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손꼽히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안중근 의사(1879~1910),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성장 배경 상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의 활동에 어울리는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 세 어머니의 가르침은 세 아들을 ‘독립운동’이라는 한 가지 길로 이끌었지만 그 방법은 달랐다. 제 64주년 광복절을 맞아 자식을 우리나라 대표 독립운동가로 키운 3인의 교육법을 알아봤다.
◆ 엄모(嚴母)형 - 아들을 매로 키운 김구 어머니
한국 독립운동의 대부(大父)격으로 꼽히는 백범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圓) 여사는 아들이 성년이 되었어도 아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매를 들고, 잔소리를 하는 엄한 어머니였다.
회초리는 아들이 예순이 다 돼서야 거뒀다. 1934년 중국 가흥에서 윤봉길 의거로 피신 중인 아들과 만난 곽 여사는 “군관학교를 운영하며 많은 청년들을 거느린다 하니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글을 배우지 못했던 곽 여사는 아들을 교육시켜 신분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남편 병구완을 위해 가마솥까지 팔아치우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남의 집 일을 돕고 길쌈을 해 아들의 벼루와 먹을 사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곽 여사는 아들의 가장 든든한 독립운동 동지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1896년 김구가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해 인천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곽 여사는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다”고 외쳐 아들에게 힘을 북돋았다.
임시정부가 남경에 있을 때 곽 여사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청년들이 잔치를 열려는 계획을 사전에 눈치 챘다. 능청스럽게 “그 돈을 그냥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고 하며 돈을 받은 곽 여사는 자신의 쌈짓돈을 더 털어 권총을 구입한 후 “이것으로 왜놈을 죽이라”며 청년들 앞에 내놓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이렇게 의로운 기개를 잃지 않았던 곽낙원 여사는 작은 키와 볼품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만인의 어머니’로 임시정부 안팎에서 크게 존경받았다.
◆ 자율형 - 아들의 적성을 최대한 존중한 안중근 어머니
평범한 농민이었던 아버지 윤황(尹墴)은 장남 윤봉길 역시 순박한 농민으로 자라길 바랐지만 김 여사의 생각은 달랐다. 교육열이 대단해 유아시절부터 위인들의 이야기를 가르쳤고 봉길이 6세가 되자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 보내 천자문을 배우게 했다.
어머니의 큰 기대와는 달리 어린이 윤봉길은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매일같이 서당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김 여사는 여느 어머니처럼 호되게 야단만 쳤지만 장남에 대한 기대가 워낙 남달랐던 지라 애가 탔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바쁜 농사일도 팽개치고 몰래 글방 앞에 가서 안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느…느 천 따지, 검으 현, 누루 황, 집우, 집주, 너, 너브… 너브…”
아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이들의 비웃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어 큰아버지가 장내를 정숙 시키고 아들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이날 김 여사는 봉길이 글을 읽을 때 ‘ㄹ’ 발음을 못해 말을 더듬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미 욕심에 어린 아들을 그토록 나무랐던 것을 뉘우쳤다. 낮에는 힘든 농사일과 집안일을 해내면서도 저녁엔 아들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 결과 말 더듬는 습관을 완전히 고칠 수 있었다. 공부에 흥미를 얻은 윤봉길은 청년시절 마을 시회에서 장원을 독차지하며 이웃마을에까지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어머니의 교육열이 이토록 뜨거웠지만 윤봉길의 공식적인 최종학력은 보통학교(초등학교) 중퇴에 불과하다. 김원상 여사에게는 교육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남자들마저도 나라의 독립에 대해 언급을 피했지만, 김 여사는 아들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항상 강조했다.
김 여사의 이런 당찬 가르침은 3.1운동 직후 보통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의 자퇴로 이어졌다. 마을 장터에서 만세를 외치던 어른들이 일본군경의 탄압에 피 흘리는 모습을 목격한 윤봉길은 “일제 하수인 되라는 학교에 나가지 않겠다”며 돌연 자퇴를 선언했다. 김 여사는 어린 아들의 의기(義氣)를 대견해하며 흔쾌히 허락하면서도 학업에 멈춤이 없도록 좋은 스승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훗날 윤봉길이 일본군에 폭탄을 던지자 가족들은 연일 일본 순사들의 가혹한 감시와 모욕을 당했다. 어느 날은 집을 감시하던 일본 순사가 “망할 놈의 집안 같으니. 아들을 흉악범으로 기르니 좋소?”라며 조롱하자 “우리 봉길이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네놈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 가족을 괴롭히려거든 차라리 날 죽여라”며 악을 써 돌려보낸 일도 있을 정도로 꼿꼿한 여장부였다.
고작 25세의 나이에 처자식, 부모형제를 모두 등지고 장렬히 산화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김원상 여사의 이러한 ‘옳은 교육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런 훌륭하신 어머님들이 우리조국의 광복을 이끄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