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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아무리 큰걸 본다지만 너무 늦는 거 아닌가?’
명근이 볼일을 본다며 사라진지 십여분이 지났건만 나타나지 않자, 진오는 매우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겠으랴 싶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료 검토에만 신경을 썼다.
그 자료라는 것은 수봉산에 관련된 역사와 사건, 그리고 지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진오가 지닌 지도에 나타나는 위치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지도에서는 우물과 버려진 절하나를 중심으로 대강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어제 하루종일 돌아다녀 보았지만 지도에 나타난 우물과 절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산에 보이지 않는 미궁이 있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3년 전 초여름부터라고 했지. 3년 전이라……. 가만 있자, 무언가 떠오를 듯 하면서도 생각이 나질 않는군. 흐음…….’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가고, 주변이 너무 고요하자 진오는 명근이 볼일을 보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명근아. 오늘따라 자연이 너를 꽤 오래 부르는 구나. 라면 먹게 그만 볼일보고 나와라.”
그때였다. 등뒤에서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매서운 살기가 등줄기를 스쳤다. 왠지 모를 살벌한 기운에 진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날 노려보는……. 살기가?’
진오는 자신의 얼굴이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것을 느끼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뒤를 돌아보았다.
“후우……. 놀랬잖아, 유명근. 내가 전에도 말했지? 그런 장난하지 말라고.”
진오는 명근을 보자 크게 안도했다. 살기를 느꼈을 때 사실 명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서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진오는 남들보다 직감이 쌔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것을 금세 느낄 수가 있었다. 또 명근은 초능력자인 탓인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배로 기가 강했다.
진오는 안심한 즉시 다시 자료를 검토했다. 이 곳에서 실종되었다가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정확하게 열 네 명이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순간의 기억을 잃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말투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PDA에 저장된 자료 중에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3년 전의 일어난 어떠한 사건이었다.
진오가 보고 있는 자료는 3년 전의 사건이 실린 신문의 기사내용이었다.
― 난 내 딸을 죽인 범인을 죽였을 뿐이다!
잔인하게 딸을 살해한 부친.
지난 6월 14일 오전 5시 무렵에 여고생 김양의 시체가 마을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원래는 서울 불광동에 사는 평범한 여고생 김양은 온몸이 갈기갈기 칼에 베어 있었으며, 특히 머리 두뇌골은 완전히 칼에 베어져 갈라진 상태였다. 현장에 남아있는 무기인 칼의 지문을 확인하고 수사한 결과 이렇게 잔인한 살인을 펼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양의 부친 김춘호씨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6월 16일 김춘호씨는 구속이 되었으나 그는 김양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며 주장했다. 그 후 DNA검사 결과 김양은 그의 친딸이 맞음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호씨는 김양은 육체만 자신의 딸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진짜 딸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진오는 그 기사를 천천히 반복하여 읽었다.
‘이 남자의 딸도 수봉산에서 실종되었다가 발견된 아이였어!’
진오는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육체는 딸이되, 딸은 살해를 당했다? 이것과 비슷한 사건을 예전에 본 것 같은데……아, 고스트하우스!’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같은 경우의 사건이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진오는 명근에게 말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지만 말고, 라면이나 끓여.”
명근은 다른 볼일이 있는지 진오의 말을 듣지 않고 수풀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진오는 명근이 무얼 하나 싶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명근은 주변의 돌을 줍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돌을 모으는지 진오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딱딱.’ 하며, 진오의 등뒤로 돌과 돌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히히…….”
돌을 나르는 명근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서야 진오는 하던 것을 멈추었다.
‘저 녀석……? 왜 저러는 거지?’
진오는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명근을 향해 다가갔다. 명근은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돌을 날랐다. 수봉산에는 생각 외로 돌이 많았다. 명근은 큼직한 돌만 골라서 한자리를 가득 메웠다. 본래 힘이 좋은 그여서 무거워 보이는 돌도 서슴지 않고 번쩍번쩍 들어올렸다.
진오는 그가 왜 돌을 나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명근에게서 알 수 없는 괴이함을 느꼈다. 의아함을 참지 못한 진오는 명근의 왼쪽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 뭐하는 거야?”
