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1번 펌글에 대한 반론 (3)

백승길 작성일 07.07.20 02: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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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입니다.


5챕터를 할 차례군요. 읽어보니 드디어 꼬투리 잡기를 시작합니다. 아, 물론 꼬투리는 벌써 이전부터 잡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 대중적인 주제를 꼬투리잡고 있군요.

그래서 저도 글쓴이를 따라서 꼬투리 잡기를 해보렵니다.


관구검기공비는 그것을 증명한다. 삼국지는 분명히 기록했다. 그것은 환도를 쳐부수고 고구려왕을 몇 차례 추격하여 옥저의 끝자락에 암석을 새겨 공을 기록했다고

- 그곳은 고리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변경이었을 뿐이다.


물론 글쓴이는 절대 출처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삼국지>라고 써주기라도 했으니 망정이지... 저 글은 ‘<삼국지> 위서 28권 '관구검 조’에 나오는 내용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전혀 원본과 동떨어져 있으며, 당연히 직접적인 원문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제 멋대로 쓴 것입니다. 물론, 원본에는 글쓴이의 말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 적혀있죠. 아래의 원본을 보시죠.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옥저를 천여리 지나서,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돌에 그 공적을 새겨, 환도산과 불내성에 세웠다.(직역하면, ‘환도산에 새기고, 불내성에 새겼다.’ 입니다. 즉 둘 다 새겨놨다는 거죠.)


글쓴이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관구검기공비는 지금의 중국 집안시, 즉 우리가 비정하는 국내성 터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관구검기공비는 옥저의 끝자락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집안 일대는 고구려의 변경, 옥저의 땅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 <삼국지>에는 환도산과 불내성에 각각 새겨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환도산은 말할 것도 없이 고구려의 수도가 있는 곳이죠. 불내성은 불행히도 옥저의 옛 땅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안변입니다.


물론, 이것만 놓고 보면 발굴된 기공비가 환도산 기공비인지 불내성 기공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은 둘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은폐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팠습니다. 설사 이제 와서 ‘그 기공비는 불내성 기공비여’라고 주장해도 물건너간 얘깁니다. 애초에 사실대로 적어놓고 그리 주장했다면 참 멋진 주장일 수 있었는데 말이죠.


다음을 봅시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손권전)을 보라! 고구려에 대해 뭐라고 써 놨는지?

통설대로라면 바다도 없던 고리가 오나라와 배로 통교하는가?


웬일로 출처를 꽤 상세하게 밝히고 있군요. 물론, 원문은 여전히 싣지 않았고, 사실 자랑스레 출처랍시고 써놓기는 했는데 정작 인용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글을 읽는 사람들이 삼국지 오서 오주전을 보았으리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어차피 안 찾아볼게 뻔하니 뽀대나게 써보자는 건지 그 심보가 참 가상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스스로 바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창하게 출처를 기록했지만, 원문을 찾아볼 필요도 없군요.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은 어떻게 통교했을까요?

수, 당 시대의 중국은 장안이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과 왜(일본)은 사신을 주고받았을까요?


이건 정말 병신이나 쓸 글이고 반박입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고구려 지도만 살펴봐도 게임 끝나는 엉터리방터리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에게 바다가 접한 영토가 없습니까? 이런, 어쩌나, 상당히 훌륭한 항구인 요동반도 끝의 대련항, 압록강 하구의 의주, 평양은 이당시 낙랑이 있었으니 패스, 아무튼 바다도 많을뿐더러 쓸만한 항구도 많은데, 이건 어찌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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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고구려가 요서에 있다고 주장하는 군요. 6챕터에서 자세히 보겠다고 하니 일단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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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구려 건국에 대한 이야기, 부여의 부활 등등은 조금 거칠지만 나름대로 참신하고 흥미로운 가설이군요. 글쓴이에게는 안됐지만, 그와 같은 가설들 모두 이미 학계에서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랍니다. 물론, 전반적으로 글쓴이의 논지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 논의중인 학설이고, 실제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실들입니다.


글쓴이는 나름 어디서 줏어들은 것 가지고 ‘참 충격적인 가설이지? 푸하하하’ 하면서 써놓았을 겁니다. 훗, 하지만, 학계에서 이미 논의중인 거라는 것은 절대 몰랐을 겁니다. 그정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니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삼국 초기 정치체제 또는 부체제로 논문을 검색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은 상세하게는 모르는 부분인지라 일단 넘어가죠.


첨언하자면 태조란 호칭은 동양사에서 바로 고리의 태조대왕이 처음이다. 이래도 시호법이 오직 지나에서 시작되었는가? 우리가 바로 황제의 나라 천자의 나라가 아니던가? 어찌 지나사에 태조대왕보다 앞선 태조란 칭호가 있었던가?


과연 이 주장은 사실일까요? <사기>를 찾아보죠.

 

高祖起微細,撥亂世反之正,平定天下,爲漢太祖,功最高 (사기 고조본기 제8권)


고조께서 일어남은 작고 가늘었으나 난세를 다스리고 바로잡았으니 천하를 평정하고 한나라의 태조가 되셨으니 공이 가장 높습니다.


한 고조 유방 (BC 247[추정]~BC195). 말할 필요도 없군요. BC라고 써있는 거 보세요. 태조왕 때는 이미 기원후에 접어들고도 한참입니다.


이따위 뻔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으니 참 한심할 뿐입니다.

 

뿐만아니라,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군요. '시호법'이란 왕이 죽은 후에 그 업적에 따라 무슨무슨 왕, 무슨무슨 제 하고 칭호, 즉 시호를 붙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태조왕 때 시작이라네요? 그럼 동명성왕은 시호가 아니고 뭐랍니까?

 

'태조' 운운 하는 호칭은 시호가 아니라 묘효(廟號)입니다. 저도 묘호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죄송하구요.

 

아무튼, 묘호는 불행하게도, 고대 은나라 시대부터 시행하고 있던 것입니다. 은나라의 누가 태조인지는 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은나라 시기에도 묘호는 멀쩡하게 시행되고 있었답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묘호보다 시호를 중시하였을 뿐이지요.

 

묘호가 시호보다 앞서는 것은 대략 당나라 시대부터입니다.

 

정말 이렇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차는 것도 힘들텐데 말이죠. 머리에 든 것이 없으니 계속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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