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씨(閔氏)로,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태어났다.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뒤,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玉壺樓)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하지만 최근 시해장소가 옥호루가 아니라 경복궁 장안당(長安堂)과 곤령합(坤寧閤) 사이에 있는 마당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묻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해 재평가작업이 일어나면서, 을미사변이 미우라 고로의 단독범행, 또는 그의 후원을 받은 민간인들이나 일본 낭인들의 범행,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차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