에서만 길게 되어 있는 거겠지.”
“어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 우리 처음 만났던 날도 워프현상이 일어났었어. 하지만 그건 이 세상에 무수히 떠돌아다니는 미세한 워프의 눈이었지. 억만 분의 일 확률로 마주칠지 모르는 존재였지만, 수봉산의 워프의 눈은 크고도 지속시간이 길어. 아마 헝겊이 묶인 까닭은 이 근처의 워프의 눈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는 방향표일거야.”
진오는 헝겊이 묶인 나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명근은 진오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헝겊을 묶어 논 사람이 방향표도 표시해 뒀다는 거냐?”
“아마도.”
진오는 헝겊이 묶인 나무를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명근은 휴대용 형광등으로 나무를 밝혀주면서 진오의 더듬는 일을 도왔다. 잠시 후 진오는 자신의 예상대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에는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진오는 손으로 글자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확실히 표시를 해두었군.”
명근은 진오의 손이 멈춘 곳으로 형광등을 비추어 살펴보았다. 나무에는 조그마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무의 주름과 섞여 있어 그것이 글씨라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육……. 비누? 아닌가? 반동그라미? 야야, 진오야, 뭐라고 써있는 거냐?”
명근은 답답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뭉툭한 돌멩이를 이용해 파놓았는지 미관상으로는 글씨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진오가 손으로 직접 더듬지 않았다면 아마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진오는 손으로 여러 번 나무를 더듬으며 글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 뒤 명근에게 말했다.
“숫자 팔(8), 첫 번째, 土. 이렇게 적혀 있어.”
지금까지 발견한 유일한 단서이고, 산 속을 헤매던 그 누군가가 적어놓은 표시라고는 하나 무엇을 암시한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복잡한 것과 생각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명근이 투덜거리는 게 당연했다.
“이거 적어 놓은 사람도 엄청 게으른 양반이군. 기왕 적어 놓을 것이면 아예 일기형식으로 술술 적어놓을 것이지, 수수께끼를 풀라는 것도 아니고 참나. 달랑 세 개만 적어놓을게 뭐람.”
진오는 검지로 무테안경을 바로 잡으며 나무를 살펴본 뒤 입을 열었다.
“여기에 적힌 첫 번째라는 단어. 아마도 길을 헤매게 만든 첫 장소. 바로 여기를 뜻하고 있는 걸 거야.”
“그럼 팔하고 土는 무얼 뜻하는 건데?”
“아직은 나도 잘 몰라. 사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첫 번째가 바로 여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닌지도 확실치가 않아. 하지만 이걸 적어놓은 사람은 이곳을 헤맨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수봉산의 지리를 파악했던 것만은 틀림없어.”
명근은 또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건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만큼 수봉산을 헤맸다는 뜻이겠군.”
“그렇지. 아마 팔하고 土가 무얼 뜻하는지 알아내려면 우리도 며칠은 더 헤매야 할걸.”
“아, 귀찮아. 귀찮아.”
명근은 정말로 귀찮은지 물고 입던 담배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오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음을 알고는 명근에게로 다가가 팔꿈치를 잡아 당겨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 생각하더라도 우선 텐트부터 친 다음에 생각하자고.”
명근은 입을 쭉 내밀더니, 진오의 손을 뿌리쳤다.
“생각하는 것은 네 담당이잖아. 너나 실컷 생각해.”
“그럼 텐트치는 것은 네 담당이겠구나?”
“……젠장!”
할말을 잃은 명근은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건을 분석하고, 조사하며,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진오 담당이라면, 명근은 무거운 짐을 챙기거나 피치 못할 때를 대비해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즉, 명근은 별 볼일 없는 일을 도맡아서 하거나 컴퓨터를 진오 보다 잘 다루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운영, 진오가 찍은 현장사진을 그래픽으로 수정하는 일을 담당했다.
어물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텐트 치는 일을 진오에게 떠넘기려 하다가 실패하자 명근의 인상은 상당히 구겨져 있었다.
