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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청룡대의 승리는 계속되었다. 청룡대의 무공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간신히 2류를 벗어나는 실력이었지만 이곳 남만의 일반병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남만에도 그 나름의 무림은 존재하고 있었다. 남만 무림의 탄생은 단 하나의 목적, 적자생존의 밀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투쟁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 맹수병의 무공은 단순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움직임을 추구하였고 이기는것이 아닌 살아남기위한 초식들을 바탕으로 독이나 암기를 사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남만을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이 맹수병들의 실력은 중원에 와서도 1류수준의 무인이 될 수 있을정도로 대단하였으나 남만의 무림은 중원보다 폐쇄적이었기에 일인전승이 대부분이었고, 그 수마저 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소수의 맹수병들의 주임무는 남만왕의 호위, 그들이 직접 전장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영락제의 남만원정은 '청룡대'의 활약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패배로 부족국가인 남만의 성격상, 각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잃어가던 남만왕은 다급함을 느끼게되고 결국 자신의 호위를 맡고있는 맹수병들을 전장으로 보내게 된다. 맹수병을 활용한 남만의 유격전은 명군에게 밀리던 남만의 전세를 역전시킨다.
맹수병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청룡대를 기습하였다. 몇몇의 목숨을 취한 후 빠르게 사라지는 맹수병들 때문에 남겨진건 청룡대원들의 시체들 뿐이었다. 자신의 문파 사람이 죽은 것에 흥분하여 돌격한 자들은 밀림 곳곳에 설치된 함정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행군중에도 독화살과 독침은 은밀하게 날아와 목숨을 앗아갔다. 계속되는 누군가의 비명과 이어지는 죽음은 '청룡대'에게 한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젠, 밀림의 포식자는 너희들이 아니다.'
'청룡대'는 어느새 사냥감이 되어 밀림속에 천천히 고립되어갔다. 남만의 왕은 그렇게 조금씩 '청룡대'의 피로와 절망감, 분노를 끌어올려 극에 달하게 한 후 적당한 미끼를 던졌고 '청룡대'는 정해진 수순처럼 그 함정에 빠졌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뺵뺵한 창들과 검,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엄청난 수의 궁병, 그리고 맹수병들에게 호위 받은채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만왕의 모습이 압도적인 풍경으로 청룡대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남만왕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진 순간 이내 하늘은 화살로 뺵뺵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청룡대는 남만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커억.."
한 남자가 하늘을 가득채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무림에서 이름깨나 날렸다며 거들먹 거리던 자였었다. 전장에서 이름값은 목숨을 살려주지 않는다. 화살이나 창에는 고수를 피해 돌아가는 눈이 달려있지 않다.현호는 살아있는지 숨을 꺽꺽데는 그 남자를 집어 방패삼아 떨어지는 화살들을 막았다. 그 남자는 화살을 맞으면서 뱀처럼 꿈틀거렸고 그 떨림은 현호에게 생생하게 전달 되었다. 현호는 어디선가 악취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였다. 현호는 화살들로 벌집이 되어 이용가치가 사라진 시체를 버리고는 주위에 쓰러져 신음하는 다른 동료를 들어올려 화살들을 막았다. 그리고 한참후에야 현호는 그 냄새의 진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몸은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현호는 자신이 썩어 문드러가고 있는 시체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현호의 정신속에서도 부패 작용은 어김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난 살아야만해. 어쩔 수 없어. 미안해. 미안해."
현호는 쉴새없이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자신은 아직 죽기에는 일렀다. 비록 돈떄문에 남만까지 끌려온 빌어먹을 인생이었지만. 현호의 목숨값에 그나마의 삶을 유지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무너지지 않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썩어 부스러지는 정신을 불들어두는 것은 무엇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한편 쉴새없이 떨어지는 활들을 검으로 쳐내던 제갈군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조여드는 절망감을 느꼈다. 자신은 어차피 가문에서 버려졌을때 이미 죽었다. 어차피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서자라고는 하나 자신의 핏줄이건만 자신을 이곳 전쟁터로 버린 아버지, 아버지의 옆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던 자신의 친어미마저 질투하여 독을 먹인 어머니, 자신의 재능을 질시하여 오른손 힘줄을 잘라버린 배다른 형제들. 제갈군은 항상 자신이 언제든지 죽음이 함께하는 전쟁터에 서 있는 것을 감사해 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부터 꿈꾸던 죽음을 손에 쥘수있는 이 순간에 어째서 절망감이 날 사로 잡는걸일까?"
"형...크윽.."
제갈군을 바라보는 만향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너 때문이겠지. 가문의 수치인 나를 항상 형이라고 부르며 내뒤를 든든히 받쳐주었던 너 때문이겠지. 네가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못 견디게 절망스러운 것이겠지.'
