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의 집시 6

풍경운영자즐 작성일 07.07.03 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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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분명한 사실은 붉은 색의 헝겊이 묶인 자리마다 무언가 엄청난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곳에 적혀 있는 숫자와, 한자, 그리고 여기 외의 또 다른 붉은 헝겊을 찾아내고, 뜻을 모두 풀게 된다면 흩어져 있는 불투명한 수수께끼가 하나로 모이게 될 것이다.

 

명근은 그렇게 믿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 멍청한 머리로는 다른 걸레조각을 찾아낸다고 해도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가 없을 걸. 그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한시라도 급히 진오를 찾아내는 것이야.’

 

“진오녀석을 찾는 것도 급하지만 그전에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으왓! 아뿔싸!”

 

이때 명근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고기조각이 이미 몽땅 타버린 뒤였다. 하기야 그렇게 오랫동안 나무를 더듬고 있었으니 고기가 타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명근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타버린 고기껍질을 벗겨 속살을 뜯어먹었다.

 

배가 부른 탓일까. 이제는 잠이 왔다. 더군다나 봄날 같이 따스한 날씨 탓도 톡톡히 해서 참을성 없는 명근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그는 눈을 뜬 즉시 습관적으로 손목에 차여진 전자시계 바라보았다. 전자시계가 제대로 된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지만 지금 시각은 오후 6시가 지난 후였다. 땅바닥에 그대로 누운 채 낮잠을 잤기 때문에 그의 머리와 등, 몸 할 것 없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몸에 묻은 흙을 대충 떨어내던 그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잠깐?! 이건 또 뭐야!”

 

이건 또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명근이 잠을 자고 있던 동안 워프현상이 일어났는지 또다시 주위가 변해 있었던 것이다.

 

분명 잠을 자기 전에는 온통 나무뿐인 숲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호수가 있고 거기다가 작은 산맥도 있는 완벽하게 외딴 곳이었다.

 

작은 참새가 지저귀며 날아 댕기고, 호수는 잔잔한 물결소리를 내었다.

 

“대체 몇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람! 여긴 또 어디냐고! 이 상태로 진오녀석을 찾을 수 있을까. 무슨 수로 이 많은 공간을 뒤지고 다녀야 한단 말이야? 젠장할!”

 

명근은 이대로 진오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길이 막막했다. 그리고 영영 집으로 못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수봉산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후회되었다.

 

갈증이 심했던 명근은 허겁지겁 호수의 물을 손으로 퍼서 마셨다. 이제야 속이 시원해 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까 전 삭막한 숲 속보다는 물이 있고, 평화로운 분위기마저 감도는 이 곳이 그나마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씻어야지 안되겠네. 원, 하루만에 그르지 꼴이 되다니. 으아, 이 땟국물 좀 봐.”

 

명근은 윗도리를 벗고 물 속에 머리를 박으며 목과 가슴, 머리를 깨끗하게 씻었다. 한시라도 급히 진오를 찾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길을 헤맸다.

 

‘여긴 또 어디일까? 진오 녀석도 나처럼 길을 헤매고 있겠지. 아, 빨리 걸레조각이라도 찾아야 할텐데…….’

 

명근은 붉은 색의 헝겊 조각을 찾기 위해 작은 나뭇조각 하나 놓치지 않고 샅샅이 숲 속을 뒤졌다. 발에 물집이 날 정도로 걸었다. 피곤해서 온 몸이 쑤셨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면 넓은 호숫가가 보여서 방향을 잡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발 아래에 하얀색의 액체가 흐르는 걸 발견했다.

 

“이게 뭐지?”

 

명근은 액체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액체가 묻은 손을 코에 갖다 대는 순간 웩,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역겹기 그지없는 심한 악취였다.

 

“이게 뭐야?!”

 

명근은 심하게 인상을 쓰며 하얀 색의 액체를 따라 걸었다.

 

“음?”

 

그 순간 괴이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짐승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맹수의 신음소리 같기도 했다. 감이 멀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명근은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소리를 따라 걸었다. 소리가 나는 곳은 하얀 액체가 흐르는 곳과 같은 방향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계속 들으니까 소름끼치는 군.’

 

이윽고 도착한 곳은 썩은 물이 고여 있는 늪지대였다.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슬금슬금 다가가니 커다란 구렁이가 괴로워하며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번 것은 아침에 본 구렁이와는 종이 다른지 사뭇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는 매우 커서 명근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헉!”