“빨리 해. 기온이 더 떨어질 거다.”
진오는 텐트 치는 것을 거들어주며 빨리 행동할 것을 재촉했다. 그의 말대로 밤이슬까지 내린다면 예상보다 더 큰 추위가 엄습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밤이슬도 내리고, 공기도 차가운데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바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느낀 것은 명근이었다. 텐트를 치면서 속으로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다가 바람의 미지근함을 결국 알아차리게 되었다.
“진오야. 움직이지 말아봐.”
“왜?”
“이상해.”
“뭐가?”
“바람이 미지근한 것 같아.”
아니, 늦가을에 부는 바람이 미지근하다니?! 명근의 말을 들은 진오는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함을 느꼈다. 하지만 명근의 한 손에 손난로가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럼 그렇지, 라고 중얼거리며 턱으로 명근의 손을 가리켰다.
“바보 녀석아! 손난로를 쥐었잖아.”
“에?”
“손난로를 잡은 손으로 볼을 만져놓고 바람인지 손인지 구분도 못해? 바보 놈.”
“아냐. 분명 바람이 미지근한 것 같았다고…….”
“산바람이 미지근할 리가 없잖아. 거기다가 겨울도 찾아오는 중인데.”
“흐음. 진짠가? 손난로 때문인가…….”
명근은 바람이 미지근하다고 느낀 것을 손난로 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때 고요하게 흐르는 산 공기 속에서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아씨! 퉤퉤!”
텐트를 치고 있던 명근은 엄청난 기세로 몰아친 바람 때문에 눈과 코, 입에 흙이 들어가 호들갑스럽게 퉤퉤 거렸다. 진오도 마찬가지로 흙이 묻어서 손으로 흙을 털어 내야만 했다. 다시 쓰러진 텐트를 들어올리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진오는 하던 것을 멈추었다.
“가만……!”
진오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흠, 하고 낮게 신음을 했다.
“방금 분 바람은 경사가 진 쪽에서 아래쪽으로 불었어. 그렇지?”
“그랬지. 혹시 너도 바람이 미지근하다고 느낀 거야?”
“장난치지 말고 내 말 들어봐. 바람이 경사진 위쪽에서 아래로 불었고, 우리가 지금 있는 곳도 자세히 느껴보면 위에서 아래로 조금 기울어져 있어. 그런데 텐트가 쓰러진 곳은 바람이 부는 곳의 반대쪽인 위쪽으로 쓰러졌다고!”
명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텐트를 손에 쥐고 말아서 텐트가 어느 방향으로 쓰러졌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지만 진오의 말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엔 명근이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니야. 텐트가 쓰러진 것은 분명 반대 방향이었어. 뭔가 있어…….”
이렇게 말한 진오는 물통을 꺼내 땅 위에 흘러 보냈다. 그러잖아도 우물과 약수터를 찾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이라도 아껴야 할 판이거늘, 명근은 텐트를 팽개치며 진오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제 정신이냐며 소리치려다가 물이 흐르는 방향을 보자 할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세……세상에……?!”
물은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진오가 물을 부운 곳은 평탄한 곳이 아닌 아래로 기울어진 곳이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물이 흐른 곳은 아래가 아니라 경사가 진 위쪽이었다.
명근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지?!”
“역시……. 여긴 다른 차원(次元)의 세계야.”
명근은 멍하니 반대쪽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다른 차원이라니? 결계(結界) 같은 거?”
“쉽게 말하면 그런 것과 같아.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자들이 임의로 만든 세상과, 과거, 현재, 미래의 틈새로 생긴 차원도 있어. 내 기억에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고스트하우스(GhostHouse)가 있는데 그 곳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 말로는 하우스 안은 다른 세상이었다고들 하지.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인 영국의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이라는 사람도 고스트하우스를 경험하고 7)막(膜: brane) 우주론이라는 연구의 가설도 내세웠다고 들었어. 세상은 여러 개의 차원으로 나뉘는데 그 숫자가 거의 열 한 개로 나뉘어진다라고 말야. 그 중에서 그가 경험한 고스트하우스는 열 한 개의 차원 중 4차원이라고 할 수 있지.”