명근은 진오가 팔을 잡아당기자 안고 있던 돌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히힛……힛.”
“돌을 날라서 뭐에 쓸려는 거지? 여긴 고스트하우스라고, 허튼 짓 하지말고 여길 빠져나갈 방도나 구해봐야 할 것 아냐.”
순간 명근은 두 눈을 부릅뜨며 왼팔을 과격하게 휘둘렀다. 그 바람에 진오의 팔도 덩달아 휘둘러져 명근의 팔을 놓치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진오가 어떨 결한 표정을 지으며 명근을 바라보았다.
“너……너?”
명근은 다짜고짜 진오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끄윽, 소리와 함께 진오는 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만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머리를 들어 명근을 바라보니 햇살에 번뜩거리는 검은색의 그림자가 진오의 가슴을 강하게 때렸다.
그것은 명근의 발이었다.
“쿨럭!”
진오는 천성적으로 체력이 좋지 않았는데, 힘이 좋은 명근의 발길질을 한 대 얻어맞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입에서는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영문도 없이 얻어맞은 진오는 순간적으로 눈앞의 그가 명근이 아닐 수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방금 읽은 3년 전의 기사내용처럼 자신의 딸이 진짜 딸이 아니라고 주장했듯이 지금의 명근도 명근이 아닌 것만 같았다.
‘저 녀석 변했어! 이유도 없이 날 때릴 놈이 아니야. 아마 지금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건 아닐까?’
명근은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떨어뜨렸던 돌을 다시 나르기 시작했다.
“왜 방해를 해……? 히힛, 난 네 무덤하고 내 무덤을 만드는 중인데…….”
그 순간 진오는 뒤통수에 커다란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혼미해져 버렸다.
‘이렇게 앉아서 생각만 했다가는 진오를 찾기는커녕 먼저 굶어 죽겠구만.’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도를 찾지 못한 명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제 같은 자리만 고생하여 돌아다닌 탓에 기억력이 좋지 않은 명근도 수봉산의 길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을 걸어다녀 보았지만 어제와 똑같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워프현상으로 수봉산이 아닌 아주 다른 세상에 온 것이 확실하다고 명근은 생각했다.
지금 명근이 돌아다니는 길은 종횡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길이 꾸불 저리 꾸불하여, 이른 아침인데도 그나마 온전한 길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가다가 몇 차례 미끄러져서 명근의 옷은 완전히 흙투성이가 되었다.
“배고파 죽것다! 배고파 죽겠어! 진오 놈한테는 라면이라도 있지만 나는 라면도 없잖아. 유명근, 넌 왜 이렇게 지지리 복도 없냐.”
발 밑이 몹시 울퉁불퉁하여 그는 아래를 살펴보았다. 나무 뿌리와도 같이 생긴 것이 바닥을 잔뜩 메우고 있었다. 그는 참다못해 욕설을 한번 내뱉고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
‘걸어가다가는 성한 곳이 한 군대도 없겠군.’
나무 위로 올라간 그는 성큼 성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점프하여 뛰어다녔다. 나뭇가지가 매우 단단하여 명근이 뛰어다님에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평탄한 지대가 나오자 명근은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배고프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 먹을 것 없나.”
그는 나무에 기대어 쓰린 배를 문질렀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위에서 처량하게 들리는 새소리를 어렴풋이 느꼈다.
“새다!”
생명체라고는 고작 풀 덩이와 나무만 발견했던 명근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는 바닥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찾아 들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로서는 돌멩이만이 유일한 무기였던 것이다.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하여 새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위협적인 새의 비명소리에 몸을 움츠리며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쳐다보니 둥지를 지키려는 새 두 마리가 이리저리 종횡으로 날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새 둥지를 노린 생명체는 몸집만 해도 명근 만한 구렁이였던 것이다.
“헉!”
명근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뱀?!’
척 보아도 두 마리의 새는 매의 일종으로 보였는데 보통 새와는 달리 영리함이 누구 못지 않은 것 같았다. 매 두 마리는 새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 높이 날다가 바닥으로 추락하여 동시에 숨을 끊은 것이다.