 

명근은 크게 놀라며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또다시 구렁이에게 쫓길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런……!’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구렁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잠잠한 반응에 명근은 의아했다.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상처라도 입었나?’

 

명근은 용기를 내서 구렁이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우유처럼 하얀 분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땅에 흐르던 하얀 액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새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부리가 옆구리의 구멍 사이로 삐죽 나와 있었다.

 

아마도 송아지 만한 새를 잡아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배가 불러 움직이지도 못하는 구렁이를 누가 기습 공격한 것이 분명했다. 구렁이의 배가 길게 찢어져 있던 것이다.

 

“흠…….”

 

명근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그러나 기분은 썩 좋지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구렁이가 온몸을 꿈틀대며 고통에 시달리는 광경은 역겹기까지 했다.

 

‘질긴 생명력이네. 저렇게 까지 상처를 입었는데도 죽지 않다니. 쯧. 빨리 숨을 끊어주는 것이 오히려 저 놈에게는 고마운 일이겠구나.’

 

명근은 주위를 둘러본 후 커다란 돌덩이를 찾았다. 웃샤, 하는 기합성을 토해내며 돌덩이를 들고 구렁이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등뒤에서 쩌렁쩌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짓이냐!”

 

“으왓, 깜짝이야!”

 

명근은 누가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순간적으로 돌덩이를 놓치고 말았다. 쿵, 소리와 함께 돌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누, 누, 누구요?!”

 

명근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거의 50-60세 가량의 늙은 사내가 커다란 대도(大刀)를 쥐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사내의 머리는 봉두난발에 수염도 고슴도치 마냥 어지럽게 나 있었다. 얼굴은 시커멓게 때로 얼룩이 져 있었으며, 목에는 붉은 색의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유난히 턱이 길었고, 얼굴 표정은 지나치게 불쾌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는 대도를 살짝 흔들면서 명근의 몸을 쫙 훑어보았다.

 

“그렇게 묻는 자네야말로 누군가?”

 

명근은 갑자기 멍해졌다.

 

고스트하우스에 자신과 진오 외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비록 여기 수봉산에 들어온 지는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사람이라는 존재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명근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쩍 의심이 들어 철썩, 철썩 소리가 나게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꿈이 아냐. 꿈이 아냐! 으하하핫!”

 

사내는 명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니 더욱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거참 할 짓 없는 놈이로군.”

 

명근은 사내의 쌀쌀맞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빼앗다 시피 하여 강제로 악수를 하였다.

 

“전 유명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정말 반가워요!”

 

말하면서 손에 힘을 더하며 힘껏 흔들었다.

 

사내는 금새 명근의 성격을 헤아렸는지 더 두고 볼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듯 외면했다. 그는 바닥으로 내려와 대도를 꽉 움켜쥐었다.

 

“사내가 말을 많이 하면 못쓴다네.”

 

그는 거칠게 숨만 몰아쉬는 구렁이의 배를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탁!' 하는 둔탁음과 함께 긴 구렁이의 비명이 이어졌다.

 

명근은 잔인한 그 광경에 몸을 움츠렸다.

 

‘아무리 말 못하는 미물이라지만 저건 너무 심한데…….’

 

생명력이 질긴 구렁이는 끝까지 숨을 거두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명근의 치를 더욱 떨게 만들었다.

 

사내는 대도에 묻은 분비물을 털어 내었다. 다시 나뭇가지에 앉아 구렁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명근은 깨달았다.

 

구렁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뱃속에 있는 먹이를 재빨리 토한 뒤에 도망을 친다. 하지만 소화가 되기도 전에 새의 부리가 들어있는 부분을 공격당하자, 새의 부리가 몸밖으로 빠져 나와 음식물을 토해내지 못하고 저렇게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리라.

 

사내가 구렁이를 한번에 죽이지 않고 그 살육현장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명근은 몸서리를 쳤다.

 

명근은 사내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을 첫 인상부터 깨달았지만 원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불쑥 질문을 내던졌다.

 

“그냥 한번에 죽이시지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합니까? 저 놈 굉장히 아파하는 것 같은데요?”

 

사내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흥.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아직 남아있나 보군.”

 

“네?”

 

“어쩌다가 여기에 온 거지?”