“헐. 그것이 실제로 있다니…….”
“그래. 그 고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 온 사람들의 말로는 거울을 보면 자신의 행동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세면대의 물을 틀면 물이 반대방향으로 흐른다고 했었어. 설마 했더니 그것이 사실일 줄이야.”
“네 말대로라면 수봉산도 고스트하우스라는 거잖아?”
“지금 상태로는 고스트하우스라고 여길 수밖에 없어. 스티븐 호킹이 체험한 그 곳은 말 그대로 고스트하우스야. 유령의 집이라는 뜻이지.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의 말은 거의 일치하는 게 있었어. 아주 많은 워프의 눈을 보았다던가. 아니면,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보았다는 거. 즉, 도플갱어(Doppelganger). 그리고 죽은 사람(死子)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지. 고스트 하우스는 워프의 눈을 이용해 이 세상 어느 곳이던 마음껏 떠돌고 있어. 다시 그들이 플로리다주의 고스트 하우스로 갔을 때는 집은 온데간데없고, 묘지(墓誌)가 대신하고 있었다고 했지. 확실한 것은 고스트하우스를 경험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
명근은 의아스럽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유령의 집이라니……. 게다가 묘지라고? 그럼 그 안에 있는 것은……?”
“뭐일 것 같아? 귀신 밖에 더 있겠어?”
명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여기가 고스트하우스라면 실제로 주변에 귀신이 우글우글 들끓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수봉산은 고인돌이 많아서 문화지(文化地)로도 지정된바 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진오가 텐트치는 것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야 정신을 차리며 몸을 움직였다.
진오의 말대로 고스트 하우스라면…….
바뀌어진 동서남북 속에서 황망히 움직여야 하지 않은가. 거기다가 도플갱어와 유령의 존재까지 존재한다면…….
“으으…….”
명근은 치를 떨었다.
그는 다 쳐진 텐트 안으로 들어가 멍하니 앉아서 중얼거렸다.
‘설마 여기가 고스트하우스일까? 그럼 정말로 이곳에 귀신이 있다는…….’
한편 진오는 텐트가 튼튼하게 잘 쳐졌는지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낭과 손난로를 꺼내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명근도 역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 손난로를 작동시켰다. 고스트하우스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부터 명근의 마음은 매우 심란했다.
여기가 만약 고스트하우스라면 이 곳에 들어왔다가 나온 사람들은 어째서 살인(殺人)과 자살(自殺)을 한 것일까.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는 고스트하우스에 대해서 더 듣고 싶어 진오의 침낭을 툭툭 건드렸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말이야. 고스트하우스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냐?”
“집으로 잘 도착했지.”
“수봉산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정신이상이 되었다던가, 살인자가 되었다던가……. 그런 증상은 없었어?”
“없었어.”
진오의 말에 명근은 생각했다.
‘그럼 여기가 고스트하우스라면 우리도 멀쩡히 집에 돌아갈 수 있겠군. 그리고 수봉산의 다른 사람들처럼 살인을 하던가, 이상한 행각을 벌이지는 않겠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명근의 마음이 놓였다.
쌀쌀한 바람 때문인지 침낭 속에서 온기를 느끼려고 해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막상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아 보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동산이라서 우습게 여겼는데, 막상 들어와 고스트하우스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자 명근은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살짝 고개를 돌려 진오를 바라보니 그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편안한 그의 모습을 보자 조금씩 걱정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명근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저 놈만 믿자. 내 초능력과 저 놈의 지식이 합쳐지면 뭐가 무섭겠냐. 진오 말대로 우선은 날이 밝는 것을 기다리자. 맞아, 그것이 더 현명한 걸 거야.’
명근은 손난로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뜻함을 느끼며 애써 잠을 청했다.
이때 잠든 척 하고 있던 진오가 번쩍 눈을 떴다.
그의 표정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