제갈군은 담담히 만향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이지만 머릿속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아지고 있었다. 제갈군은 자신의 검을 꽈악 움켜쥐었다. 제갈군의 죽어가던 마음이 만향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화살세례가 끝나갔다. 주위는 '청룡대'의 비명과 신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죽음의 기운이 대지위의 존재들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필패. 그리고 죽음. 선택지마저 존재하지 않는 사로(死路). 그떄였다. '청룡대'에서 상대적으로 무위가 낮아 제일 먼저 죽어나간 몇 남지 않은 낭인들 중 한명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청룡대'의 살아남은 자들은 멍하니 그 낭인을 바라보았다.
"젠1장, 염1병, 지1랄, 씨1앙!! 사부님은 항상 말씀하셨지. 강하면 피하고 약하면 싸워라. 억울하면 더 강해져라. 강한자만이 세상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난 어떻게 해야되는거냐! 씨1팔, 내가 어떻게든 활로를 뚫을테니 내 뒤를 바짝 따라와. 다들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지?"
말투는 뒷골목 하오배 같았지만 그의 표정. 그의,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미소. 그 미소에 홀려서일까? 아니면 자신들보다 약한 주제에 앞으로 나선 낭인의 의지에 흔들려서일까?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묶은 머리를 휘날리며 앞으로 쇄도하는 낭인의 뒤를 따라 세상에 버림받은 자들과 돈에 목숨을 판 3류 인생들은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시작된 반전. 앞서달려가던 낭인의 손에서 펼쳐지는 짙은 암흑의 운무와 함께 평원에 퍼지는 죽음의 향기.
30년전, 산동에 한 검가가 있었다. 검가의 주인은 후덕한 성격으로 그의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과 아름다운 부인, 그리고 총명한 자식들이 있었다. 영원히 이어질거라 생각했던 일상의 행복. 하지만 그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불행. 그의 부인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 그의 친구가 부인에게 음심을 품었다는것. 어느날 그의 집에 무사들과 그의 친구가 쳐들어왔다. 그들이 말하는 그의 죄목은 마공을 익혔다는 것. 가족을 지키기위해 싸웠던 그는 그날 양팔을 잃었고 그가 보는 앞에서 자식들의 목은 잘렸으며 부인은 혀를 물었다. 부인의 시체 위에 올라탄 한떄 자신의 친구였던 짐승의 희열.
검사에게 검을 쥘수 있는 양팔이 없으니 어찌 복수를 할 수있을까.
양팔을 잃은 그는 살아남았다.
십년 후, 수십개의 검집을 몸에 매단 한 남자가 산동에 찾아왔다. 그 남자는 특이하게 양팔이 없었고 온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그 남자는 산동에서 가장 큰 검가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시작된 복수. 그의 주위로 펼쳐진 수십개의 검들의 유희. 양팔을 잃은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만들어낸 검공 만검출해. 검을 쥐지 않고 온몸으로 검을 튕기며 움직이는 검진. 아니 정의할 수 없기에 검진이라 불린 검공. 그 극에 이른다면 검의 수는 만검이 된다.
낭인의 주위로 주위의 검들이 메마른 바람과 같이 불어와 그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어깨로, 등으로, 팔꿈치로, 온몸을 돌며 춤을 추듯 움직이는 검들. 어느새 낭인의 주위에는 남만병사들의 살과 뼈가 휘날렸고, 잘려나간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붉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후 낭인이 지나 갔던 곳은 붉은 피바람만이 바닥에 낮게 깔려 대지를 덮고 있었다. 남만병사들이 밀리는것을 참지못하고 낭인의 주위로 뛰어든 맹수병의 머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상체에는 왼쪽 어꺠만이 남았다. 제갈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 눈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들리는 자신의 검의 울음소리. 타인의 애병마저 흔들리게 마드는 검공. 제갈군은 예전 서책에서 읽었던 한가지 무공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건 마공이군. 마교제일검, 암혼의 마공. 양팔을 잃었던 암혼만이 쓸 수 있었던 비정상적인 검공. 아니 한사람이 펼치는 검진. 만검출해."
제갈군은 당혹스러웠다. 자신은 정과 마의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분명 정에 소속되어진 자였다. 마는 정과 섞일 수 없는 제거해야되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은 그를 버렸고 마는 지금 그의 목숨을...아니 만향의 목숨마저 품어주었다.
"모순이군."
이런 상황에서 고민은 부질없는 짓었다. 제갈군은 자신의 검에 살기를 담고는 정면을 응시한채 달려나갔다. 제갈군은 사실 그 후론 기억이 없다. 단지 기억나는건 섬뜩할 정도로 축축하고 차가운 느낌과 남만왕 가슴에 박힌 한자루의 검과 앞으로 자신들을 이끌 대장, 설담의 한마디였다.
"아, 결국 저질러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