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고기는 정사다.
1.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홍수설화가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슈메르문명(기원전 3천년경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의 홍수설화와 유사하며,
지질학적으로도 기원전 2천년전에 지구에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홍수에 관해서는 동양의 고대사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단고기』중의 『단군세기』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편에 1세 단군왕검때(丁巳50년, b.c.2284) 큰 홍수가 있었는데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이를 극복하고
그 비법을 중원지역 요순시대 순이 파견한 우에게 태자 부루를 도산에 파견하여 치수를 위한 삼보를 전해주고
국경을 정해 유영지방과 회대지방산동지역과 양자강하류역)의 동이제후들을 평정하여
직접 분조 를 두어 당시의 중원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직접 5년마다 순수하시어 이 네번이나 조근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짚니다.
2.환단고기의 원본이 돼는 규원사화 원본 발견.
3.오성취루(五星聚婁)현상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13세 단군흘달 50년 기원전 1733년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다섯 행성이 일직선으로 늘어서는 오성취루 현상 기록이 있는데
이를 컴퓨터로 시물레이션 해본 결과
오성취루 는 기원전 1733년에는 12월경 해가 뜨기 전에 동쪽 지평선부터 서쪽 지평선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고
기원전 1734년에는 7월 13일 해가진 직후 서쪽 지평선상에 나타났다
이는 그후 220년이 지나야 다시 나타나는 드문 현상으로 만약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어떻게 이렇게 기원전 1733년 전의 천문기록이 나왔겠는가?
그런데 '한국상고사 학보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이라는 글에서 보면
중국에서는 천문기록이 기원전 776년에야 처음 등장한다.
그렇다면 단군세기의 기록은 이보다무려 1천년이나 앞선다.
과거의 천문현상을 시물레이션 할수 있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므로 결국 환단고기 에 나오는 기원전 1733년에 오성취루 현상이 있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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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위서 아니다"
박 현 - 고대 사학과 졸,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
한국고대지성사 산책, 백산서당 1995. 5.25 (페이지 66~ 73쪽)
1)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이다.
한국 역사 연구회 고대사 분과에서 지은 "한국 고대사 산책"의 다섯번째 주제는 "환단고기 믿을 수 있나"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표준적인 견해들이 두루 나타나고 있다.
첫째,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남생(南生 : 연개소문의 아들)의 묘지명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환단고기"에 나오는데 그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지어진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1923년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만약 남생의 묘지명이 1980년도에 발견되었다면 환단고기는 1980년 이후에나 지어진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1949년에 조작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틀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같은 사례가 있다.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다)의
문제(文帝: 중국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다)인
대흠무(大欽武)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독자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실제로 1920년에 간행된 책 가운데도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찬 발간한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천부경을 인용한 경우가 있다.
전병훈이라는 분이 저술한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1920년 간행)인데 명문당에서 근래(1983년)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적도 있다.
물론 이것은 1949년 조작설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둘째,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전세계"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와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위서 시비의 좋은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선입견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동일한 지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낙양(洛陽)이라는 지명만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다.
황하의 중류에 있는 중국의 고도 가운데도 낙양이 있으며,
경상도 상주도 그 옛 이름이 낙양이었음을 구태여 예로 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울러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요사(遼史)"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비판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 기록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등의 문헌이
전혀 이름조차 들어*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희귀한 책들을 찾아 모으라고 명령을 내린 조선 세조 때나 성종 때, 명령에 따라 수집한 희귀본 20여종 가운데
"조대기"라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성종 이후 이름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리학에 의한 학문 세계의 순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이나 세조가 불교를 숭배한다고 목숨까지 내걸고 반대하던 성리학의 천박한 추종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기록과 그 기록의 내용을 배타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흔히 "도가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이 같은 기록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지거나 개인 소장가의 장농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이론적 라이벌이었던 윤휴(尹휴, 1617 ~ 1680)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자와 소중화사상을 배격하고 단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 기록이야 어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대사 산책"의 해당 주제 필자는 특별히 숨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찌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지하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레지스?봇“?
"너희들은 어째서 숨어서 활동을 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이 비판자의 주장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민족사서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빨갱이 색출보다 훨씬 심했다.)
사실상 현재 제기된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주장은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 시비를 붙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자료와 고문헌을 엄밀히 검토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경우, 모든 기마종족을 같은 동포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며,
실제 그 시대의 현실이 그와 같았으므로 외형상 대동아 공영권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의 내용은 평등한 민족(종족)연맹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종족의 패권주의적 식민체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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