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앙은 성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생각보다 성 안은 훨씬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노점상들의 호객하는 시끌벅적한 소리, 어릿광대의 풍자극, 어린 장난꾸러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벌이는 왁자한 소동과 까르르 터지는 뭇처녀들의 웃음소리까지.
번화가를 어느 정도 나오자 어디든 보일법한 뒷골목의 풍경도 나왔다. 다만 다른 곳과 틀린 점이 있다면, 선술집과 사창가 등이 모인 뒷골목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정도.
요란한 간판들과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창부와 우락부락하고 얼굴에 상처는 예사인 덩치들이 칼을 갈며 데미앙을 흘끔거리는 일들만 없다면, 이 곳은 그냥 일반적인 골목풍경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시장의 통치가 꽤 괜찮게 먹히는 것 같았다.
데미앙은 문득 한 가게의 간판 앞에 멈춰섰다. 스케루니 전당포. 팔크람에게서 들은 정보라면 여기가 틀림 없었다.
'메리니 그 애, 스케루니 전당포에서 돈을 빌렸나봐. 악덕고리대금도 하고 있지. 아마 네가 준 그 금화도 전부 그 쪽으로 넘어가게 될거야.'
데미앙은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성의 동서남북을 헤매며 메리니를 찾느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게 훨씬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것 또한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안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가 그렇게 가게 앞에 주저 앉아 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질이 안 좋은 로카치오 패거리들에게.
"어이, 형씨."
그 패거리들 중 한 명. 카라드가 다가갔다. 나머지 일당들은 저 편에 모여서 데미앙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푼 적선 좀 하시지. 우리 같은 사람들 사정 뻔히 아실거 아니셔. 아니면...."
카라드는 슬며시 허리춤의 고나드 (중간 정도 길이의 폭이 넓은 도)를 보여주며 을러댔다.
"훔족들의 피로 적셔진 이놈 맛을 좀 봐야 생각이 드실련가?"
데미앙은 카라드가 말하는 내내 주저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뒤편 저 너머의 패거리들을 보고 있었다. 그 중에도 기골이 장대하고 턱선이 강건한 어린 놈이 하나 있었다. 그외에는 보아하니 훔족은 고사하고 누구 하나 죽여보지도 않은 동네깡패 정도의 패거리들일 뿐.
데미앙은 조용히 말했다.
"꺼져라."
"에? 뭐라고? 잘 안들리는데?"
"꺼지라고 했다."
"근데 이 아저씨가 돌았나...."
카라드가 성깔을 내며 제법 능숙한 포즈로 고나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고나드는 부러져 버렸다.
"이.....이게....어떻게...."
"담금질이 덜 된, 칼 축에도 못끼는 놈을 휘둘러봤자니까. 꺼지라고 한 거다."
어느새 데미앙의 손에서 단검이 놀고 있었다. 카라드의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검을 뽑으려 동작을 크게 한 한 순간에 데미앙이 일어나 고나드를 단검으로 자르고 다시 주저앉았다는 이야기인데, 카라드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잠깐.....기달려봐....."
더듬거리는 말을 남겨놓고 카라드는 부러진 고나드를 든 채 꽁무니를 뺐다. 자기네 패거리로 기서 숙덕대는 것에도 데미앙은 신경쓰지 않았다.
잠시 후,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놈이 다가왔다. 소문대로라면 이놈이 로카치오. 얼굴의 X자 흉터가 안그래도 험악한 인상에 일조를 하고 있고, 머리 하나 정도는 데미앙보다 더 컸다. 그렇다 해도 그가 20대의 어색함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걸 데미앙은 눈치챘다.
"'검격'을 쓰는 일반인을 만날 줄이야. 이젠 다 사라진 줄 알고 있었는데."
"귀찮으니까 가라."
"그런 데 그거 아나?"
로카치오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어느새 가이스나드 (바스타드 소드급의 장검이지만 폭은 좁고 볼이 나온 검)의 날이 데미앙의 목으로 가 있었다. 데미앙이 앉은 자세 그대로 단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날카로운 솜씨.
"그걸 쓰는 사람이 여기 또 있다는 거."