이제 구렁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명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젠장할!”
명근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의 귀에는 바람소리만 휑하니 들릴 뿐 주변을 방해하는 나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구렁이는 나무와 나무사이를 기어다니며 끈질기게 명근을 쫓았다. 명근이 머리를 들면 입을 벌린 구렁이와 마주해야 했다. 그는 계속해서 죽어라 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주위가 조용하다고 느낀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걸음을 멈추었다.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자 지독한 갈증이 몰려왔다.
“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어디서 물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 거의 체념과도 같은 신음을 흘리며 명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워프현상으로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옷을 두껍게 입고 추위에 떨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쨍쨍한 햇볕과 더불어 높아진 기온을 이기지 못하고 두꺼운 겉옷을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체력을 많이 소모한 탓인지 속쓰림이 더해갔다.
예전부터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 배부른 돼지 쪽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던 그가 아침과 점심을 굶게 생겼으니 그 속쓰림이 오죽하랴.
명근은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일어났다.
“아까 독수리인지 매인지 그거라도 먹어야 겠군. 제발 뱀하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아, 엄청나게 큰 뱀이었지? 혹시 아나콘다가 아닐까? 흐음. 예전에 진오에게 들은 적이 있었어. 아나콘다는 죽어 있는 짐승은 먹지 않는다고. 그럼 분명 그 새를 먹지 않았겠지?”
명근은 배고픈 자신을 스스로 달래듯 그렇게 여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두 마리의 매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구렁이가 건드리지 않아 온전했다. 명근은 두 마리의 매 중 통통한 것 한 마리를 골라 어깨에 걸쳐 매었다.
혹시 구렁이가 다시 덤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명근은 주위를 훑어보며 경계의 눈빛을 빛냈다. 다행스럽게도 구렁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에 나뭇가지를 주운 그는 호주머니에 있는 라이터와 담배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하나 물고, 뒤이어 나무에 불을 붙인 후 매를 굽기 시작했다.
“진오, 이 자식은 뭐하고 있을까?”
명근은 진오에 대한 걱정이 극에 달했다. 진오의 대응력이 생각보다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걱정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불안한 마음이 온 몸을 죄어 왔다. 그는 한 번도 진오와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5년 전, 진오를 처음 만난 후부터 줄곧 계속되어 왔다. 진오는 원래 미스테리한 일을 신념처럼 여겨왔기 때문에 명근의 존재를 깊이 받아들이며 환영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미스테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진오는 영혼의 존재를 밝혀내고 싶었고, 명근은 자신의 초능력이 어떤 원리와 어떤 작용을 띄며 존재하게 되었는 가를 밝혀내고 싶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갈라질 줄 그 누가 알았으랴.
명근은 어느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진오를 찾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 확연히 띄는 것이 있었다.
“저……저건?!”
명근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발견한 것은 나무였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에는 붉은 색의 너덜너덜한 헝겊이 묶여 있었다. 마치 그 자리의 중요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말이다.
‘틀림없어! 어제 봤던 그 걸레조각하고 똑같아. 만약 진오와 함께 있던 그 장소처럼 무언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명근은 나무에 묶인 헝겊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다가 이윽고 나무를 더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근은 헝겊을 묶어 놓은 이가 새겨놓은 글씨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먼저 눈으로 확인하려 했으나 미관상으로는 뚜렷하게 알아볼 수가 없어서 다시 손끝으로 글씨를 알아내야 했다.
나무를 더듬던 그의 손길이 멈춘 것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가 알아낸 글씨는 16, 두 번째, 木. 이렇게 총 여섯 글자였다.
명근은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나마 그가 짐작하는 것이라곤 어젯밤에 헝겊 묶인 자리는 진오가 말한 대로 첫 번째의 장소를 뜻하는 것이고, 지금 명근이 발견한 곳은 두 번째의 장소를 뜻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 숫자 16과 한문 나무 목(木)은 대체 무얼 암시하는 건가. 그리고 이 자리에 무슨 비밀이 있기에 헝겊을 매달아 놓으면서까지 표시를 해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