 

“네? 그……. 그러니까…….”

 

말주변이 없는 명근은 순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명근이 머뭇거리는 사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사내는 대도를 내리쳤다. 비명소리가 흘러나온 후, 축 늘어지는 구렁이의 몸은 더 이상 꿈틀대지 않았다. 이제야 완벽하게 숨이 멈춘 것이다.

 

명근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여기서 길을 잃었거든요. 아침에 볼일을 보려고 하는데 아, 갑자기 안개가 뿌옇게 끼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로 와 버렸어요.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제 친구 놈도 아마 절 찾고 있을 걸요. 저 말고도 다른 동료가 있는…….”

 

“허허……. 자네의 말은 동료와 함께 멋도 모르고 수봉산에 들어왔다 이거로군?”

 

명근은 놀래었다.

 

“수봉산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럼 당신도……?”

 

“나도 수봉산에서 여기로 온 것인데 모를 리가 있겠나.”

 

명근은 사내의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사내도 수봉산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이렇게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명근 자신도 눈앞의 사내처럼 뱀을 잡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 않은가.

 

명근은 다시금 사내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맙소사!”

 

결국 망연자실하여 하늘을 바라본다.

 

사내는 말했다.

 

“수봉산은 저주받은 산으로 유명하거늘 젊은 청년이 안됐구먼.”

 

“저주받은 산이라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구렁이의 머리를 베고, 영양이 든 몸통을 토막내려다가 명근의 말을 듣고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명근을 쳐다봤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봉산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예. 수봉산에 석연치 않은 비밀이 있는 것 같아서 친구와 의논 끝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비밀을 밝혀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식량은 물론 지도하고 통신기계까지 완벽하게 챙겨왔지만 헛수고 더군요. 정말 귀신 곡할 노릇이에요. 속 터져 죽겠다고요.”

 

“하……하하핫!”

 

사내는 명근의 말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까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명근이었다.

 

사내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명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멍청한 놈 같으니!”

 

“네?”

 

“이 산의 비밀을 밝혀내면 자네에게 돌아오는 건? 돈인가? 아니면 명예? 아, 그렇군. 명예겠군. 사람들 앞에서 맘껏 호기를 부릴 수 있으니 그것도 명예가 맞겠지. 안 그러면 열 대명의 사람을 실종시키고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는 수봉산에 스스로 들어올 리가 없어.”

 

“뭔가 확인하는 듯한 말투군요. 상당히 기분이 나쁜데요.”

 

“자네가 기분이 나쁘던 말던 나와는 상관이 없네. 다만 자네의 배짱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된 게 안타까울 뿐이야. 안됐군, 안됐어.”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이 산에 왜 들어왔습니까? 당신 말처럼 당신도 남한테 호기라도 부리고 싶었던 겁니까?”

 

사내는 크게 기합소리를 내며 토막낸 구렁이의 꼬리를 들고, 자리를 옮기려 했다.

 

“난 호기 따위에 목숨을 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아.”

 

‘그럼 나는 어리석어도 한참 어리석다는 거군?’

 

명근은 그의 괴팍함에 기가 막히고,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자 상대할 가치를 못 느꼈다. 그를 보고 느끼던 반가움은 어느새 저만큼이나 사라져 버렸다.

 

사내는 명근이 따라오지 않자 가던 길을 멈추고 말했다.

 

“안 따라 올 겐가?”

 

명근은 코방귀를 한번 뀌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제멋대로 생각하는 이상한 노인네에게 또 뭔 말을 들으려고 따라가겠습니까?”

 

사내는 명근이 이러한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의외라는 표정을 보인 후 두어 번의 헛기침을 한 뒤 갈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흥이다!’

 

명근도 다시 길을 걷기 위해 등을 돌리는데 그 순간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내 예상컨대 우리는 반드시 또 만날 게야.”

 

명근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저 수봉산의 비밀을 캐내고자 할 뿐인데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몰아세우기는……참. 나. 그러지 말고 우리 이대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맙시다.”

 

“동료말고 찾는 것은 없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알려 줄 수도 있네.”

 

명근은 큰소리로 콧방귀를 끼고는 앞서 나아갔다. 뒤에서 사내가 “또 보세.”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대꾸조차 하기 싫은 관계로 무시해 버렸다.