데미앙은 단검으로 가이스나드를 막은 자세 그대로 힘들이지 않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 정도면 당황할 법도 하건만, 로카치오의 얼굴엔 그런 빛 하나 없이 자신만만이었다. 데미앙은 물었다.
"소속 부대는?"
"백귀3연대 7대대."
"어린 나이에 꽤나 격렬한 곳에 있었군."
"덕분에 피맛만 느끼는 산송장이 됐지."
데미앙은 한숨을 가볍게 쉬고 나서 말했다.
"소질은 있는 것 같군. 가르쳐 주지."
"뭐?"
데미앙은 칼을 쳐내며 연격에 들어갔고, 로카치오는 그제서야 당황했다. 긴 검을 쓰는 자에게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짧은 검에 익숙하며 긴 검의 간격보다 더 가까이 싸우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데미앙의 단검은 우습게 볼 스피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생사를 가르던 경험과 익숙함으로 인해 로카치오는 검을 안쪽으로 당겨쥐고 어떻게든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도 아직까지 데미앙이 봐주면서 하고 있었다는 건 까맣게 모른 채.
데미앙은 단검을 멈추고 검의 간격 밖으로 물러났다. 로카치오가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면서.
"왜, 지치신 건가?"
숨을 몰아쉬면서도 되려 너스레를 떠는 로카치오를 보면서 데미앙은 읊조렸다.
"보법과 허리."
"뭐?"
데미앙이 다시 연격을 치고 들어갔다. 이번엔 단검의 자루를 이용한 타격기였다.
"보법이 잘못 되어 있으니,"
데미앙의 단검자루가 허벅지를 질러오는 걸 느끼면서 로카치오는 발을 빼려고 했지만 다리가 묵직해져버려 한 타이밍 늦게 움직였다. 작렬하는 고통을 느끼며 로카치오는 몸을 겨우 피했지만 어느새 등으로 돌아간 데미앙의 단검자루는 이번엔 허리중심을 향했다.
"허리를 제대로 못써 부담이 누적되고,"
허리를 내질러 친 데미앙의 연격이 이번엔 로카치오의 어깨를 강타했다.
"검격의 발동이 제대로 되지 않으며,"
마지막 일격이 로카치오의 안면을 강타했다. 이번엔 검자루도 쓰지 않은 주먹질이었다.
"결국 이런 공격에도 당한다."
코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피. 콧잔등을 제대로 얻어맞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태에서도 로카치오가 반사적으로 애써 검을 거머쥐고 자세를 잡으려 노력하는 동안 데미앙이 말을 이었다.
"검격은 제국군 병사의 강함을 위해 개발된 것이다. 제국군의 병사는 항상 보법부터 제대로 연마를 해야 하고, 복무하는 최소 3년동안 꾸준히 해야만 기본기가 비로소 닦이는 거지. 넌 군에 있으면서도 검격의 껍데기만 배우고는 나와서 깝죽대는 거다. 나와 내 스승님의 검술을 더럽히지 마라."
로카치오는 비틀거리면서도 호기 좋게 말했다.
"너와 네 스승님이라.....흐흐흐. 마치 네가 데미앙 페르마이어인 것처럼 말하는군!"
"사실이 그러니까."
데미앙의 말에 로카치오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네가 그 자라면 난 그 스승 길가메쉬다!"
로카치오는 다시 달려들었다. 보법이 검격과는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을 보며 데미앙은 몸을 피했다. 하지만 검은 베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짓쳐들어오는 것이었다. 데미앙은 피하던 몸을 멈췄다.
"내 승리다!"
로카치오는 그 말을 한 직후, 검과 함께 고꾸라지면서 몸이 뒤집혀 쓰러졌다. 순간적인 일이었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이 검 앞에 녀석이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이 쓰러지다니.
"이걸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했었나 보군."
데미앙은 단검을 칼집에 넣어 옆구리에 차고는 말했다.
"검격 최종장도 접해보지 못했던 건가. 검격의 보법을 창의적으로 바꾼 건 칭찬할만한 발상이다만."
일이 일단락되는 듯 싶자 옆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구경을 했군."
백발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우리 가게를 찾아온 손님같은데 들어오게. 너희들은 로카치오를 데리고 가라. 이 분께서 살살 다뤘을 테니까, 좀 누워 있으면 괜찮을게다."
데미앙은 그가 스케루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