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를 뒤늦게 감상했습니다.
콜린 파렐과 레이첼 와이즈, 레아 세이두, 벤 위쇼, 존 C. 레일리 등 화려한 출연진도 출연진이었지만, 소재와 플롯의 독특함에 더욱 이끌렸던 영화였습니다. 이 모든 것과 위화를 형성하고 있는 '더 랍스터'라는 제목도 마찬가지였구요.
가까운 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짝을 찾아야만 합니다. 홀로 남겨진 이들은 45일간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무르며 완벽한 커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을 얻지 못한 사람은 동물로 변해 영원히 숲 속에 버려지게 됩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호텔로 오게 된 중년의 남성이죠. 개로 변해 버린 형과 함께 도착한 그는 짝을 찾기 위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우선 제목부터 살펴볼까요. 실제 바닷가재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의 제목이 '더 랍스터'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혹여 커플이 되지 못할 시 데이빗이 되길 원했던 동물이 바로 랍스터죠. 이유 또한 간단합니다. 100년 이상 오래오래 살 수 있고,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바다에서 사는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화는 출발점에서부터 주인공 데이빗의 소망을 전제로 극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생존'이 바로 그것이죠.
극중 등장하는 두 종류의 공동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곳은 커플이 되지 않으면, 다른 한 곳은 커플이 되면 곧바로 제거 대상이 되지요. 그러나 그 둘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공통점이라고 하면 '획일화'가 있을 겁니다.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뿌리내린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구성원들은 생존할 가치를 잃게 됩니다. 애매한, 적당한, 은근한 중간자가 설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죠.
위에서 언급했듯, 커플이 되지 않으면 제거되는 공간에서 출발하는 영화임에도 <더 랍스터>는 '생존'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데이빗은 눈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사교성이 뛰어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죠. 사냥을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으며, 춤을 추지도 안 추지도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확고한 한쪽 면만을 요구하는 사회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도 높습니다. 그럼에도 장수함을 이유로 랍스터를 선택한 그는 생존을 위해 자아를 한 꺼풀씩 버려나갑니다.
극중 콜린 파렐의 데이빗을 제외한 모든 배역들에겐 일정한 이름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근시 여인, 외톨이 리더, 절름발이 남자, 혀짤배기 남자, 코피 흘리는 여인, 비정한 여인, 비스킷 여인 등이 전부죠. 이름에서부터 드러난 이방인 데이빗에게 진실된 조력자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각자의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그 일부에 지나지 않죠. 그럼에도 데이빗은 일말의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합니다.
세계관의 설정상 일말의 감정조차 배제된 극의 분위기는 차가움의 연속입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온기는 데이빗의 눈물과 좌절에 섞여 증발해 버리고 말죠.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어떻게든, 무엇이든 붙잡아 다시금 되새기는 데이빗의 의지입니다. 다소 아리송한 결말에도 단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어떤 선택이 되었든(그것의 선악과 시비에 관계없이), 그 결과는 그를 삶의 다음 장으로 안내하리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