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흔들림이 느껴졌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안경을 쓰신 나이를 지긋이 드신 할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내 옆자리에 앉아 버스가 출발 할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분이셨다. 그 할아버지는 벌써 위쪽에 올려놓았던 짐들을 꺼내어 바깥으로 향하셨다.
나는 손목에 있는 전자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여섯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출발할 때가 아침 열시였으니 여덟시간이나 걸린것이였다. 오래 졸았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말년병장이라 그런지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 매일 놀고 먹으면서 운동도 않하니....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그때의 꿈을 꾸었구나... 그때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 수박 농사를 돕는다고 나와서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고 바로 취해서 필름까지 끊기고.. 지금은 소주10병을 마셔도 거뜬한데 말이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버스터미널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ㄱ’ 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터미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이곳 터미널의 모습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냄새나는 화장실이며 조그마한 대합실 그리고 고물tv....
tv를 보고 있자니 문득 종규 형이 다시 생각 났다.
피식..
나의 입가에는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다시금 처음 형을 보았을때가 생각났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고2때 였다. 엄마에게..아 아 이제는 어머니인가? 여하튼 고2 였을 당시 나는 모든 것이 짜증이나 시골에 내려가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엄청 난리를 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성적을 올리면 시골에 보내주신다고 했고 나는 그 이야기에 오기가 발동해 정말로 엄마가 약속한 시험 점수 커트라인을 넘겼다. 그때의 성적은 고등학교 생활 중 내 최고의 성적 이였다.
으음..그때를 생각하고 좀더 열심히 공부해서 그 점수만 유지했어도 잘하면 서울에 있는 전문대라도 들어갈수 있었을 텐데, 조금은 후회가 된다. 내가 사실 고등 학교때 그놈에 게임에만 빠지지 않았으면 진짜 공부 잘했을텐데 그놈에 게임방이 왠수지... 이제 전역도 얼마 않남았는데 이제부터는 게임은 정말 자제해야겠다.
어라? 이거 갑자기 이야기가 왜 이쪽으로 세버렸지? 그럼 하던이야기 계속...
그렇게 시골로 내려온 나는 첫날 밖에서 잠자가 감기에 걸렸었고 둘째날은 할머니 수박농사 도와준다고 나가서 막걸리 마시고 필름끊겨서 한나절동안 누워있었고 셋째 날부터는 숙취에 감기까지 겹쳐 시골에 있는 동안 내내 알아 누웠었다.
정말 최악의 일주일 이였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덕분에 종규 형을 알게 되었다. 형은 나와 달랐다. 약간은 어눌한 말투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해맑은 웃음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형의 진심을 알수 있었다. 따듯한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멋진 꿈을...
그날은 내가 서울로 떠나는 날이였다. 감기도 어느정도 낳았고 몸도 많이 괞찮아진 나는 사촌형과 함께 터미널에 왔다. 버스 시간이 상당히 남았기에 형과 나는 근처 오락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락을 하던 나는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락실 옆 전파상에서 종규 형을 보았다. 형은 유리창 너머에 있는 낡은 고물 텔레비전은 바라보고 있었다. 꼬깃 꼬깃한 오천원 짜리와 천원짜리 몇장이 꼬옥 쥔체....
나는 형을 불렀다. 그러자 형은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나를 보며 많이 아쉬워했다. 나는 형에게 물었다. 어쩨서 이런곳에 있냐고 그러자 형은 내게 말했다. 텔레비전은 사기 위해서 라고..... 생각해보니 종규형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단지 오래된 고물 라디오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이였다. 그 말을 하는 형의 눈은 무척이나 빛이 낳다. 정말 순수한 열망, 혹은 소망이 느껴졌다.
형은 내게 말했다. 이제 삼만원만 더 모으면 텔레비전을 살수 있다고... 전파상 아저씨가 돈을 다 모아오면 그때 멋진 텔레비전을 주겠다고...
“어 태호야 여기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일병 약장이 세겨진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시원스럽고 사내다운 사내였고, 그 사내는 다름아닌 우리 사촌형이였다.