 

‘호기라고? 그 놈의 호기가 내 친구를 잡아먹고, 나를 잡아먹을 뻔했는데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명근은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십 수년 전 철이 없던 그 시절, 자랑하기 위해 친구들 앞에서 초능력을 펼쳤다가 정부에 끌려가게 된 악몽이 떠올랐다. 많은 생명체들을 염력으로 죽이고, 살육을 즐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정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탈영을 계획하다가 끝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를 잃어버리던 광경이 떠올랐다.

 

― 넌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

 

― 안돼. 너도 같이 가야 한다고!

 

― 난 이미 글렀어. 너라도 살아. 명근아.

 

― 싫어. 제발……. 제바-알!

 

촥!

 

붉은 선혈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 순간 명근은 떠올리고 싶지 않던 악몽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 두 눈을 꼬옥 감아 버렸다. 거기다가 진오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에 울분이 더해져서 거의 이성이 흔들리는 상태였다.

 

‘젠장, 젠장, 젠장!’

 

이미 해는 저물고, 짙은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헉……. 헉헉…….”

 

명근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뭔 놈의 산이……뱀새끼 밖에 없나. 빌어먹을.”

 

몸을 녹이고 편안하게 잠을 자려고 할 때면 불빛을 보고 덤비는 구렁이들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처음에 구렁이를 보고 질겁을 해서 경황이 없었지만 다시 안정을 찾고 귀고 싶다 느낄 때면 여김 없이 구렁이를 만났다. 그는 구렁이라면 지겨울 따름이었다.

 

지금도 쉬고 싶다는 당연한 갈망 속에서 편히 다리조차 뻗지 못한 채 주위를 경계 중이었다.

 

명근은 생각했다.

 

‘그럼 아까 그 노인네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거람. 안전지대라도 있는 걸까?’

 

그 순간 명근은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 동료말고 찾는 것은 없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알려 줄 수도 있네.

 

명근은 벌떡 일어섰다.

 

‘이 노인네가 뱀이 안나오는 곳을 알고 있어. 뿐만 아니라 걸레조각이 있는 장소도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왜 안 따라 오냐고 했던 것이고. 망할 노인네 같으니! 상부상조도 모르나.’

 

명근의 목적은 어느새 사내를 찾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내를 찾으면 진오도 덩달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예감을 받았다. 분명 사내는 이 수봉산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오 녀석이라면 노인네가 말한 즉시 뭔가 알고 있음을 금방 눈치 챘겠지. 난 왜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명근의 표정은 극도로 어두워졌다. 결국 스스로 복을 찬 격이 되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젠장할!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가는 건데!”

 

명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등뒤에서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그러게 따라오라고 할 때 따라오지 그랬나.”

 

“으왓! 깜짝이야!”

 

명근은 화들짝 놀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 그 사내가 여전히 대도를 든 채로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노인네가……. 깜짝 놀랐잖아요.”

 

사내는 대답대신 명근에게 몽둥이를 내밀었다. 어떨 결에 몽둥이를 받아든 명근은 그것이 뱀을 잡을 때 사용되는 도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몽둥이 끝은 뱀 머리를 잡도록 양갈래로 잘 다듬어져 있던 것이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걸세.”

 

“아, 그렇겠군요.”

 

사내는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띄웠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 미소가 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난 이 곳에서 3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네. 수봉산에 대한 것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지. 예를 들어 밤에 돌아다니면 뱀 뿐만 아니라 이렇게 쥐새끼도 달려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는 말하면서 명근의 뒷덜미로 잽싸게 손을 움직였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명근은 작은 따가움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손가락 만한 박쥐 한 마리가 잡혀 있었다.

 

“헛……. 박쥐잖아?”

 

“흡혈박쥐네. 여기서는 거의 모기로 취급되지.”

 

그는 흡혈박쥐를 땅바닥에 팽개친 후 손에 들고 있는 대도를 내리쳐 두 토막을 내어버렸다.

 

명근은 눈썰미를 찌푸렸다.

 

“굳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자넨 모기를 죽여도 잔인하다고 여기나?”

 

“그렇지만 그건 모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모기라면 모기인 거야.”

 

“원, 노인네가 고집하나는……쯧.”

 

명근은 사내를 따라갔다. 사내가 간 곳은 가시나무 덩굴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다. 놀랍게도 사내가 직접 만들었는지 손댄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명근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굉장하네요! 정말 잘 만들었네요.”