“어? 준석이형”
형은 나에게 다가와 한쪽 손을 내 어깨에 걸쳤다.
“짜샤 왜이렇게 늦게 온거냐?”
“뭐? 요즘 귀성시즌이라 말도 못하게 막힌거 알면서 그런소리야? 거기다 군복도 않 벗고 바로 내려왔더니..”
말년휴가 첫날 군복도 않갈아입고 바로 온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형은 능청스럽게 나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알아 알아 그냥 농담인거 알면서 괜히 열내기는”
“우리 형은 정말 ... 나보다 짬밥도 않되는 일병이면서 하늘같은 말년병장에게 손을 대다니...”
“뭐야? 어차피 부대도 다르면 다 아저씨 잖아. 이 아저씨야”
“어이구 그래요 오늘 휴가 복귀하는 일병 아저씨?”
나의 말에 형은 인상을 구겼다. 하긴 나도 그 심정 이해가 간다. 누가 휴가 복귀를 하고 싶겠는가. 뭐 나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형은 나의 말에 엄살을 부리며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야 야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왜 끄내냐?”
“후후 형이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었잖아요.”
“아이고 내가 너랑 말을 말아야지 옛날에는 순둥이에 형 말도 잘 들었는데 이제는 머리 컷다고 형을 잡아먹네..”
“그러니까 이기지도 못할꺼 나한테 왜 덤벼..”
“그래 그래 너 잘났다.”
형은 오늘 부대에 복귀한다. 다행이도 집에서 가까운 부대에 떨어져 다행이지만 근대 생활이란게 다 그렇듯 일병을 단지 얼마 않되는 형은 많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형은 잘 해나갈 것이다. 나같은 놈도 군대에 적응해서 이제 나오자니 섭섭하니....
형과 나는 근처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삼겹살 이인분과 소주 하나를 시켰다. 얼마 시간이 되지 않아 먼저 소주가 나왔다. 우리는 일단 술을 한잔씩 했다. 술이 들어가자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번에 일병때 면회 온 이후 처음 만나는 사촌형 이였기에 재법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이야기며, 형이 학교 졸업하고 애인까지 두고 군대에 들어가 이등병때 매일 몰래 몰래 편지쓰고 그러다 걸려 얼차려 받은 일이며 요번 할머니 제사는 잘 치뤘다는 이야기들...
그러다 문득 종규형이 생각났다.
“아참 그러고 보니 종규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
“........”
형은 말이 없었다. 자신의 술잔은 만지작 거리다 이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토해내듯 말을 했다.
“죽었어..”
“뭐?”
“죽었다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다시 형에게 물었다.
“언제?”
“너 예전에 한번 내려왔었잖아? 너 서울 올라가고 얼마쯤 지나서이니 아마 이맘때쯤 인거 같구나...”
“왜 죽었는데?”
“자살이래”
“자살?”
“그래 자살. 우리 동네 저수지에 빠져 죽었어.”
종규 형이 자살을 하다니.... 나는 아직도 종규 형의 그 눈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실은 전파사 그 자식이 죽인거나 다름없어”
“뭐?”
“왜 있잖아 그 터미널 오락실 옆 전파사”
“그래 거기 나도 알아”
“글쎄 자살하기 전날 아침 거기서 종규형이랑 전파사 주인이랑 실랑히 하는걸 마을사람들이 봤대지 뭐냐. 종규형이 전파사 주인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울고 불고 난리가 아니였데, 뭐라나 왜 돈을 줬는데 텔레비전 않주냐고”
형은 이야기를 하면서 화가 나는지 비워진 술잔에 술을 체워 단숨에 마셨다.
“크으.. 쓰다. 그랬더니 그 빌어먹을 자식이 ‘너한테 돈받은 적이 없다 어디서 병신놈이 와서 행패야’ 라고 했다더군.”
“하하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기억한다. 종규 형의 손에 들려있던 그 돈을.... 그리고 그의 눈을...
나는 술을 한잔 들이켰다.
"형"
"왜?"
"그거알아?"
"뭘?"
형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 내가 종규형 이야기를 해가지고 복귀하는 형 기분을 잡쳐놨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