 

“이 곳이라면 뱀 걱정 따윈 없지.”

 

“그렇네요. 역시 믿는 구석이 있으셨군요.”

 

가시나무 동굴 안은 양쪽 벽에 걸린 횃불 두 개가 불을 밝혀주고 있어서 어둡지가 않았다. 사람 온기 탓인지 훈훈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사내는 구석에 놓인 풀과 나무를 가지고 와서 불을 지폈다. 아까 구한 구렁이의 꼬리를 작게 토막내어 풀에 감싼 뒤 굽기 시작했다.

 

구렁이의 살이 타면서 나는 냄새는 정말 향긋했다. 그토록 구렁이가 괴로워하던 것을 떠올리면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명근은 문뜩 떠오른 것이 있어 물었다.

 

“여기는 뱀하고 새 외에는 없나보죠? 다른 생명체는 보지 못한 것 같아서요.”

 

사내는 말했다.

 

“나 역시 뱀과 조류 외에는 본 것이 없어.”

 

“날아다니는 것과 기어다니는 것 뿐이라…….”

 

사내는 토기로 된 그릇에 물을 담아 명근에게 내밀었다. 명근은 동굴과 토기, 그리고 사내의 행색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대로 된 삼위일체(三位一體)구나. 원시인.’

 

사내가 주는 토기를 받으며 명근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내는 일어나 동굴 입구에 섰다.

 

그는 신비한 연보라빛 하늘을 감상하듯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엇인가를 신중히 생각하다가 낮은 음성으로 명근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이 수봉산에 들어온 지 어언 3년이 되었네. 처음에는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의 답이 이 안에 있을 것 같았고, 나중에는 수봉산 자체가 내 생활이 되어 있더군.”

 

명근은 사내가 수봉산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들어왔음에 크게 놀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료도 같이 오신 겁니까?”

 

“아니.”

 

“들어온 지 3년이 되었다고 하셨죠? 그럼 3년 동안 수봉산을 빠져나가지 못하신 건가요?”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진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세상으로 나가는 길까지 없진 않더군.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분명히 나가는 방법은 있네.”

 

“네?! 정말입니까?!”

 

명근은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젖어 재차 확인하듯 그에게 물었다.

 

“확실하죠? 나갈 수 있죠? 아, 그렇지. 나무마다 빨간 걸레조각이 걸려 있던데 혹시 그게……?”

 

“내가 걸어놓은 거지.”

 

“살았다. 살았어! 하하!”

 

사내는 뛸 듯이 좋아하는 명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명근은 사내를 처음 보았을 때 상당히 괴팍한 인물이라고 느꼈는데 이렇게 따뜻한 미소를 보니 불편했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사내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과 그리움이 맺혀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수봉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수봉산은 몇 가지의 사실만 알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음을 깨달았지. 그리고 왜 저주받은 산이라 불리는 지도 알 수가 있었어.”

 

사내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 아마 내가 왜 빠져나가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할 거야. 그렇지 않나?”

 

명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이런 생지옥에 자진해서 살아간다는데 궁금하지 않으면 제가 사람이겠습니까.”

 

사내 역시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난 내 딸을 잃었네. 내 딸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나갈 수가 없어.”

 

“아!”

 

명근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3년 전에 이곳에서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 중 따님이 포함된 거군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명근은 사내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생각했다.

 

‘여기서 실종되었다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하던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아직 나가지 않는 걸 보면 딸을 발견하지 못한 듯 한데……’

 

사내는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 명근에게 물었다.

 

“아, 자네말고도 동료가 있다고 했지?”

 

명근은 기다렸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 말고도 한 명 더 있습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도 그 녀석은 절 찾고 있을 거예요.”

 

“쯧쯧…….”

 

갑자기 사내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영문을 모르는 명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까닭을 묻는다.

 

“왜 그러시죠?”

 

사내가 말했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자네 친구가 위험에 빠졌어.”

 

“네?”

 

“이 산이 왜 저주받은 산이냐면 그건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도 아주아주 무서운 괴물이 말이야. 나도 그 괴물에게 크게 당할 뻔했거든.”

 

“괴물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구렁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명근을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은 구렁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괴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아마 지금쯤이면 자네 친구는 그 괴물과 마주 하고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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